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29)
목덜미를 타고 소름이 쫙 끼쳤다.
홀로 남아 성녀가 했던 말들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섬뜩하고 불쾌하며 두려워졌다.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계속 의심이 들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믿지 않을 수가 없는 현실이 끔찍했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데?’
나는 성녀처럼 신의 목소리를 듣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데.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다치지 않을 수 있는지, 뭘 어떻게 해야 그 사람이 정한 이야기를 방해하지 않을 수 있는지도 모르는데.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똑똑똑!
아무리 생각해봐도 혼자서는 해답이 나지 않는 질문들을 의미 없이 이어가고 있을 때였다. 작고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이곳에서 레이몬드 알렉 카지스 황자 전하의 담당을 맡게 된 리나라고 합니다. 황자 전하의 부탁, 아니, 명을 받고 와, 왔습니다!”
안에서 내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던 상대가 말을 더듬으면서도 당차게 외쳤다. 아무래도 아직 어린 여자아이 같아서 얼른 문가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그러자 예상대로 유리 황녀 또래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잔뜩 긴장한 채 문 앞에 서 있었다. 갈색 머리칼을 양 갈래로 땋은 모습이 아주 귀여운 여자아이였다.
여자아이는 나를 보자마자 허리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전달자 역할에 충실했다.
“레이몬드 알렉 카지스 황자 전하께서 헤더 영애께 후원에서 만나 뵙기를 청하셨습니다. 혹시 어……그러니까 몸이 아프다거나 다른 일로 바쁘다거나 하지 않으시면, 청에 응해주실 수 있을까요!”
레이몬드 2황자가 직접 찾아오지 않고 나를 밖으로 불러내는 게 조금 의외긴 했지만, 만남을 청하는 것 자체는 예상 안의 일이었다. 나는 긴장해서 딱딱하게 굳어있는 여자아이에게 최대한 상냥하게 미소를 지으려 애쓰며 말했다.
“고마워, 지금 당장 가겠다고 전해드려 줄래?”
“네, 넷! 알겠습니다!”
리나 라는 이름의 여자아이는 내 얼굴을 잠시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갑자기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힘차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내게 몇 번이나 허리를 꾸벅꾸벅 숙여 보인 후 토다닥 달려가 버렸다.
저만큼 달려가는 뒷모습도 너무 귀여워서 여자아이가 사라질 때까지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는 여자아이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꾸물거리며 방을 나설 준비를 했다. 옷도 미리 갈아입고 있었고, 이대로 후원 쪽으로 나가기만 하면 되는데도 나는 한참을 방 안에서 서성거리다 겨우 방을 나섰다.
가는 동안에도 계속 걷다 서다를 반복하며 걸음을 옮겼다. 레이몬드 2황자가 나보다 먼저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을 걸 알면서도 그랬다. 레이몬드 2황자가 나를 찾는 이유도 대충은 예상이 가고, 내가 그에게 해야 하는 말이 뭔지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 * *
긴 회랑을 따라 걷는 동안 내가 해야 할 말들에 대해 생각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어떤 목소리를 내야 하는지. 그리고 혹여나 눈물이 날 것 같으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예측 가능한 방향에서의 상황들을 전부 머릿속에 입력하고 그에 대비했다.
타인을 속이기 위한 거짓말이나 연기 같은 건 영 자신이 없었다. 실수하지 않도록 주의가 필요했다.
코너를 돌자 후원의 한가운데 세워진 가제보가 보였다. 그리고 예상대로 먼저 도착해 나를 기다리고 있는 레이몬드 2황자도.
나는 아직 그가 나를 발견하지 못한 걸 확인하고는 숨을 크게 한 번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긴장된 침을 삼키며 지금부터 겉으로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도록 무표정을 만들어냈다.
또각또각.
레이몬드 2황자에게 점점 가까워지는 내 구두 소리가 회랑을 울렸다.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에 레이몬드 2황자도 드디어 나를 발견했다. 고개를 든 그의 금색 눈동자가 살며시 휘며 나를 향해 웃어 보였다. 착각이 아니라면 반가움과 애정이 뒤섞인, 황홀할 정도로 예쁜 그 미소에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가슴 부근이 또 불편해졌다.
“헤더 영애.”
겨우 다시 걸음을 옮겨 가제보 안으로 발을 들이자 레이몬드 2황자가 반갑게 내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이내 굳어있는 내 표정을 본 건지, 그의 입가에 있던 미소가 조금씩 사라졌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뇨, 리나라는 아이가 말을 잘 전해줬나 걱정했는데 나와주셔서 안도했습니다.”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다가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니 그가 조심스러운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레이몬드 2황자의 눈동자가 무표정한 내 얼굴을 살피는 게 느껴졌다.
나는 지금의 상황 자체가 끔찍할 정도로 싫어 당장이라도 가제보를 뛰쳐나가고 싶어졌다. 감히 그에게 냉랭한 태도를 보여야 하는 나의 상황과 그런 나를 보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긴커녕 오히려 내 눈치를 살피는 레이몬드 2황자의 선한 눈동자가.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이번에 연달아 일어난 일로 많이 놀랐을 거라 생각해요.”
레이몬드 2황자가 진중한 어조로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입장에서 더 확실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 성녀 아리아와 헤더 영애가 의식을 없는 동안 많이 반성했습니다. 바다의 결계만 신경 쓸 게 아니라 영주성 내부의 경비도 신경 썼어야 했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그는 아마 내 표정이 어두운 이유가 성녀가 연이어 습격을 받은 일로 충격을 받은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것도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영주성 안에서, 실제로 눈앞에서 사람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걸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웃을 사람은 없을 테니까. 천천히 그날의 일부터 설명하고 사과하려는 모습이었다.
“버젯 교수에게 이미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다행히 성녀 아리아도 지금은 많이 안정되었다고 하니 너무 걱정하진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차분히 말을 이어나가던 음성이 끝을 흐리며 잠시 흩어졌다. 말을 고르는 것처럼 머뭇거리는 기색이 느껴졌다.
“헤더 영애에게는 자꾸만 실례를 범하게 되네요. 두 번 다시 그러지 않겠다 약속하고는… 또다시 멋대로 손목을 붙들었던 일도 그렇고, 오늘 제가 허락도 없이 방에 들어간 것도 그렇고.”
크흠. 레이몬드 2황자가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작게 헛기침을 했다.
“애초에 죄송해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은데. 뜻대로 잘 안 되는군요. 저도 제가 이렇게 한심한 인간인 줄은 몰랐던 터라 헤더 영애 보기에 민망할 지경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는 늘 입가에 머금고 있던 다정한 미소마저 지운 채 진지하게 사과의 말을 건네왔다. 늘 그렇듯 진심이 느껴지는 눈동자와 목소리였다. 가만히 시선을 떨어뜨린 금색 눈동자 위로 긴 속눈썹이 음영을 드리웠다.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딱딱하게 굳어있음에도 근사하기만 한 남자의 얼굴을 조용히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레이몬드 2황자가, 이 사람이 내게 좋아한다고 말한 건 아마 진심이겠지. 그런 말을 농담 따위로 건넬 사람이 아니니까. 여전히 믿기지도 않고, 이해할 수도 없지만.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아마 이 사람의 입장에선 늘 보던 아름답고 고귀한 것들 사이에서 어딘가 모자라고 부족한 내가 신기하고 희귀해 보여 눈에 띄었을지도 모른다. 단순히 특이한 존재를 보고 호기심에 시선이 가는 걸 호감으로 착각한 것일 터다.
진짜 좋아한다는 감정이 아니라 처음 보는 신기한 것에 잠시 마음을 빼앗겼을 뿐.
태어난 순간부터 모든 걸 손에 쥐었을 사람이니, 시야에 들어온 희귀한 것이 손에 들어오지 않아 조금 애가 탔을 뿐이다. 호기심에서 그쳤어야 할 감정이 혼란해져 착각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니 아마, 눈에 보이지 않으면 금방 잊어버릴 게 분명한 가벼운 감정일 거라 확신했다. 그 정도의 감정이라면, 괜찮을 것이라고. 잊는데 긴 시간이 걸리지도, 이 사람이 오래도록 괴로워하지도 않을 테니까. 나도 그렇게까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그렇게 믿기로 했다.
나는 손의 떨림을 감추기 위해 힘껏 쥐고 있던 드레스자락을 더욱 힘주어 붙잡았다.
“전하께서… 제게 미안해하실 일은 없다고 생각해요. 괜찮습니다. 오늘 일도 실수였을 뿐이고 저는 크게 개의치 않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러니 그런 얼굴 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제발… 그런 얼굴 하지 마요.
나는 이제야 그때 레이몬드 2황자가 그렇게나 괴로운 얼굴로 내게 말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술에 취해 레이몬드 2황자의 뺨에 입을 맞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날, 머릿속이 새하얘져 무작정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던 내게 그가 어떤 심정으로 좋아한다는 말부터 했는지를.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나 같은 사람 때문에 당신이 그렇게 머리를 숙이지 마요. 나는 정말 괜찮으니까. 전하께서는 그저…… 언제나처럼 다시 웃어주세요. 평생 가슴 속에만 묻어둬야 할 말들을 목구멍 안으로 삼킨 채 나는 천천히 시선을 떨어뜨렸다.
―클레어!
성녀가 그렇게 쓰러지는 걸 보고서, 레이몬드 2황자의 품에서 겨우 안도하며 의식을 잃기 전의 기억과 감정들이 문득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 사람의 곁에 있다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모두의 곁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나를 괴롭게 만든 이는 유리 황녀도 알렌 4황자도, 그토록 사랑했던 리하르트 아델도 아니었다.
어째서였을까 하고 이제 와서 의문을 느끼기엔, 아무리 바보 같은 나라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고, 인정하게 되는 순간부터 스스로의 가슴에 상처를 내게 될 뿐인 감정이지만.
이 사람을 향한…… 어쩌면 이미 막을 새도 없이, 자각조차 하지 못한 채 홀로 멋대로 크기를 키워나가고 있었던 마음을.
“유리 황녀 전하의 관심이 멀어질 때까지 약혼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약속을 파기하고 싶어요.”
유리 황녀를 처음 만났던 때. 그때 유리 황녀를 단호히 내쳤을 때처럼, 레이몬드 2황자가 찾아왔을 때도 그를 따라나서지 않고 거절했다면 어땠을까.
아예 처음부터 누구와도 얽히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유리 황녀도, 이 사람도, 나도, 더 이상 상처 받지 않고 끝날 수 있었을까. 이미 다 지난 일들을 돌이켜보며 나는 후회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