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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22) (85/152)

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22)

* * *

바다를 그리려고 했다.

구름 하나 없이 맑고 푸른 하늘 아래 에메랄드빛의 바다, 쏟아지는 햇살에 반짝거리는 모래, 그 위를 날아다니는 새들과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미는 크고 작은 물고기들.

전부 반짝반짝 빛나고 예쁜 것들로만 가득 채워 그리려고 했다. 마물들이 득실거리는 지금의 저 새까만 바다가, 언젠가 본래의 색과 평화를 되찾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오늘도 시온이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도료와 붓을 보자마자 설레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건물 외벽에 스케치부터 시작했었다. 무얼 그리면 좋을까 고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다를 그리자고 정했고, 먼지로 뒤덮인 벽을 대충 닦아내곤 거침없이 스케치를 해나갔다.

나는 꽤 단순해서, 그림을 그릴 때만큼은 복잡한 상념이나 불쾌한 잡념들이 사라져 한 가지에만 몰두할 수 있는 점이 좋았다. 그것조차 되지 않는 때도 있었지만 다행히 오늘은 온전히 그림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좋아해요.

하지만 그 시간마저도 더는 허용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사죄를 해야 했을 뿐인데. 어제 내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자 했을 뿐인데.

어째서 내게, 당신이.

―헤더 영애를, 클레어를 좋아합니다.

그런 말을 하는 걸까.

멍하니 꼼짝도 않고 서서 그 사람이 사라진 자리만 바라보았다. 내게 좋아한다고, 클레어 헤더를 좋아한다고, 말하고는…… 도리어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간 사람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수준의 얘기가 아니었다.

처음엔 내가 아직도 술에 취해 꿈나라에서 헤매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꿈에서 깨어나지 않자, 내가 선 채로 헛된 망상을 했던 게 아닐까 생각했다. 레이몬드 2황자는 처음부터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고, 나 혼자 말도 안 되는 망상을 한 것이라고.

시온이 다가와 괜찮냐고 말을 걸었을 때는, 그래. 혹시 이 사람이 보고 있어서 그랬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남이 보는 앞이니까. 내가 상황 파악도 못 한 채 너무 바보같이 벌벌 떨고 있었으니까. 우리가 진짜 연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들키면 안 되니까. 그래서 레이몬드 2황자가 스스로 체면을 구기고 그런 말을 한 거라고.

그러니 그가 했던 말을 진지하게 듣거나 깊이 생각하진 않아도 된다고.

적당히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니 겨우 정신이 들었다. 고개를 들자 계속 내 옆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한 시온이 시선을 맞춰왔다.

“오, 이제 내가 좀 눈에 들어와?”

“…….”

“너 그 황자 가고 나서 지금 거의 30분 넘게 이러고 있었어. 멍하니 넋이 나가선.”

“……죄송해요. 잠깐 너무 놀라서.”

“잠깐이 아닌데.”

“정말 죄송해요. 계속 이어서 그릴게요.”

나는 허둥대며 어딘가에 내려놓았을 붓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시온의 손이 다가와 그런 내 손목을 가볍게 쥐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돌아가는 게 낫겠는데. 급한 것도 아니니까 천천히 하자.”

그녀가 덤덤하게 나를 설득하듯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잡혔던 손목을 내려다보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얘가 영 정신을 못 차리네.”

나는 그녀의 말에 그냥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온은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그대로 내 손을 잡은 채 걷기 시작했다.

멀찍이 떨어져서 대기하고 있던 영주성의 하인들이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주변을 정리하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평소 같으면 내가 먼저 나서서 정리하겠다고 했을 텐데, 지금은 그럴 정신도 없었다.

“그런데 너희 약혼한 사이 아니었어? 내가 듣기론 그랬는데.”

현재 머무는 숙소 건물로 걸음을 옮기는 도중 시온이 지나가는 말투로 물어왔다. 내 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정말 대수롭지 않은 듯 묻고는 있지만, 슬쩍 내 눈치를 살피는 모양새나 한껏 낮아진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둘 다 아까 그 반응은…… 서로 좋아한다는 사실도 전혀 몰랐던 것 같아서.”

순간 앞에 있던 작은 돌부리를 보지 못하고 발이 걸려 크게 휘청였다.

“어어, 괜찮아?”

다행히 넘어지진 않았지만 손을 잡고 있던 시온이 더 놀라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몸을 바로 세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 상태로 움직임을 멈췄다.

서로 좋아한다는 사실도 전혀 몰랐다……라.

그건 나도, 그 사람도 서로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전제하에 성립되는 말이었다. 서로를 좋아하고 있었음에도 그 사실을 몰랐었다는 뜻이니까. 오늘 레이몬드 2황자의 고백에 이제 겨우 서로의 마음을 깨닫게 된 것처럼.

하지만 시온의 말은 처음부터 틀렸다. 왜냐하면 나도, 그 사람도 서로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레이몬드 2황자가 나 같은 걸 좋아할 이유도 없을뿐더러, 나도 감히 그를 그런 대상으로 본 적이 없으니까. 아무리 필요에 의해서라고 해도 나 같은 게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송구스러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니까.

애초에 레이몬드 2황자의 좋아한다는 고백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놀라거나 당혹스러워하는 게 더 우스웠다.

나는 그저…… 어제 일을 무사히 용서받아서 다행이라고, 그렇게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절대 실수로라도 술을 입에 대지 않도록 조심하자고 다짐했다.

“괜찮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멈춰 있는 내게 시온이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마주하자 목소리만큼이나 나를 향한 염려가 담긴 눈동자가 보였다.

아마 내게 좋아한다고 말할 때의 레이몬드 2황자도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난 기뻤어요.

좋아한다고 말하는 눈동자가, 목소리가, 오롯이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제발…… 그런 얼굴 하지 마요.

벌벌 떨며 죄송하다고 말하는 나를 보며 당황해하고, 미안해하던 모습도 떠올랐다. 그리고.

―미안해요.

상처 입은 듯 흐려진 채 내 시선을 피하던 눈동자도.

아마 처음이었을 것이다. 레이몬드 2황자가 먼저 내 눈을 피한 건. 그래서 그때 상황도 잊고 잠시 놀랐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왠지 아주 조금, 심장 부근에서 따끔하는 통증이 느껴진 것도 같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내 시선을 피해 아래로 눈을 내리깐 채 애써 미소 짓는 있던 레이몬드 2황자의 얼굴이 뇌리에 강하게 박혀 사라지질 않았다.

왜 그런 표정을 지었지. 왜 내게 미안하다고 한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신경이 쓰였다.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왠지 그 순간 내가 그에게 커다란 상처를 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난 그저 어제 일을 사과했을 뿐이건만. 대체 어디가 어떻게 해서 내가 레이몬드 2황자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걸까. 내가 생각하고도 너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 고개가 갸웃했다.

어제 일로 불쾌해하거나 화를 낸다면 모를까. 왜 한순간 그가 상처 입고 슬퍼하는 것처럼 보였을까.

머리로는 그냥 내가 착각한 게 아닐까 하는 쪽으로 점점 생각이 기우는데, 그런데도 가슴 한편에서는 계속 레이몬드 2황자의 어색한 미소가 신경이 쓰였다.

“자, 일단 돌아가자. 걸을 수 있지?”

나는 나를 한참 어린아이 취급하는 시온의 손을 잡고 묵묵히 걸었다.

“왠지 비 올 것 같은데? 벽화 괜찮으려나?”

그녀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나는 그녀를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맑았던 하늘이 어느새 잿빛 구름으로 뒤덮여있었다.

다시 고개를 내리고 바다 쪽을 돌아보자, 그렇지 않아도 온통 새까맣고 암울한 풍경이 더 어둡고 절망적으로 보였다.

“혹시 모르니까 뭐라도 좀 덮어둘까.”

시온은 잠시 멈춰 서서 고민하더니 내 손목을 놓아주었다.

“잠깐 갔다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래? 누가 사탕 준다고 따라가면 안 된다?”

그녀는 정말 내가 어린아이처럼 보이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어린아이에게 하듯 당부한 뒤 그녀가 허겁지겁 내가 그리던 벽화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뒤를 따르던 호위들과 하인들도 마찬가지로 그녀를 따라 달려가 버렸다.

‘진짜 비가 오네.’

혼자 덜렁 남겨져 하늘을 올려다보던 나는 뺨에 툭 떨어지는 빗방울에 깜짝 놀랐다. 손을 들어 빗방울이 떨어진 뺨을 슥 닦으며 고개를 내렸다.

비를 피할 곳을 찾으며 주위를 살피는데, 시온이 사라졌던 방향에서 문득 인기척이 느껴졌다. 당연히 그녀가 돌아온 것이라 생각하고 무심코 돌아보던 나는 얼굴을 굳혔다.

다른 기사들과 함께 영주성 안을 돌아보고 있었던 건지, 리하르트 아델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당연히 저쪽에서도 나를 발견한 듯 멈칫하는 기색이었다. 그가 다른 기사들에게 무어라 지시를 내리는 듯하더니 혼자서 내 쪽으로 성큼 걸어왔다.

나는 시온을 두고 혼자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었으나, 내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어째서 나만 도망치듯 저 사람을 피해야 하나 싶어 울컥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래서 그냥 무표정하게 길옆으로 비켜서기만 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갈 길 가시죠, 하는 태도였다.

“클레어.”

저 사람이 담담하게 내뱉는 내 이름이 듣기 싫었다. 원래는 내 이름도 모르는 것처럼 잘 불러주지도 않았으면서, 이제 와서.

그래, 이제 와서 내게 뭘 바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대답 정도는 하지 그래.”

내가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있기만 하자 그가 살짝 삐죽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나는 그제야 그쪽의 존재를 눈치챘다는 듯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다. 이만큼 거리를 두고 선을 그은 뒤 절대 넘어오지 말라고 말하는 것처럼.

눈치가 없는 사람도 아니니 내 태도에서 의도를 충분히 읽었을 것이다.

“속은 좀 괜찮아?”

―속은 좀 괜찮아요?

순간 이 남자의 목소리 위로 레이몬드 2황자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고작 그 한마디에 마른 장작에 순식간에 불이 붙어 화르륵 타오르는 것처럼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건가요.”

왜 그런지 이유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악에 받친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나 같은 건 이제 쓸모없다는 듯이 버리고 간 건 당신 아닌가요?”

딱히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고 무표정하게 나를 내려다보는 남자에게, 치가 떨린다는 듯 파르르 떨며 소리를 질렀다.

“진정한 사랑을 찾은 것 아니었어요? 그녀를 위해 변하기로 한 것 아니었나요? 그래서 나도 쓰레기 버리듯 정리하고 깨끗한 몸인 척 그녀에게 간 거였잖아요. 그럼 서로 알아도 모른 척 그렇게 지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걸 알고서 이때다 싶어 나는 차곡차곡 쌓아온 감정들을 쏘아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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