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26) (89/152)

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26)

“헤더 영애.”

“헤더 영애.”

동시에 이름이 불렸다. 어느 쪽을 돌아봐야 할지 잠깐 망설이는 사이 작은 손 하나가 먼저 내 팔을 붙들어왔다.

“미안하지만 내가 먼저예요. 나와 대화하고 있는 도중에 방해를 받은 거니까.”

갑자기 당겨지는 힘에 내가 맥없이 성녀에게 휙 이끌려가자 반사적으로 손을 뻗던 레이몬드 2황자가 멈칫했다. 내게 닿기 직전 움직임을 멈추더니 표정을 굳힌 채 급히 손을 물렸다. 그러고는 뭔가 말을 하려는 듯하다 안으로 꾹 삼키는 기색이었다.

“……알겠습니다. 단, 이번에는 조금 더 안전한 곳에서 대화를 나누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담담히 말하는 레이몬드 2황자를, 나는 바라보지 않았다. 분명 내 얼굴 위로 닿는 시선이 느껴짐에도 나는 꿋꿋이 그 시선을 피했다.

레이몬드 2황자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정말 내 착각일 뿐이겠지만. 혹시라도 그가…… 정말 상처받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을까 봐. 내 착각에 불과해야 할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될까 봐.

그렇지 않은가. 말이 안 되지 않나.

어떻게 저 사람이, 저렇게나 대단한 사람이, 고작 나 같은 걸 좋아한다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됐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꿈에서조차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도무지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나는 완전히 패닉에 빠졌다.

그래서였을까. 내심 성녀 아리아가 나를 붙잡아준 게 안심이 됐다. 지금은…… 레이몬드 2황자와 단둘이 되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그와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나눌 자신이 없었다. 어제 레이몬드 2황자가 내게 했던 말들이 다시 언급되든, 되지 않든.

나는, 그에 대해 대답해줄 말이 하나도 준비되어 있지 않으니까. 아니, 애초에 그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조차 전혀 받아들일 수가 없으니까.

“나도 알아요.”

퉁명스러운 대답과 함께 또다시 팔이 휙 당겨졌다. 갑자기 몸이 기우뚱 기우는 바람에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옆을 돌아보자 성녀 아리아가 고갯짓으로 영주성 안을 가리켰다.

“헤더 영애, 이쪽으로.”

그러고는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나는 얼떨결에 그녀에게 질질 끌려가며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성녀가 갑자기 확 잡아당겼을 때 레이몬드 2황자 역시 동시에 놀라 내 쪽으로 손을 뻗는 걸 봤었다. 내게 그 손이 닿지는 않았지만.

위태롭게 끌려가는 내 모습을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던 레이몬드 2황자와 순간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 이번에도 잠깐 레이몬드 2황자의 표정이 굳었다.

나는 뭔가 크게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얼른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얌전히 성녀를 따라 걷는 데만 집중했다.

성녀는 영주성 안쪽 깊숙이 계속 걸었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우리를 따라오는 성기사들의 발소리가 조용한 복도를 울렸다. 인기척을 숨기려면 얼마든지 숨길 수 있을 텐데 자신들이 따라오고 있다는 걸 성녀가 알 수 있도록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았다.

한참을 걸어가던 성녀는 복도의 제일 안쪽, 커다란 문 앞에서 멈춰 섰다. 그녀가 문 앞에 다가가자 양옆으로 서 있던 기사들이 문을 열어주었다. 성녀는 자연스럽게 그 문을 지나 방안으로 들어섰다. 물론 그때까지도 그녀에게 손목을 붙들려있던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따로 부를 때까진 아무도 방에 들이지 마세요.”

성녀는 평소와 달리 어딘가 무기력하면서도 날 선 어조로 기사들을 향해 내뱉고는 직접 문을 쾅 닫았다.

닫힌 문을 굳게 걸어 잠그기까지 한 성녀는 어정쩡하게 문가에 서 있는 나를 지나쳐 드레스룸으로 걸어갔다. 나올 때는 양손에 커다란 수건을 하나씩 든 채였다. 그중 하나는 내게 안겨주고 다른 하나로는 자신의 젖은 머리칼을 거칠게 닦아내기 시작했다.

나는 얼떨결에 받아든 수건으로 머리끝만 만지작거리며 성녀의 움직임을 살폈다.

성녀는 아무렇지 않게 젖은 수건을 바닥에 내던지고는 소파로 가 털썩 주저앉았다. 양팔을 소파 등받이에 얹은 채 기대앉은 모습이 무척 편하고 자연스러워 보였지만 내 눈에는 그렇지 못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겉모습만 성녀일 뿐 꼭 다른 사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빗속에서 내게 소리를 지르고 미친 사람처럼 웃을 때도 무섭긴 했지만, 지금처럼 이런 식의 괴리감이 느껴지진 않았었는데.

“왜 아직도 거기 그러고 서 있어요? 여기 와서 앉아요.”

성녀가 나를 힐끔 돌아보더니 태연히 제 맞은편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애써 혼란스러운 기색을 감추며 그녀가 시키는 대로 얌전히 소파에 가 앉았다.

“그 황자, 생각보다 더 대단하네요.”

“네?”

성녀는 뜬금없이 황자를 언급하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꺼내왔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니 픽 웃음을 흘렸다.

“그거요.”

그녀가 눈짓으로 가리킨 건 레이몬드 2황자가 내 어깨에 덮어준 상의였다. 워낙 정신이 없어서 아직도 이걸 걸치고 있는지도 몰랐던 나는 살짝 당황해 손을 들어 옷을 슬며시 끌어 내렸다.

“왜요? 잘 어울리는데.”

그런 나를 보며 성녀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나는 민망한 표정으로 끌어내린 레이몬드 2황자의 옷을 얌전히 옆자리에 접어두었다. 대신 그녀가 건네주었던 수건으로 물기를 닦는 척 얼굴을 슬쩍 가렸다.

“레이몬드 2황자요. 원래도 뭐 굉장한 사람인 건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멘탈이 세다고 해야 하나.”

성녀가 다시 레이몬드 2황자를 언급하며 말을 꺼냈다. 중간에 처음 듣는 단어의 뜻을 이해 못하고 눈치를 살피는데, 그녀가 소파에 기대어있던 몸을 바로 세워 내 쪽으로 기울여왔다.

“아까 헤더 영애가 그 황자 손 뿌리치고 예전 애인 뒤에 숨었을 때요. 그걸 보고도 영애가 비에 젖어있으니까 자기 옷을 내주는 게 대단하다 싶어서요. 나라면 절대 못할 것 같거든요. 내가 좋아하는 여자가 내 손을 뿌리치고 헤어진 전 애인 뒤에 숨는 걸 보고 나서는 절대로.”

담담히 말을 내뱉은 성녀는 당황해 굳어있는 나를 보며 청색 눈동자를 길게 휘었다.

“딱히 시비를 걸려는 건 아니고요. 그냥 정말 순수하게 신기해서 하는 말이에요.”

그에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시선을 떨어뜨렸다. 일부러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그녀가 아까의 상황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언급할 줄은 몰랐던 터라 더 그랬다.

“리하르트 아델에게 고백받고 흔들렸어요? 그래서 레이몬드 2황자의 손을 뿌리친 거예요?”

이어진 확신에 찬 질문에는 더더욱.

“어떻게 알았냐고요? 그 남자가 나한테 와서 미안하다고 했거든요.”

성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고 있었다. 억지로 괜찮은 척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아무렇지 않은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오히려 뭔가 후련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당신처럼 나도 그 남자에게 버림받았어요. 날 떠나는 이유까지 구체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아마 당신 때문이겠죠. 이제 와서 자기가 밀어냈던 당신이 아까워진 모양이에요. 다시 봐도 진짜 남주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쓰레기 새낀데…… 그 앤 대체 왜 저딴 걸 남주라고 쓴 걸까.”

말끝에는 웃음기를 지우고 짧게 한숨을 내쉬는 그녀의 표정에 짜증이 스쳤다. 그러다 다시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딘가 자조 섞인 미소를 띠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헤더 영애 덕분에 이야기가 엉망진창이 됐어요. 이제 진짜 되돌릴 수도 없을 것 같아요. 그 애가 화가 났을 테니까, 어쩌면…… 우리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비슷한 말을 내리는 빗속에서도 들었었다.

진정 나라는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고 싶다는 듯 무시무시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그녀를 기억한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 내 목이라도 조르고 싶은 듯한 눈이었다.

그런데 그때와 비슷한 말을 하는 지금의 성녀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평온해 보였다. 신에게 고해성사라도 하듯 말을 늘어놓는 그녀는 왠지 조금 무기력하고 허탈해 보였다.

“이젠 내가 뭘 어떻게 해도 안 될 것 같아서요. 나도 이제 그만 애쓰고 싶어요. 어차피 돌아갈 수도 없을 테니까. 차라리 포기하니까 편하네요.”

성녀가 하는 말을 다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그래도 후련하다는 듯 말하는 목소리가 전부 진심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았다. 어디로 돌아간다는 건진 모르겠지만 그 말을 할 때에 그녀의 눈동자엔 여전히 미련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으니까.

“아까 왜 날 구해줬어요?”

이번엔 또 불쑥 질문이 날아들었다.

성녀는 내 쪽을 보지 않고 시선을 떨어뜨린 채로 가만히 말을 이었다.

“줄곧 영애를 괴롭게 만들고, 영애에게 죽으라는 악담까지 퍼부었잖아요. 어쩌면 내가 없었다면 리하르트 아델에게 버림받지 않았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런데 왜?”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 힘없이 떨어뜨린 고개와 축 처진 어깨가 낯설었다.

늘 당당하고 자신 있어 보이던 모습과 정반대인 성녀의 모습에 나는 답을 내어놓기 위해 허둥댔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때 내가 왜 그랬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이런 질문을 받고,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한 행동이 아니었으니까.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저, 그 순간에 당신을 구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솔직하게 답했다.

내 대답을 들은 성녀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럴 것 같았어요, 라고 작게 내뱉고는 다시 기운 없이 웃었다.

“헤더 영애의 그런 점이, 그 망할 꼬맹이가 어떻게든 당신을 살리고 싶어서 발버둥 치는 이유 중 하나겠죠.”

그녀는 예쁜 얼굴을 찡그린 채 웃는 듯 우는 듯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사실 헤더 영애 좋아해요. 아마 원래 내 몸이었다면 헤더 영애를 처음 만났을 때 청혼부터 했을걸요. 선한 인상에 얼굴은 너무 예쁘고, 웃으면 더 예쁠 것 같아서 나한테도 웃어줬으면 좋겠고…….”

장난스러운 말투 끝에 그녀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난 그냥 돌아가고 싶었을 뿐이에요. 원래 내가 살던 곳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이번엔 금세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괴로운 얼굴을 했다. 그리고 주먹을 한 번 힘껏 쥐었다 편 후, 무언가를 굳게 결심한 듯 결연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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