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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23) (86/152)

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23)

“뭐가 그렇게 당당해서 이러는 건가요? 혹시 성녀에게 차이기라도 했어요?”

이런 식으로 예민하고 과격하게 반응하는 쪽이 지는 거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이러는데도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무표정하게 나를 내려다보는 눈동자를 깨부수고 싶었다.

“아니면 설마 이제 와서 당신이 질려서 내다 버린 게 아쉬워지기라도 했나요?”

나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겨우 비웃음 비슷한 걸 만들어냈다.

이딴 식으로 말하면 더러워서라도 이제 내 주위엔 다가오지도 않겠지 싶어서였다. 저 남자가 그 정도로 자존심을 굽히고 다가올 만큼 내게 가치가 있지도 않을 테고, 성녀까지 언급하며 빈정거렸으니 기분이 단단히 상했을 터였다.

속이 시원하기도 했지만, 일부러 누군가를 상처 주고 화를 내는 일이 익숙지 않아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다. 그래도 이걸로 이 남자와 진짜 끝이라는 생각에 후련한 기분이 드는 게 더 컸다.

그런데.

“맞아, 아쉬워졌어.”

이 남자는,

“네가 아쉬워.”

정말 내게 왜 이러는 걸까.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이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내가 지금까지 이 사람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도 전부 잊어버렸다.

“이렇게 말하면 돌아와 줄래?”

죽을 만큼 바랐던 말이었다. 이 사람에게 버려지고 싶지 않아서, 조금이라도 좋으니 이 사람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어서.

늘 그렇게 바라고 원했던 말이었다. 이 사람에게 버림받고 난 뒤에도, 잠들지 못하는 매일 밤 기대했었다. 내일은 다시 나를 찾아주지 않을까, 내일은 내가 아쉬워져서 후회하지 않을까. 바보 같은 기대를 하며 기다렸었다.

그때의 내가 죽을 만큼 바랐던 말을, 지금의 내가 듣는 게 끔찍하다고 생각했다.

화가 나는데 슬펐고, 슬픈데 화가 났다.

눈가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이 사람 앞에서만큼은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화가 나서 손으로 이마를 짚는 척 눈가를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당신, 미쳤어요?”

“조금 그런 것도 같아.”

예전의 나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무례한 말에도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그 한없이 가볍고 무심한 태도가 나를 한 번 더 상처입혔다.

“그리고 너도.”

고개를 숙인 채 침묵하는 내 앞으로 리하르트 아델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무심코 한 걸음 물러나려던 나는 주먹을 꾹 틀어쥐며 제자리에 발을 붙들어놓았다. 하지만 겨우 자존심을 세우려 한 그 행동도 곧바로 후회했다.

“어차피 아직 나 좋아하잖아.”

전부 안다는 듯이, 내 마음 따윈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꾹꾹 내리누르던 분노가 순간 펑하고 가슴 속에서 터지는 것 같았다. 감정을 다스릴 새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반사적으로 치켜든 손은 허공에서 금세 붙들렸다. 목적을 이루지도 못하고 붙잡힌 손 때문에 화가 더 치밀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눈가에서 눈물 하나가 툭 흘러내렸다. 나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짓씹듯 깨물고는 리하르트 아델을 노려보았다.

“있잖아, 너.”

짙은 남색의 눈동자가 드디어 구겨졌다.

감히 하급 귀족 영애 따위가 제 뺨을 때리려 했다는 사실이 불쾌한 거겠지. 저 뻔뻔한 낯짝을 때려주진 못했어도 기분을 더럽게 만드는 데는 성공한 것 같아 살짝 통쾌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예뻤었나?”

하지만 또다시 생각지도 못한 남자의 반응에 한순간 맥이 탁 풀렸다.

이 남자가 진짜 그동안 내가 알던 남자가 맞는 건가 싶었다.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걸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상황에서 그딴 소리를 하는 걸까.

이젠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너무 어이가 없으면 화를 낼 기운도 사라진다는 걸 처음 알았다.

대화할 가치도 없다는 생각에 나는 리하르트 아델에게 붙잡힌 손을 당겼다. 이 남자와 실랑이를 벌이고 화를 내는 것 자체가 이젠 바보 같이 느껴져 무시하고 그냥 가려는 찰나였다. 무사히 손이 풀려나는가 싶더니 갑자기 뻗어온 손이 다시 내 손목을 당겼다.

몸이 휘청거리며 앞으로 딸려갔고, 뭐지? 하는 순간 남자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설마 이 상황에서 키스라도 당하는 건가 싶어 나는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리하르트 아델도 멈칫했다. 다행히 더 이상 얼굴이 다가오지는 않고 그 순간 후-하고 짧은 숨결이 내 귓가에 닿았다. 깜짝 놀란 나는 그대로 온 힘을 다해 그에게 붙들린 팔을 당겼고, 다행히 쉽게 풀려났다.

갑자기 손이 풀려난 탓에 다시 몸이 휘청거리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겨우 똑바로 선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리하르트 아델을 돌아보았다.

그는 어딘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더니 한쪽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그럼 잘 생각해봐.”

나는 그런 그를 멍청히 올려다보다 느릿느릿 손을 들어 올렸다. 소매를 들어 남자의 숨결이 닿았던 귓가와 뺨을 슥 문질렀다.

부드러운 천이 피부에 쓸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한 번, 두 번, 세 번, 나는 마치 더러운 게 묻기라도 한 것처럼 계속 얼굴을 문질러 닦았다. 표정을 굳힌 채 얼굴을 거칠게 닦아내는 내 행동을 물끄러미 지켜보기만 하던 리하르트 아델이 픽, 웃었다.

“그러다 괜히 예쁜 얼굴 망가뜨리지 말고.”

그는 덩달아 불쾌해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고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으니 빨리 숙소로 돌아가.”

내게 같지도 않은 충고까지 하고는, 어울리지 않게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 보이며 돌아섰다.

그가 자리를 뜨자마자 반대편에서 시온이 이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는 걸로 봐선 아마 시온과 마주치고 싶지 않아 먼저 피한 것 같았다.

“너 얼굴이 왜 이래. 누구한테 맞았어?”

뒤에 사람들을 주렁주렁 단 시온이 다가와 놀란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내가 계속 힘주어 문질러댔던 뺨을 보고는 심각한 얼굴을 했다.

그녀의 표정을 봐선 천에 쓸린 뺨의 상태가 꽤나 좋지 않은 것 같았다. 그때까지도 난 뺨을 벅벅 문질러 닦고 있었다. 기분 나쁜 감각이 계속 남아있는 것 같아서.

“아니, 잠깐 혼자 뒀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누가 때렸어? 어? 으악, 차거! 비! 비 온다!”

내 얼굴을 보곤 부산스럽게 굴던 시온이 화들짝 놀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목덜미에 빗방울이 떨어졌는지 손으로 슥슥 매만지고는 내 등을 떠밀며 바삐 걸음을 옮겼다.

“너 또 감기 걸릴라, 빨리 가자!”

또다시 그녀의 손에 이끌려 머물고 있던 숙소 건물로 돌아온 우리는 머리카락이며 옷에 묻은 빗방울을 털어내며 안으로 들어섰다.

“아, 날씨 좋더니 왜 갑자기 비는 쏟아지고 난리야.”

시온이 하루 일정을 망친 것이 못마땅한 듯 투덜거렸다. 나는 하녀들이 내미는 부드러운 수건을 받아 얼굴부터 닦았다.

수건이 왼쪽 뺨에 닿았을 때는 살짝 따끔거리는 통증이 느껴지는 게 피부가 쓸려 상처가 생긴 것 같았다. 불쾌한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나는 벌겋게 달아오른 뺨이 괜히 또 시온의 시야에 들어갈까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로 있었다.

“세상에, 성녀님!”

“성녀님, 괜찮으십니까? 빨리 수건을!”

빨리 방으로 가서 따뜻한 물에 씻고 싶은 마음에 걸음을 빨리 할 때였다. 갑자기 입구 쪽이 소란스러워 시온도 나도 멈춰 서서 그쪽을 돌아보았다.

“어? 쟤도 비에 쫄딱 젖었네. 어이구, 저기 난리 났다.”

시온이 쟤라고 지칭한 건 성녀 아리아였다. 그녀는 무슨 일인지 늘 함께 있던 성기사들도 없이 혼자 비에 흠뻑 젖은 모습이었다. 그런 성녀 아리아를 발견한 황성의 기사들이나 영주성의 하녀들이 경악하여 허둥지둥했다.

다급히 커다란 수건을 가져와 그녀를 감싸주는 둥 안절부절못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천천히 시선을 들어올린 성녀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설마 아니겠지 하고 생각한 찰나, 몸을 감싼 수건을 바닥에 떨어뜨린 성녀가 정확히 내가 서 있는 곳을 향해 걸어오는 게 보였다.

“뭐, 뭐야.”

옆에 서 있던 시온도 성녀가 다가오는 걸 보곤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다. 어딘가 평소와는 분위기가 다른 성녀의 모습에 나 역시도 긴장한 얼굴로 그녀가 다가오는 걸 지켜보았다.

비에 젖은 청은색의 머리칼이 새하얀 피부에 달라붙어 신비롭고 청초한 분위기가 더해진 아름다운 얼굴에 머릿속이 멍해졌다. 냉기를 가득 머금은 눈동자조차도 너무 예뻐서 사람이 아니라 잘 빚어진 도자기 인형을 보는 것 같았다.

“할 말, 있다고 했죠.”

그래서 겨우 한 걸음 정도를 남기고서 성녀가 내 앞에서 멈춰 서서 말을 걸 때까지도 멍하니 넋을 놓고 있었다. 그녀가 뭐라고 말을 건 듯한데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나는 당황해 눈을 깜빡였다.

“……네?”

멍청하게 되묻는 나를 보며 그녀가 짜증스러운 얼굴을 했다.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기고는 다시 나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할 말 있다며. 그래서 며칠 동안 지긋지긋하게 쫓아다닌 거잖아.”

“…….”

“해요, 지금. 할 말.”

말투도, 목소리 자체도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내게 죽어버리는 게 어떻겠냐고 할 때조차도 미소 짓고 있던 그녀는 지금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싸늘한 눈동자 속에 비치는 건, 역겹고 징그러운 벌레를 치워버리지 못해 안달이 난 듯한 시선뿐.

무표정한 얼굴, 얼음장 같은 시선 앞에서 나는 잠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그러자 그녀가 말도 없이 내 팔을 힘껏 틀어쥐곤 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 잠깐. 뭐……!”

나보다 더 놀란 듯한 시온이 빽 소리를 지르며 뒤를 따라오려 했다. 나는 그녀에게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성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아무도 따라오지 마. 절대로.”

그녀는 다급히 뒤따르려는 기사들에게 서늘한 시선을 던지며 명령했다. 시온뿐만 아니라 성녀의 주변에 몰려들었던 사람들이 전부 놀란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성녀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마치 이제는 뭐가 어떻게 돼도 전부 상관없다는 듯이.

어제까지만 해도 나를 피하기 바빴던 그녀가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고, 반대로 조금 무섭기도 했다. 나는 내 손을 잡은 채 앞서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복잡한 심경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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