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27)
“헤더 영애, 사실 지금 헤더 영애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가 전부 한 사람이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라면 어떻게 할 건가요.”
얼핏 초조해 보이기까지 한 청색 눈동자가 다급히 말을 이어나갔다.
“이야기의 과정도 결말도 전부 정해져 있고, 우린 그 체스판 위에서 정해진 대로만 움직여야 하는 체스 말이라면요? 정해진 이야기에 반하는 말이나 행동을 하면 제약을 받게 돼요. 원작의 이야기를 해치려고 하면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대가를 받아요. 그게 본인이든, 혹은 본인에게 소중한 사람이든 누군가는 반드시.”
황성 안에서 알렌 4황자와 함께 우연히 만났던 날. 내게 해주었던 얘기를 똑같이 반복하고 있을 뿐인데, 분위기는 그때와 너무도 달랐다. 절박하고, 초조함이 서린 눈으로 호소하듯 내게 말하고 있었다.
성녀는 격해진 제 감정에 못 이긴 듯 아예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내 앞으로 다가오려 했다.
“전에 말했던 것처럼 신이니 운명 같은 거창한 게 아니에요. 이건 그냥 전부 다 소……!”
챙-, 하고 유리가 깨지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먼저였다.
날카로운 바람과 함께 등 뒤에서 날아온 무언가가 성녀의 가슴 위로 박혔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쿨럭, 힘겹게 말을 잇던 그녀가 기침과 함께 울컥 피를 토해냈다. 눈앞으로 피가 튀고, 성녀의 몸이 비틀거리다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 일련의 과정들이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지나치게 현실감이 없었다.
나는 숨 쉬는 것조차 잊고 얼어붙은 몸을 겨우 움직여 쓰러진 성녀를 바라보았다. 성녀의 가슴을 관통한 건 화살이었다. 창백하게 질린 성녀의 얼굴과 그녀의 드레스 여기저기에 붉은 피가 튀어있었다. 성녀는 괴로운 얼굴로 가슴께에 손을 댄 채 신음을 흘렸다. 금세라도 끊어질 듯 위태로운 숨소리도 함께였다.
몸이 덜덜 떨렸다. 발은 꼼짝도 하지 않는데, 한참을 달려온 것처럼 숨이 가빴다. 아니,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아리아님, 괜찮으십니까!”
곧바로 쾅쾅 잠긴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를 들은 성기사들이 이상함을 느끼고 달려온 것 같았다.
가서 잠긴 문을 열어줘야 하는데, 하다못해 저 사람들에게 당장 들어오라고 외쳐야 하는데. 목소리조차 나오질 않았다.
“아리아님!”
문을 부술 것처럼 강하게 내리치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워낙 문이 두꺼워 부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았다.
‘가서 열어줘야 해.’
나는 도무지 움직여지질 않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이려 애썼다. 하지만 미처 한 걸음을 떼기도 전에 다리가 풀려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멍청아, 뭐 하는 거야. 당장 일어나.’
이럴 때가 아닌데, 몸은 움직이지 않고 눈물부터 났다.
왜 내게, 왜 내게만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내가 뭘 잘못했기에,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떨리는 팔을 뻗어 손으로 바닥을 짚고 다리를 질질 끌었다. 기어서라도 가야 했다. 가서 문을 열어주고, 저 사람들에게 성녀를 구해달라고 말해야 했다.
그런데 이제는 팔까지 푹 꺾여 완전히 쓰러지고 말았다. 어찌할 새도 없이 바닥에 쿵 부딪힌 이마가 욱신거렸다. 나는 힘겹게 눈물을 참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제발, 움직여. 제발.’
제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한심한 팔다리를 쥐어뜯듯이 붙든 채 이를 악물 때였다.
콰앙!
커다란 굉음과 함께 바람이 일었다. 두꺼운 문이 종잇조각처럼 구겨진 채 날아가 바닥에 처박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언젠가, 지금과 같은 순간이 있었다.
몇 번이고, 같은 순간이.
“클레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무력하게 주저앉아만 있는 내게, 몇 번이고 다가와 손을 내밀어주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내게 웃어주고, 다정하게 대해주고,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주었다.
부서진 문 너머로 달려와 곧장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나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눈앞의 이 사람이.
“클레어, 괜찮습니까? 클레어!”
대답도 없이 멍하니 레이몬드 2황자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으니, 그가 불안한 얼굴로 내 이름을 계속 불렀다. 그러면서도 내가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재빨리 확인하는 눈동자가 바빴다.
그런 모습조차도 꼭 그림처럼 근사하고 멋져서, 새삼 이렇게 잘난 사람이 왜 나를 좋아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리아님!”
레이몬드 2황자를 따라 방안으로 뛰어 들어온 성기사들이 비명처럼 성녀의 이름을 외치며 쓰러진 그녀에게 다가가는 게 보였다.
다행이다. 이제 저 사람들이 신관과 의원을 불러주겠지. 성녀 아리아는 이제 괜찮겠지. 절대 이런 곳에서 목숨을 잃거나 하지 않겠지. 절대. 그런 일은 없겠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며 조금 안도한 탓일까. 갑자기 눈앞이 핑 돌며 시야가 이지러졌다. 몸이 앞으로 기우는 것과 동시에 뻗어온 손이 내 몸을 잡아챘다.
“클레어!”
내 이름을 부르는 레이몬드 2황자의 목소리가 좋았다. 평소엔 늘 다정하고, 온화하기만 한 음성이 불안하게 떨리고 있다는 게 조금 신경이 쓰였지만 그뿐이었다.
―헤더 영애, 사실 지금 헤더 영애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가 전부 한 사람이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라면 어떻게 할 건가요.
성녀가 내게 해줬던 이야기들이, 다시 한번 가슴 속을 파고들었다.
―이야기의 과정도 결말도 전부 정해져 있고, 우린 그 체스판 위에서 정해진 대로만 움직여야 하는 체스 말이라면요? 정해진 이야기에 반하는 말이나 행동을 하면 제약을 받게 돼요. 원작의 이야기를 해치려고 하면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대가를 받아요.
내게 말을 전하려던 성녀의 절박한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게 본인이든, 혹은 본인에게 소중한 사람이든 누군가는 반드시.
그리고 그 말을 전해준 직후 그녀가 어떤 형태로 자신이 했던 말을 증명했는지도.
끔찍했다.
정해진 이야기가 무엇이며, 나는 왜 누군가가 움직이는 대로만 움직여야 하는 체스 말의 존재자 된 것이며, 제약과 대가라는 건 다 뭔지.
묻고 싶었다. 따지고 싶었다. 성녀가 말했던, 누군지도 모르는 「그 사람」에게.
나는 왜, 어째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 머무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지.
덜덜 떨리는 주먹을 말아쥐자 손끝에 레이몬드 2황자의 옷깃이 닿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 옷자락을 마치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힘껏 움켜쥐었다.
‘내가 곁에 있으면 레이몬드 2황자도 다치게 되겠지. 언젠가 성녀처럼 내 눈앞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질 날이 오겠지.’
나는 놓치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힘주어 움켜쥐고 있던 레이몬드 2황자의 옷을 천천히 놓았다. 이미 내 손안에서 잔뜩 구겨진 그의 옷을 내려다보던 나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눈동자에 맺혀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니…….’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를 떠났던 그 날처럼.
나는 이 사람을 떠나야 했다.
그 사실을 다시 한번 자각한 순간 깨달았다. 잔잔하던 수면 위로 물방울 하나가 떨어져 파문을 일으키듯,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감정 하나가 내 안을 가득 채웠다.
이 사람의 곁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조금은 낯설고 달갑지 않은 마음 한 조각을.
* * *
탁!
뭔가가 바닥에 떨어져 데구르르 굴러가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그리고 쿵 하고 무언가에 또 부딪히는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 끙끙 앓는 소리도 들려왔다.
이게 다 무슨 소리지. 서서히 정신을 돌아오면서 작은 호기심이 머리를 들었다.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흐릿한 시야로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어? 어어! 정신이 들어?”
내가 미처 주변을 파악하기도 전에 먼저 상대가 호들갑스럽게 외치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갑자기 다량의 빛이 스며든 탓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아 나는 여러 번 눈을 깜빡여 시야를 확보하려 애썼다.
“나 누군지 알아보겠어?”
겨우 앞이 흐릿하게나마 보일 즈음 시온이 불쑥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시온.”
“어휴, 다행이다 진짜. 너까지 이틀이나 눈을 안 떠서 얼마나 걱정했던지. 아! 원래 황자 전하도 이틀 동안 거의 여기서 살다시피 했는데! 하필 지금 딱 그 곱상하게 생긴 마법사가 와서 데려가는 바람에 없네.”
시온은 겨우 한시름 놨다는 듯 이마를 쓸어내리며 다다다 말을 쏟아냈다. 나는 그녀가 말하는 레이몬드 2황자가 지금은 없다는 말에 잠시 아쉬움을 느꼈다가, 그런 감정을 느끼는 자신에게 놀라 급히 그 생각을 지웠다.
잠이 덜 깨 정신을 못 차린다 싶어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이불을 걷어내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어어, 갑자기 일어나면 안 될 텐데.”
시온의 걱정대로 급히 몸을 일으키자 어지럼증이 밀려들었다. 한순간 눈앞이 새하얘지며 앞이 보이지도 않아 침대 시트를 짚은 채 어지럼증이 가시길 기다려야 했다.
“너도 이틀이나 의식이 없었어. 의원이 아마 공기 중에 퍼진 독에 살짝 중독된 것 같다고, 다행히 생명에 큰 지장은 없을 거라고 하긴 했는데. 걱정하는 사람 눈에는 그냥 영영 못 깨어날 것 같고 그랬지 뭐. 어지럽거나 하진 않아? 물 좀 마실래?”
나는 그녀가 꺼낸 말 중에서 「너도」라고 말한 부분에서 멈칫했다. 나 말고도 또 의식이 잃은 사람이 있다면 분명 성녀 아리아일 것이다.
한 박자 늦게야 의식이 남아있던 때의 기억들을 떠올린 나는 초조하게 문가를 돌아보았다.
“성녀 아리아는요? 지금 어디 있어요? 사, 상처가 깊었어요. 여기에 화살을 맞아서. 많이 다쳤어요. 피를, 피를 이렇게 토하고.”
“진정해, 진정.”
불안정하게 질문을 쏟아내는 내 등을 토닥이며 시온이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일단 성녀는 무사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거의 반쯤 죽어가던 애를 겨우 겨우 살려놔서.”
내가 의식이 없는 동안의 상황들. 그녀의 설명에 의하면, 성녀는 자객에 의해 독이 묻은 화살을 맞아 이상할 정도로 피를 많이 흘렸다고 했다. 다수의 신관들이 신성력으로 상처를 치유하고, 독을 막은 채 해독을 하기 위해 애쓴 덕분에 간신히 목숨은 구했지만, 지금까지도 성녀가 의식을 되찾지 못해 다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그리고 그 와중에 나까지 계속 의식이 없는 통에 레이몬드 2황자가 줄곧 초조해하는 모습이 무척 안쓰러웠다는 말도 전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