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24)
처음 성녀 아리아와 만났을 때 나는 신이 내린 듯한 아름다운 그녀의 외모에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처음으로 사람을 그리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그녀의 미려한 자태와 신비로운 분위기에 반해 눈을 떼지 못했었다.
그녀는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사람이 사랑하게 된 사람이었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곁에 당당하게 서 있던 그녀를 마주한 순간 한때 저 자리를 탐냈던 내가 얼마나 주제 파악도 못 하는 한심한 인간이었는지를 자각하게 된 순간이 죽을 만큼 슬펐다. 내가 그 사람이라도 내가 아니라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을 택하겠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어 가슴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까마득히 멀고 높은 곳에 서 있어서, 나와는 조금도 인연이 없을 것 같았던 그녀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내 손을 잡은 채로 나와 함께 걸어가고 있다.
차가운 비가 얼굴을 때렸다.
정신이 들고 보니 성녀는 영주성의 건물 안이 아니라 밖으로 나를 이끌고 있었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든 건물을 나와 점점 인적이 드문 곳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비가 아까보다 훨씬 더 많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나보다는, 그녀가 걱정이 되었다. 나보다 훨씬 가냘프고 연약해 보이는 그녀의 뒷모습이 자꾸만 젖어가는 게 마음 쓰였다. 저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하지. 시온이 나를 걱정해줬던 것처럼 나도 그녀가 걱정스러웠다.
대체 어디까지 가는 걸까.
둘 다 비에 젖어가는 채로 한참을 걷고 걸어 그녀가 멈춰선 곳은, 공교롭게도 내가 벽화를 그렸던 건물 뒤편이었다. 다행히 시온이 두꺼운 천으로 가려두어 외벽에 그려진 그림이 보이진 않았다. 나는 하필이면 여기로 온 걸까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뭐가 알고 싶은데.”
느리게 돌아선 성녀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 미소만 보면 내게 화를 내는 것도, 빈정거리며 이죽거리는 것 같지도 않아서 조금 혼란스러웠다.
“내가 너보고 죽으라고 했던 거? 그게 기분이 나빴어? 그래서 그렇게 아득바득 따지러 온 거야?”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채 그녀가 쏘아붙이듯 던져오는 말들은 가시처럼 날이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놀라고 당황한 나는 잠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다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런 게 아니-.”
“맞아, 그거 농담 아니야.”
비는 계속 내리고, 내리는 빗속에서 무방비하게 서있는 터라 몸이 으실으실 떨렸다. 하지만 이 떨림이 차가운 비에 젖은 탓인지, 성녀가 자애로운 미소를 띠며 내뱉는 말들 탓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었다.
“네가 죽어야 모든 게 제자리를 찾을 수 있거든.”
성녀가 붙잡고 있던 내 손목을 팽개치듯 놓았다. 난 그제야 그녀가 아직까지 내 손목을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네가 다 망쳐놨으니까. 나도, 리하르트 아델도, 레이몬드 알렉 카지스도, 너도. 전부.”
긴 속눈썹에 맺힌 빗방울이 성가신 듯 그녀가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녀의 입가에 매달려있던 미소가 깨끗이 사라졌다.
“원래대로 돌릴 방법이 도저히 안 보여.”
무표정한 얼굴에 텅 빈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직시해왔다. 억지로 웃으려는 듯 옆으로 벌어지던 입술이 새하얀 이에 짓이겨졌다.
“지금쯤 나한테 미쳐있어야 할 서브 남주도, 남주도 전부 너만 쳐다보고 있잖아. 내가 아니라 너한테.”
까드득. 잇새 사이로 그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섬뜩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대로는 끝이 안 나. 그 애의 이야기가 엉망진창이 됐어. 돌아갈 수가 없어. 왜 그런지 알아?”
알아듣기 힘든 말을 두서없이 늘어놓던 그녀가 느리게 손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네가, 이야기 전개를 위한 도구일 뿐인 조연 따위가 이야기를 다 망쳐놨으니까.”
청은색의 눈동자에 새파란 불꽃이 튀었다. 어찌 이토록 사람을 증오스럽다는 듯이 볼 수 있는 걸까.
그녀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당장이라도 나를 갈기갈기 찢어 죽여버리고 싶다고 말하는 듯한 눈동자였다.
“스스로의 존재 자체가 이 이야기가 엔딩을 맞기 위한 도구일 뿐인 줄도 모르는 불쌍한 클레어 헤더.”
희고 가는 손가락이 내 어깨를 쿡 찔렀다.
“자기가 그 황녀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가여운 클레어 헤더.”
한 번, 두 번. 밀치듯 내 어깨를 찌르는 손길에 나는 힘없이 뒤로 밀려났다.
“너도, 그 빌어먹을 황녀도 둘 다 죽도록 후회하게 될 거야. 이야기가 엉망진창이 되고, 너도, 그 황녀도, 전부 일그러진 운명에 휩쓸려 집어 삼켜질 테니까.”
성녀가 기이한 미소를 띠며 하나 둘 꺼내는 말들을, 나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너만 죽어버리면 끝날 이야기가, 모두를 고통스럽게 만들 거니까.”
남주, 서브 남주는 무엇이고, 엔딩을 맞기 위한 도구는 또 무슨 의미이며, 어째서 내가 유리 황녀에게 이용당하고 있다고 하는 건지. 전부 알 수 없는 이야기뿐이었다.
멍청하게 저를 바라보기만 하는 나를 보며, 성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웃는다기보다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귓가를 쨍하고 울렸다.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귀를 감싸 쥐었을 정도였다.
미친 사람처럼 그렇게 한참을 웃어젖히던 성녀가 겨우 웃음을 멈추고는 고개를 내려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누가 제일 먼저 죽게 될까?”
언제 웃었냐는 듯 무표정한 눈동자가 나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기이잉.
왼쪽 손목에 감긴 금속 팔찌가 묘한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일전에 레이몬드 2황자가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몸에서 떼어놓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며 채워준 팔찌였다.
이게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눈으로 시선을 내려 팔찌를 바라보았다. 무섭게 진동하기 시작한 팔찌가 점점 손목을 옥죄어오는 듯한 감각마저 들었다. 마치 무언가 위험 신호를 보내기라도 하듯이.
“너? 아니면, 나? 그것도 아니면 그 빌어먹을 유리 크리스틴 카지스?”
빈정거림이 가득한 성녀의 목소리에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을 때였다. 금속 팔찌로부터 흘러나온 빛이 내 팔을 타고 올라오는 순간, 시야가 이상하게 변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시간을 느리게 돌리는 것처럼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느려졌다.
그래, 그 외에 다른 표현은 붙일 수가 없었다.
내리는 비가, 나를 바라보는 성녀가, 그리고 언제 이만큼 다가왔는지 모를 낯선 사람이,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검은 복면을 뒤집어 쓴 낯선 상대의 손에는 작은 단검이 들려져 있었고, 그 단검은 정확히 성녀를 노린 채 휘둘러지고 있었다.
분명 방금까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었다. 대체 언제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도 모를 괴한의 모습에 나는 놀란 숨을 삼켰다. 그리고 제대로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성녀에게 팔을 뻗으며 몸을 날렸다.
내가 성녀를 덮치듯 몸을 날린 덕분에 성녀와 나는 쿠당탕 소리와 함께 나란히 바닥을 뒹굴게 되었다. 놀란 성녀가 비명을 내질렀고, 나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괴한의 움직임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러다 둘 다 칼에 맞아 죽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 순간이었다.
카앙!
단단한 벽 같은 것에 금속이 내리쳐지는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동시에 예상치 못한 상황에 무척 당황한 듯한 상대가 혀를 차는 소리도.
“무슨 일이십니까, 아리아님!”
그리고 너무나도 다행히도 황실의 기사들이 달려오는 발소리도 연이어 들려왔다. 괴한의 잇새를 비집고 또다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상대는 잠시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목적을 포기하고 몸을 숨기는 쪽을 택한 것 같았다. 기사들의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질 무렵 괴한의 기척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성녀의 몸을 힘껏 끌어안고서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하마터면 이유도 모른 채 칼에 찔려 죽을 뻔했다는 사실이 너무 무섭고 겁이 나서 눈도 뜨지 못한 채 벌벌 떨기만 했다.
쿵쿵쿵. 내 것인지, 아니면 성녀의 것인지 모를 심장 소리가 온몸을 울렸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내 등을 툭 치는 손길과 타박하듯 들려오는 성녀의 목소리에 겨우 정신이 들었다. 질끈 감고 있던 눈을 조심스럽게 뜨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황금빛의 반투명한 막이었다.
이게 뭐지, 하고 어리둥절하게 눈동자를 굴리고 있으니 성녀가 내 몸을 붙든 채로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그제야 나는 제대로 내 상태를 확인하고 황금빛 막의 정체도 알았다. 팔찌로부터 흘러나온 황금빛이 내 몸을 완전히 감싸고, 성녀를 끌어안은 내 몸 주위에 둥근 막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거 팔찌에서 나온 빛인가? 혹시 이 반투명한 막 같은 게 우릴 보호해준 건가?
레이몬드 2황자에게서 받았던 팔찌를 신기하다는 듯 내려다보는데, 훅 하고 한순간 황금빛 막이 사라졌다. 이것도 시간제한 같은 게 있는 건가 보다 생각하는 찰나 팔찌의 중간에 박혀있던 루비가 원래의 색을 잃고 파스스 부서졌다. 마치 이제는 제 역할을 다했다는 것처럼.
“아리아님!”
성녀의 비명을 듣고 달려온 기사들이 금세 우리 주변을 감싸듯 몰려들었다.
“괜찮으십니까. 비명이 들려 어쩔 수 없이 명을 어겼습니다.”
“일어나질 못하겠는데…… 좀 도와줘.”
허둥지둥 다가오는 기사들을 무표정하게 응시하던 성녀가 제일 가까이 선 기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표정이나 말투는 담담했지만, 기사를 향해 내미는 성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기사가 송구하다는 듯 내미는 손을 잡고 일어난 그녀가 아직도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나를 가리켰다.
“아마 저 영애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도와주고.”
그녀의 말에 성녀만 바라보고 있던 기사들이 뒤늦게 나를 발견한 듯 우물쭈물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혼자 일어날 수 있다고 대답하려다 얌전히 도움의 손길을 기다렸다.
여러모로 너무 놀란 탓인지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괜한 고집을 부리다 꼴사납게 나동그라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보단 호의를 받아들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괜찮아?”
하지만 그 손길을 내미는 상대가 리하르트 아델이라는 건 내 예상에 없었다. 다른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성녀의 비명을 듣고 달려온 듯한 남자는 제가 사랑하는 연인이 아니라 내 앞에 서 있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저기에 있는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