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25)
나는 리하르트 아델이 내미는 손을 외면한 채 성녀 아리아를 돌아보았다.
그녀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까처럼 나를 증오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눈동자는 아니었다. 충격을 받거나 질투에 휩싸인 눈도, 리하르트 아델을 향한 원망의 시선도 없었다.
그저 어딘가 허망한 듯도 하고, 그녀 자신도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잘 모르는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리하르트 아델이 그녀가 아닌 내게 먼저 손을 내미는 행동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성녀도, 리하르트 아델도 한참 동안 내리는 빗속에 서 있었던 것처럼 흠뻑 젖어있었다. 나는 뒤늦게 그 사실이 신경 쓰였다.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멍하니 성녀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다가온 커다란 손이 내 양팔을 붙잡고 강제로 내 몸을 일으켜 세웠다.
“툭하면 앓아눕는 녀석이 뭘 넋 놓고 있어.”
다급한 리하르트 아델의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자기가 뭐라고 날 아주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 걸까. 짜증이 났다.
이 남자의 손을 뿌리쳐야 하는데,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눈앞이 어지럽고, 머릿속이 멍했다. 비틀거리는 몸은 그에게 기대지 않으면 금세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빨리 숙소로 돌아가서-.”
바람이 일었다. 갑작스레 몸이 휘청거릴 만큼 강한 바람이 불어 다들 놀란 얼굴로 바람이 이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클레어!”
나 또한 힘겹게 뒤를 돌아본 순간, 마치 이제 막 허공에서 땅으로 착지하는 듯한 모습으로 레이몬드 2황자가 나타났다. 잘못 본 건가 싶어 눈을 크게 한 번 깜빡였다.
그는 어쩐지 창백한 얼굴이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다급히 내 앞으로 걸어온 레이몬드 2황자가 내 왼쪽 팔을 붙들었다. 어어, 하는 사이에 그를 향해 돌려 세워진 나는 멍청한 얼굴로 레이몬드 2황자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 왜 여기 있지, 어떻게 꼭 알고 온 것처럼 지금 나타난 걸까. 그런 생각들을 하는 사이 레이몬드 2황자는 재빨리 내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시선만으로도 내가 어딘가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정말로, 나를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아서…… 내 왼쪽 팔을 붙들고 있는 손이, 떨리고 있는 게 느껴져서.
―좋아해요.
―그래서 난 기뻤어요.
―그러니까 제발…… 그런 얼굴 하지 마요.
그가 괴로운 듯한 얼굴로 내게 했던 말들이 떠올라서,
타악!
순간 나도 모르게 그 손을 뿌리쳐 버렸다. 그리고 옆에 있는 이가 누구라는 걸 인식할 틈도 없이 마치 방패막이 삼듯 리하르트 아델의 등 뒤로 숨어버렸다.
내가 뭘 하는 거지. 감히 누구의 손을 뿌리치고, 누구를 방패처럼 내세운 채 숨은 거지. 한 박자 늦게 정신이 들면서 눈앞의 상황에 아연해졌다.
레이몬드 2황자는 물론, 리하르트 아델마저도 놀란 기색으로 말없이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재빨리 반사적으로 붙잡았던 리하르트 아델의 옷깃부터 놓았다. 그리고 주춤거리며 한 걸음 물러나는데 다리가 풀려 잠시 몸이 휘청였다. 그래도 넘어질 정도는 아니라 얼른 자세를 바로 하고 섰으나 그보다 먼저 레이몬드 2황자의 손이 다시 내 팔을 붙들어왔다.
손의 주인이 그라는 걸 알고 움찔하자, 내 손목을 감쌌던 손이 쫓기듯 떨어졌다. 스치듯 본 금색 눈동자가 당황한 듯 얼어붙어 있었다. 아주 조금은, 상처받은 것처럼 흐려져 있는 것도 같았다.
나는 그게…… 내 착각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
어색한 분위기 속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다친 곳은요.”
그로부터 제일 먼저 나온 물음이 그거였다. 나는 불안하게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다 겨우 레이몬드 2황자의 발끝에서 시선을 멈췄다. 아니요, 괜찮아요. 그 말조차 나오질 않아서 간신히 고개만 저었다.
다행히 그것만으로도 대답이 되었던지 내게는 더이상 질문이 날아들지 않았다. 얼굴 위로 따갑게 내리꽂히던 시선도 떨어졌다. 대신 젖은 등과 어깨 위로 묵직한 뭔가가 내려앉아 고개를 드니, 레이몬드 2황자가 입고 있던 겉옷의 상의가 어느새 내 몸을 덮고 있었다.
시선을 마주치지도 않은 채로 레이몬드 2황자가 “입고 있어요.”하고 스치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설명해줄 수 있겠나.”
내가 당황해서 어버버하는 사이, 레이몬드 2황자는 바로 앞에 있는 리하르트 아델이 아니라 주변의 다른 기사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의 시선에 다들 우물쭈물하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당연했다. 기사들 역시 그와 거의 비슷하게 도착한 터라 아직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그게 저, 저희도 아직…….”
레이몬드 2황자의 등장에 기사들은 아까보다 더 당황하고 긴장한 얼굴이었다. 성녀의 부탁이었다고는 해도 위험한 순간에 자신들이 성녀의 곁을 떠나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책임을 느끼는 듯했다. 그로 인해 자신들이 받게 될 처분 또한 두려울 테고.
“영주성 안에 자객이 든 것 같아요.”
가여운 기사들 대신 나라도 나서서 뭐라도 대답을 해야겠다 생각한 순간, 성녀 아리아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제 곁에 서서 안절부절못하는 성기사들을 밀어내고는 레이몬드 2황자를 향해 담담히 말했다.
“나를 죽이려고 한듯한데 헤더 영애가 지니고 있던 아티펙트에서 실드가 발현돼서 살았네요.”
성녀의 대답에 다른 기사들은 사색이 된 반면, 레이몬드 2황자는 그제야 상황이 파악됐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아아, 하고 짧게 내뱉었다. 그러고는 다시 나를 돌아보며 복잡한 얼굴로 긴 숨을 내쉬었다.
막상 성녀가 죽을 뻔했다고 말했을 때는 아무런 감흥이 없는 것처럼 굴더니, 내 손목에 있는 팔찌가 망가진 걸 보고는 안도하는 듯한 얼굴을 하는 게 조금 의아했다. 성녀를 걱정하는 건지 아닌 건지 알 수 없는 느낌이었다.
“자객은 도망친 건가.”
자객의 흔적을 찾듯 주위를 둘러보던 레이몬드 2황자가 다시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몇 명이 쫓고 있나.”
그의 질문에 기사들이 또다시 서로 눈치를 살피며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을 보였다. 레이몬드 2황자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기사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헤더 영애와 둘만 있게 해달라고 억지를 부린 거니까.”
그때 성녀 아리아가 다시 앞으로 나섰다. 그녀가 일부러 기사들 앞을 막아서며 레이몬드 2황자를 마주 보았다.
“잘못이 있다면 제게 있으니 부디 이들을 추궁하지 말아 주세요.”
그녀의 말을 끝으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이몬드 2황자의 시선이 성녀에게 꽤 오랜 시간 머물렀다 떨어졌다. 무표정한 얼굴 위로 묘하게 짜증스럽고 못마땅해하는 감정이 느껴졌다. 나는 그가 성녀를 그런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황실의 연회장에서 마주했을 때도 왠지 그가 그녀를 썩 좋아하진 않는다는 느낌을 받긴 했지만, 그래도 최근엔 두 사람이 마주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보기도 했었지 않나. 게다가 저토록 아름다운 존재, 세상에 유일무이한 고귀한 존재, 같은 여자인 내가 보기에도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은 그녀이지 않나.
그런데도 레이몬드 2황자는 어째서, 저런 눈으로 성녀 아리아를 바라보는 걸까.
그 밤에 나는, 레이몬드 2황자도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어째서 저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좋아해요.
내게 그런 말을 한 걸까.
방심한 사이에 또다시 그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귓가가 아닌 머릿속에서 흘러든 음성이 가슴을 찔렀다.
―헤더 영애를, 클레어를 좋아합니다.
왜 나를, 왜 하필 나를, 저 사람이 어떻게 나를.
그의 고백에 나는 끊임없이 질문을 퍼부었다. 본인에겐 결코 묻지도 못할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혼란스러워했다. 지금은 아침의 그 고백을 떠올리며 혼자 허둥댈 때가 아니라는 걸 아는데도, 바보같이 그랬다.
“그렇군요.”
짧은 한숨과 함께 레이몬드 2황자가 짧게 답했다. 그는 여전히 서늘한 눈동자로 한 번 더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느릿한 움직임으로 한 명 한 명 돌아보는 시선은 분명 경고였다.
“운 좋게 모두가 무사하니 특별히 오늘 일은 따로 책임을 묻진 않겠습니다만, 차후엔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겁니다.”
그 시선의 끝에는 성녀 아리아가 있었다. 그녀 또한 다른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레이몬드 2황자의 싸늘한 태도에 위축된 듯 얼어붙은 모습이었다.
“지금 성녀는 카지스 제국의 비호 아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당신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다치게 해선 안 됩니다. 그런 「조건」이었으니까요.”
그가 일부러 말을 길게 끌며 「조건」이라는 단어에 힘을 싣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성녀도 그걸 눈치챈 듯 표정이 더 경직되는 게 보였다.
“차후에 또다시 이런 일이 발생할 경우, 당신의 명령이 우선인 성기사들은 어쩔 수 없다 쳐도 황실 소속의 기사들은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
“부디 제가 우수한 부하들을 추궁할 상황을 만들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군요.”
“……주의하겠습니다.”
레이몬드 2황자가 옅은 미소와 함께 대답을 기다리는 듯한 기색을 내비치자 성녀가 마지못해 답했다.
레이몬드 2황자의 말이나 태도가 납득이 안 되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이 상황에서 그에게 다시 뭔가를 반박하고 따져 드는 건 조금 꺼려지는 것 같았다. 살짝 분한 듯 찌푸려진 미간이며 새하얀 이에 짓이겨진 입술이 그랬다.
대충 대화가 마무리되는 분위기가 흐르자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성녀에게 아직 더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지금 분위기에선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도 눈치가 보였다. 다시 말을 건다 해도 그녀가 아까처럼 나를 상대해줄지도 의문이었고.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하고 얌전히 물러나기엔 조금 전 그녀가 내게 했던 말들이 마음에 걸렸다.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는 것들뿐이었다.
죽음이라는 단어에 나와 그녀가 엮인 건 그렇다 쳐도, 또다시 유리 황녀까지 언급된 건 모른 척 지나칠 수 없었다.
분명 나만 그녀에게서 멀어지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어째서 또 유리 황녀가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오는 걸까.
내가 왜, 어떤 마음으로, 그 아이들의 곁에서 스스로 멀어졌는데. 내 심장을 끊어내는 듯한 기분으로 스스로 그 아이들의 곁을 떠났는데. 그런데도 왜, 어째서.
억울하고, 분하고, 슬펐다. 평생에 걸쳐 늘 내 안에 머물렀던 감정들이지만 지금처럼 이토록 괴롭게 느껴진 적이 있던가 싶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