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21)
혼자 막대한 임무를 짊어진 신의 사자라도 된 양 무대 위의 이야기를 멋대로 바꿔대는 것에 심취해 있었다. 혹은 자신이 정말 유리 크리스틴 카지스라는 인물이라 착각하며 말하고 행동했다. 그러는 동안에는 원래 세계에 대한 그리움도, 자신을 이렇게 만든 누군가에 대한 원망도 잊을 수 있었으니까.
그 중심에 클레어 헤더가 있었다. 클레어 헤더의 해피엔딩을 위하여. 처음엔 그저 단순하게, 그녀에 대한 연민과 동정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어쩌면 하루 아침에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 태어난 순간부터 나고 자란 세계를 강제로 떠나 낯선 곳에 떨어져 진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로 살아야 하는 지금의 자신과 그녀를 겹쳐봤는지도 모른다.
가여운 사람. 불쌍한 사람. 이 세계에 희생당한 사람.
유리 자기 자신처럼.
유리는 그런 그녀를 구원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녀를 구원해줌으로 인해 자기 자신도 구원받길 바랐다. 허락도 없이 자신의 인생을 빼앗아 간 세계에 대한 복수와도 같았다. 이 세계를 전부 망쳐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그녀도, 유리 자신도 구원받고 싶었다.
그런데 실제로 클레어 헤더를 만나고, 대화를 나누고, 손을 붙들고, 끌어안고, 이름을 부르고,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고, 함께 웃고 울고 하는 사이 어느새 진심으로 그녀를 좋아하게 되어버렸다.
바보 같을 정도로 착하고, 한평생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아본 적도 없으면서 그렇게나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단순히 흥미 본위도, 자기 만족을 위해서도, 이 세계를 향한 복수를 위해서도 아닌,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저 클레어 헤더가 행복해지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옆에 유리 자신이 있고 싶었다. 환하게 웃는 그녀의 곁에서 유리 자신도 행복해지고 싶었다.
지금도 그녀가 너무 보고 싶었다. 너무 너무 보고 싶었다. 지금 당장 언니 하고 부르면 유리 님 하고 제 이름을 불러주는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그런데 제 곁에 두는 게 좋아하는 이의 죽음을 앞당길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유리의 손과 발을 묶었다.
알렌을 감싼 채 피웅덩이 속에 웅크리고 있던 클레어 헤더의 모습이, 우는 저를 다독여주던 그녀의 다정한 손길이, 유리님하고 제 이름을 불러주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이따금 알렌과 제게만 보여주던 예쁜 미소가, 너무 소중하고 좋아서 잃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언젠가는 반드시 그걸 전부 잃는 순간이 와야 한다는 사실이 죽을 만큼 슬펐다.
보고 싶지만 무서웠고, 무섭지만 보고 싶었다. 곁에 있고 싶지만, 곁에 있고 싶지 않았다.
유리는 클레어 헤더가 말도 없이 사라진 그날부터 줄곧 후회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눴던 대화가, 눈조차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건넸던 잘자, 라는 인사 따위였던 것이 죽도록 후회되었다.
어째서 나를 떠난 거냐고 원망하고 싶으면서도, 다시 그녀의 곁에 설 용기가 쉬이 나지 않았다. 나 때문에 사랑하는 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생각보다 더 크고 무거워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유리는 팔을 뻗어 알렌을 와락 끌어안았다. 제 등을 토닥여주던 손처럼 자그마한 몸이 품 안에 쏘옥 안겨 왔다. 유리는 그런 알렌을 끌어안은 채로 애써 감춰두었던 마음을 꺼내어 보였다.
“언니가…… 보고 싶어.”
울음에 섞여 흘러나온 목소리가 서글프게 방 안을 울렸다.
“너무 너무 보고 싶어.”
―뭐야, 그렇게 보고 싶은 거면 말을 하지.
알렌을 끌어안은 유리의 등이 움찔거렸다. 유리는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반짝 뜨고서 뒤를 돌아보았다. 짧은 팔로 제 누님을 토닥여주던 알렌 역시 깜짝 놀라 고개를 틀었다.
―네가 어째 얌전히 잘 기다린다 했다.
검은 마력구로부터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언제 들이닥친 건지, 시녀장이 송구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들고 온 마력구를 앞으로 내밀었다. 우느라 정신이 없어 누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도 몰랐던 모양이었다.
―울 정도로 보고 싶은 거면 말을 했어야지. 너답지 않게 뭘 참고 그래?
얼굴은 보이지 않고 음성만 전달되는 마력구인지라, 짧은 한숨과 함께 둘째 오라버니인 레이몬드의 목소리만 들려왔다. 유리와 알렌은 순간 상황 파악이 늦어 놀란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유리는 고개 숙인 시녀장의 얼굴을 한 번, 둘째 오라버니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마력구를 한 번, 그리고 똑같이 눈물범벅이 된 남동생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았다.
―늦어서 미안하다.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둘째 오라버니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들려오는 목소리가 왠지, 아주 조금은 기운이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결계가 거의 안정권에 접어들어서 며칠 정도는 자리를 비워도 괜찮을 것 같아. 곧 헤더 영애와 함께 수도로 돌아갈 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리고 있어.
늘 그렇듯 무뚝뚝한 듯해도 저와 알렌을 신경 써주는 다정한 목소리였다. 멀리서도 울고 있는 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래주는 것만 같은 다정함이 마력구를 타고 느껴졌다.
“꺄아아아!”
아무 말도 못 하고 굳어있는 유리를 대신해, 알렌이 좋아 죽겠다는 얼굴로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꺄꺄 비명까지 질러대며 방방 뛰던 알렌이 대뜸 마력구 앞으로 달려가 외쳤다.
“두째 형님, 형님. 형슈님하테 알렌이 너무너무 보고 시포한다구 말해줘써요?”
귀여운 막냇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마력구 너머에서 레이몬드가 짧게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아니, 안 했는데.
“왜 안 해써요. 빤니 해쥬세요!”
―알았어, 알았어. 알렌도 누나 말 잘 듣고 착하게 있어야 한다.
“녜에!”
―그리고 유리.
알렌은 마력구를 끌어안기라도 할 기세로 기뻐하다 레이몬드의 낮아진 음성에 한 걸음 물러났다. 유리는 여전히 멍하니 넋이 나간 눈으로 마력구를 쳐다보기만 하고 있었다.
―곧 돌아갈게.
그토록 바라던 말이 들려왔음에도 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잠시 대답을 기다리던 레이몬드 쪽에서 또다시 옅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유리는 제 오라버니의 목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동안 결계 때문에 많이 힘들었던 걸까. 무척 지치고, 피곤함이 밴 음성이었다.
―울지 말고.
그래도 제게 말을 걸 때는 다시 다정함만이 가득 담긴 음성이었다. 유리는 오라버니가 제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도 잠시 잊고,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끝으로 마력구의 연결이 끊어지면서 검푸른 빛이 훅 사라졌다.
“누님, 형슈님이 온대요! 두째 형님이 데려와 준대요!”
힘없이 침대에 앉아있는 유리에게 알렌이 다가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누님……?”
어째서 기뻐하지 않냐는 듯 의아함이 섞인 남동생의 시선에도 유리는 침묵을 지켰다. 기뻐하지도, 울지도 못하는 상태로 무릎 위에 올려둔 제 손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황녀 전하. 황자 전하.”
초조한 표정으로 유리의 눈치만 살피던 시녀장이 다시 허리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
“아무리 불러도 계속 대답이 없으시고, 너무 걱정되어 멋대로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두 분의 의사도 없이 2황자 전하께 연락을 드린 점도 죄송합니다. 처분을 내리신다면 전부 달게 받겠습니다.”
유리는 어마마마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시녀장이 제게 허리를 깊이 숙이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내내 참고 있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이 든 시녀장이 황실에 얼마나 충성심이 깊은지, 그리고 저와 알렌을 아끼고 생각하는지 알고 있는 유리로서는 그녀의 그런 모습이 달갑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이래저래 신세 지는 일이 많기도 했고.
“아니야, 우릴 걱정해서 그런 거 알아.”
유리는 얼른 입을 열어 대답하고는 그녀를 향해 희미하게 웃어주었다. 화가 난 것도 아니고, 그녀를 벌할 생각도 없으니 안심하라는 의미였다.
“괜찮으니까 그만 가봐도 돼.”
“너그러이 이해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계속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던 시녀장은 그제야 안도한 듯 표정을 풀었다. 그녀는 몇 번이고 감사하다는 말을 하며 망설이다 겨우 몸을 돌렸다.
방문을 닫고 나가기 직전까지도 유리에게 필요한 것은 없는지, 식사는 언제쯤 가져오는 게 좋을지, 혹시 조금이라도 불편한 곳이 있으면 말해 달라며 부산스럽게 굴었다. 유리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며 시녀장에게 손을 내저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유리가 걱정스러운 듯 자꾸만 뒤를 돌아보던 시녀장의 손에서 마력구가 굴러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마력구는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박살이 나고 파편이 사방에 튀었다. 마력구를 떨어뜨린 당사자인 시녀장은 얼굴이며 몸 여기저기에 파편이 튀어 순식간에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유리님, 알렌님, 괜찮으십니까!”
평소엔 늘 황녀 전하, 황자 전하 하고 깍듯하게 부르던 시녀장이 창백한 얼굴로 유리와 알렌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제 상처는 느껴지지도 않는 듯 유리와 알렌에게 파편이 튀지 않았는지부터 확인했다.
시녀장이 서 있는 곳과 유리와 알렌이 있는 침대까지는 거리가 꽤 멀었음에도 그녀는 혹시라도 두 사람이 다쳤을까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다치신 곳은……!”
“괜찮아. 조금 놀랐을 뿐이야.”
“많이 놀라셨지요. 저, 정말 죄송합니다. 절대 침대 위에서 내려오지 마십시오. 당장 치우라고 하겠습니다.”
시녀장의 명령에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이 애써 놀란 표정을 감춘 채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녀들이 청소 도구들을 가져와 방문 앞에 흩어진 마력구의 파편을 치우는 모습을, 유리는 조용히 지켜보았다.
귀족가의 영애로 태어나 오랫동안 황성에서 황족들을 모셔온 시녀장은 자기 일에 대한 프라이드가 높고, 모든 일처리에 능숙하며, 늘 냉철하고 차분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저렇게까지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이라 유리도 상당히 놀란 상태였다.
“누님…….”
유리는 마력구가 깨지는 소리에 놀라 제 품에 꼬옥 안겨온 알렌을 마주 안아주었다. 자기보다 한참은 작고 어린 동생을 끌어안은 채 가슴 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을 억눌렀다.
실수라고는 하지 않는 시녀장이 허둥대다 마력구를 떨어뜨린 건 그저 해프닝에 불과할 테니까.
박살 난 마력구 따윈 불길한 징조 같은 게 아니니까.
아직은 아니니까. 아직은 언니가, 클레어 헤더가 이 이야기 속에서 사라질 때가 아니니까.
‘내가 와달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
유리는 알렌을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작고 따스한 아이의 몸이 마치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둘째 오빠가…… 서브 남주가 데려다주겠다고 한 거잖아.’
발끝에서부터 타고 올라오기 시작한 불안과 공포에 유리의 몸이 떨렸다.
‘나는 언니를 데려와 달라는 말은 한마디도 안 했어. 그러니까.’
비겁하게도 그 책임을 다른 이에게 떠넘기며,
‘내가 멋대로 얘기를 바꾸려고 한 게 아니니까.’
무사히 사랑하는 이가 제 곁으로 돌아와 줄 거라고…….
어떻게든 믿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