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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28) (91/152)

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28)

나는 우선 성녀가 잘못된 게 아니라는 걸 알고 나서야 안도하며 몸에서 힘을 풀었다. 긴장이 풀리자 잊고 있던 갈증과 두통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물을 찾아 시선을 돌렸다.

“물 줄까?”

눈치 빠른 시온이 내 시선을 파악하고는 물컵에 물을 따라 갖다 주었다. 나는 작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는 얌전히 물컵을 받아 물을 들이켰다. 미지근한 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자 조금 정신이 들었다.

“더 마실래?”

살가운 질문에서 나에 대한 걱정이 느껴졌다. 나는 시온에게 고마움이 담긴 시선을 보내며 괜찮다고 답했다.

“어휴, 이게 진짜 무슨 난리인지. 성국 내부가 지금 장난 아니게 살벌하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너도 괜히 그때 성녀랑 같이 있어서 진짜 놀랐겠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연속으로.”

시온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짜증을 내다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박수를 짝 쳤다.

“저기 그래서 말인데. 너 계속 여기 있을 거야?”

그녀의 질문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하고 의아한 얼굴을 하자, 시온이 어딘가 잔뜩 불만 어린 얼굴로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말했다.

“여기 분위기도 생각보다 좀 심각한 것 같고. 나도 좀 사정이 생겨서 예정보다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봐야 할 것 같거든. 일단 한 번 돌아가서 정리를 좀 하고, 다시 제국으로 오던가 할 생각인데. 넌 어떻게 할래?”

어떻게 하겠냐니…….

오른손이 불편한 듯 계속 움직여보는 시온의 행동이 왠지 묘하게 낯설지 않다고 생각하던 나는 그녀의 질문에 살짝 당황한 얼굴을 했다. 내게 어떤 선택지가 있는지 몰라 우물쭈물하니 시온이 내 손을 덥석 붙잡고는 눈을 반짝였다.

“생각이 있으면 나랑 같이 가지 않을래? 너한테 보여주고 싶은 것도 있고.”

“보여주고 싶은 것……이요?”

“응, 나랑 가자. 응? 응?”

나는 불안한 눈으로 시온에게 붙잡힌 내 손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제안이 당혹스럽긴 하나, 유리 황녀에게서도, 레이몬드 2황자에게서도 떠나기로 결심한 지금은 이 사람을 따라가는 게 내게는 가장 좋은 결정이긴 할 터였다.

하지만 내가 같이 가도 되는 걸까. 유리 황녀나 레이몬드 2황자, 그리고 성녀뿐만이 아니면 어떡하나. 혹시 시온을 포함해 다른 사람들도 나 때문에 해를 입으면 어떡하나. 걱정스러웠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아직 성녀가 마지막에 하려던 말이 뭐였는지 듣지 못한 채 떠나는 것도 내키지 않았고.

“난 절대 네 재능 안 썩혀. 네가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지원해줄 수 있는 능력도 돼. 돈, 시간, 사람. 뭐든지.”

“아! 레지나 왕립 예술 아카데미에는 관심 없어? 그때 그 황자한테 들어서 알고 있지? 내가 거기 교수로 있는 거. 내 권한이면 추천서고 입학시험이고 아무것도 필요 없어. 너 하나 입학시키는 건 일도 아니야.”

“믿어도 좋아. 난 네가 가진 재능에 날개를 달아줄 수 있는 사람이야.”

그림을 그리는 이라면 누구라도 혹할 수밖에 없는 제안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시온이 붙잡고 있던 내 손을 놓아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으음, 내가 너무 갑작스러웠나. 너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내 주제에 그녀의 제안을 고민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도 죄송스러울 지경인데, 그녀가 나를 배려해주며 한 발짝 물러나자 더더욱 몸 둘 바를 모르게 되었다.

“잘 생각해봐. 웬만하면 나랑 같이 가는 쪽으로! 응? 절대 후회 안 하게 해줄게! 내가 설마 그 황자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너한테 사기를 치겠어? 나 진짜 믿어도 돼! 알겠지? 내가 진짜 잘해줄게! 어?”

슬쩍 물러나는 것 같다가도 다시 적극적으로 호소해오는 시온의 기세에 밀려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대답도 듣지 않고 문이 열렸다. 누가 저렇게 무례한 행동을 하는 걸까 눈살을 찌푸리는데,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상대 역시 놀란 듯 문을 열고 들어오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 황자 전하 또 오셨네.”

서로 당황해 굳어버린 나와 레이몬드 2황자를 대신해 시온이 먼저 그에게 알은 척을 했다.

레이몬드 2황자는 아마 내가 아직 깨어나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조용히 노크만 하고 들어오려다 멀쩡히 일어나 있는 나를 보고 당황한 것 같았고.

나는 나대로 예상치 못한 레이몬드 2황자의 등장에 허둥댔다. 언제 누가 갈아입혔는지는 몰라도 잠옷 차림인 내 모습이 부끄러워 이불을 급히 끌어당겼다.

“죄송합니다. 아직 의식이 없는 줄 알고. 실례했습니다.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다행히 레이몬드 2황자가 그런 내게서 즉각 시선을 돌리고 다시 문을 열고 방을 나갔다. 굳은 얼굴로 돌아서는 레이몬드 2황자의 뒷모습에 왠지 아주 조금, 가슴 부근이 불편해졌다.

“아니, 이미 들어와서 얼굴까지 봤으면서 뭐하러 저러는 거야. 설마 너 잠옷 차림이라고 저래?”

시온이 2황자가 나간 방문을 쳐다보며 살짝 기가 막힌다는 듯 허허 웃었다.

“저런 점까지 포함해서 저 황자는 진짜 흠잡을 데가 없네. 그야말로 완벽하게 이상적인 황자님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고는 레이몬드 2황자를 비꼬는 건지 칭찬하는 건지 모호한 투로 말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너 저 황자랑 아직 안 사귀지? 왜 안 사귀어? 저기 황가에서 반대가 심해? 아니면 네가 너무 부담스러워서 찼어?”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나는 당황해 눈을 깜빡이다 즉각 시온의 말에 부정하고 나섰다.

“2황자 전하와는 그런 관계가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저쪽에서 너 좋아 죽겠다고 저렇게 티를 내는데? 게다가 너도 영 마음이 없는 건 아닌 것 같더구먼.”

“아니에요!”

나는 시온이 민망할 정도로 큰 소리를 냈다. 그녀는 단순히 장난을 치거나 농담이었을 뿐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마치 잘못을 저질러놓고 들켜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애처럼 당황해 언성을 높였다.

바보처럼 누가 봐도 알 수 있게 티를 내고 다닌 건가 싶어 부끄러움이 앞선 탓이었다. 이런 상황에서조차도 정신을 못 차리고 한심하게.

“아, 그, 그래?”

혹시라도 누가 우리 대화를 엿듣기라도 할까 나는 불안하게 문가를 돌아보던 나는 조금 늦게 시온의 반응을 살폈다.

시온은 갑자기 언성을 높인 나로 인해 무척 놀란 기색이었다. 그제야 내 잘못을 인지하고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 나는 잔뜩 풀이 죽어 고개를 푹 숙였다.

“갑자기 소릴 질러서 죄송해요. 하지만 그건…… 절대 아니에요. 절대로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분을 좋아하고 말고 할 수가 있겠어요.”

그런 나를 가만히 쳐다보던 시온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음, 저기. 미안. 내가 착각했나 보다. 앞으론 괜한 소리 안 할게. 진짜 미안.”

진지한 표정으로 사과를 해오는 그녀에게 나는 아니에요, 하고 작은 목소리로 간신히 답했다.

“아직 피곤하지? 나 그만 갈 테니까 일단 좀 쉬어.”

시온이 다시 내려간 이불을 내 몸에 덮어주며 가볍게 토닥이는 시늉을 했다. 잠 못 들고 칭얼거리는 어린아이를 재워주듯이, 자상한 손길이었다.

나는 차마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지도 못하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사합니다.”

시온이 괜히 내 눈치를 살피며 방을 나가고, 혼자 남겨진 나는 그녀의 말대로 다시 침대에 누우려다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켰다. 레이몬드 2황자가 나중에 다시 오겠다고 말을 하고 간 게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었다. 워낙 바쁜 사람이라 오늘 안에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지금은…… 레이몬드 2황자와 만나고 싶지 않았다. 눈앞에서 성녀 아리아가 끔찍한 꼴을 당하는 걸 보고도, 레이몬드 2황자도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태연히 그 사람과 마주하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시온을 따라가든 그렇지 않든 어떤 결정을 하든 한 번은 만나야 할 것 같았다.

또다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날 순 없으니까. 미리 얘기를 해둬야 그 사람도 정리를 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방 안에 있는 옷장을 열어보았다. 전에 입고 있었던 옷이 어디에도 보이질 않아 새 옷을 찾아볼 셈이었다. 옷장 안에는 언제 이렇게 채워둔 걸까 싶을 만큼 많은 드레스가 있었다. 나는 그중 제일 무난한 걸 골라 갈아입었다.

대충 물로 얼굴을 씻고 부스스한 머리칼을 빗어 단정하게 정돈한 후, 다시 침대로 돌아가 앉았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한 채 생각을 했다. 이제부터 내가 뭘 어떻게 하면 좋을지.

시온의 제안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조건들이었다. 햇볕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방에서 다른 이를 빛나게 해줄 그림만 그려왔던 나였다. 그런 내게 시온의 제안은 살면서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가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레지나 왕립 예술 아카데미의 입학, 든든한 후원자의 존재, 앞으로는 당당히 내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 전부 내가 그토록 꿈꿔왔던 것들뿐이었다. 애초에 시온을 따라가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내게 있을 수가 없었다.

다만, 내가 시온을 따라가도 그녀에게 피해가 없을 것인지. 그런 부분이 걱정될 뿐이었다.

그동안 성녀 아리아가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언급했던 이들은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 레이몬드 2황자, 리하르트 아델, 그리고 본인이었다. 혹시 그녀가 언급했던 사람들과 엮이지만 않으면 괜찮은 걸까.

한 사람이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 이야기의 과정도 결말도 정해져 있고, 그에 따라 정해진 대로만 움직여야 하는 체스 말.

신과 운명에 대해 말할 때보다 더 믿기 힘든 말들이었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가 신도 아닌, 한 사람이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라니. 그리고 마치 태어날 때부터 운명이 짜인 것처럼 모든 이야기의 과정과 결말이 정해져 있다니.

성녀의 말을 전부 믿기는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만약 그녀의 말이 전부 진실이라면, 그녀가 말했던 그 「누군가」가 지금도 우리를 다 지켜보고 있다는 건가. 감시하듯이 나 역시도 지켜보고 있는 걸까. 그런 식으로 자기가 만들어낸 이야기를 누군가 망치려 들면 그 즉시 없애버리려 드는 걸까. 나와 성녀에게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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