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20)
“그, 그치만…… 제가 감히 전하께 어찌 그런 짓을…….”
“클레어.”
“죄송해요, 정말 죄-.”
“좋아해요.”
막을 새도 없이 말이 먼저 나갔다.
자신조차 자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마음을, 이렇게 전할 생각은 없었다. 둘만 남겨진 공간도 아니고, 아름다운 꽃과 그녀에게 어울리는 반지도 하나 없이 이런 식으로 멋없이 고백할 마음도 결코 없었다.
그런데 말했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커져 버린 마음을, 어쩌면 처음 만났던 그 날부터 줄곧 품어왔을 마음을, 충동적으로 전하고 말았다.
움찔 몸을 굳힌 클레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여전히 겁에 질린 눈동자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레이몬드는 클레어의 눈동자와 마주하자마자 충동적으로 제 마음을 고백한 것을 곧바로 후회했다. 좋아한다고 말했음에도 그녀의 눈동자엔 설렘이나 기쁨 따위의 감정은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었으니까. 의문과 불안, 두려움만이 가득한 눈동자였다.
“헤더 영애를, 클레어를 좋아합니다.”
다시 한번 확실하게 제 마음을 전하는 레이몬드의 눈동자가 슬프게 일그러졌다.
애초에 뺨에 입 좀 맞췄다고 황족모독죄로 자신을 벌할지도 모른다고 여기는 상대에게 갑자기 고백을 받아봤자 기쁠 리가 있겠는가.
“그래서 난 기뻤어요.”
그걸 알면서도 마음을 전한 건,
“그러니까 제발…… 그런 얼굴 하지 마요.”
더는 그녀가 어제의 일로 자신을 두려워하거나 겁에 질려 떠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레이몬드는 입술을 비집고 나오려는 말들을 삼키고 또 삼켰다. 이렇게까지 스스로가 한심하고 견딜 수 없이 부끄러웠던 적이 있던가.
이성으로 의식해주진 않더라도, 그래도 상대가 저를 처음보다는 친밀하게 여기고 있지 않을까. 멋대로 착각을 했다. 허락도 없이 마음을 키워나가고, 혼자 멋대로 다가가 그녀의 영역에 발을 디디고, 뻔뻔하게 제 존재를 들이밀었다.
그렇게 하면 언젠가는 그녀도 빌어먹을 리하르트 아델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봐 주지 않을까 멋대로 기대를 했다.
그리고 돌아온 결과가, 이거였다.
부끄럽고, 비참해서, 더는 그녀의 눈동자를 똑바로 볼 수도 없었다.
“미안해요.”
레이몬드는 처음으로 클레어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떨어뜨린 채 힘없이 말을 내뱉었다.
우우웅.
품 안에서 시끄럽게 울려대며 그를 찾는 연락이 처음으로 반갑다고 느껴졌다.
레이몬드는 시선을 떨어뜨린 채 일부러 상의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마력구를 꺼내 들었다. 웅웅 소리를 내며 빛나는 마력구를 일부러 보란 듯이 꺼낸 후 입가에 간신히 미소를 띄었다.
“그만 가봐야겠어요.”
그리고 언제부턴가 돌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다리를 움직여 돌아섰다.
돌아서기 직전, 클레어에게 벽화도 좋지만 안색이 좋지 않으니 충분히 쉬면서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 말을 할 때에 제 표정이 무사히 웃고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레이몬드는 더는 아무 말도 전하지 못한 채 그곳을 떠났다.
* * *
“야.”
“…….”
“야, 알렌.”
“…….”
“어이, 거기 귀염둥이.”
“…….”
“야야야야, 알렌 스위티 카지스!”
뺨을 콕콕 찌르기, 머리 쓰다듬기, 부드러운 깃털로 발가락 간지럽히기, 맛있는 케이크로 유혹하기, 그리고 계속 주위를 얼쩡거리며 크게 이름 부르기, 그 외 기타 등등.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눈길 한번 안 주다니 정말 단단히 삐쳤군.
유리는 침대에 몸을 동그랗게 말고 누워 꼼짝도 하지 않는 귀여운 쥐며느리를 내려다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열흘 가까이 저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도 하지 않는 막냇동생의 침묵시위가 제법 꿋꿋했다. 유리는 귀여운 남동생의 귀엽고 안쓰러운 침묵시위가 생각보다 너무 길게 가서 당혹스러웠다.
“너 진짜 계속 나랑 말 안 할 거야?”
“…….”
“진짜 대박이다. 너 태어나서 이런 적 처음인데? 어디 보자, 네가 지금 다섯 살이고……. 코딱지만한 게 삐쳐서 하늘 같은 누님의 말도 다 씹고 아주 다 컸네, 다 컸어.”
“…….”
코딱지가 기분이 나빴던 걸까. 아니면 빈정거리는 듯한 말투가 기분이 나빴던 걸까. 그것도 아니면 혼자 이어나가는 침묵시위에 지친 걸까. 어느 쪽이든 씩씩거리는 귀여운 숨소리가 나더니,
“누님, 미어요!”
드디어 이 귀여운 침묵 시위자가 말문을 열었다.
“지짜 지짜 미어요!”
알렌은 조그만 손으로 침대를 짚고 벌떡 일어나 유리를 노려보았다. 외모가 너무나 앙증맞고 사랑스럽다 보니 노려보는 시선조차 위협적이라기보다는 귀엽고 깜찍하기만 하다는 사실이 조금 안타까웠다.
“누님이 오지 말라고 그래서 형슈님이 계속 안 오자나요!”
알렌은 분해 죽겠다는 듯 씩씩거리며 빼액 소리를 질렀다.
“알렌은 형슈님 보고 싶단 말이에요! 누님도 형슈님 보고 싶다고 울어쓰면서! 왜 형슈님 오지 말라고 해써요, 왜!”
그러고는 제 분을 못 이긴 듯 울먹거리더니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처음엔 빽 소리를 질러대는 알렌을 가소롭고 귀엽다는 듯 바라보던 유리의 눈가도 붉어졌다. 가만히 듣다 보니 억울하기도 하고, 엉엉 울기 시작한 동생을 보고 있자니 덩달아 눈물이 나는 탓이었다.
“바보야, 내가 언제 언니한테 오지 말라고 그랬어!”
“저번에 그래짜나요! 두째 형님한테! 그리구 알렌 바보 아니야!”
“그런 적 없거든! 없는 말도 지어서 하는 거 보니 거짓말쟁이네 완전!”
“아니야, 알렌은 거지말 하쭈 몰라!”
“알렌은 바보에 거짓말쟁이래요!”
“바보에 거짓말쟁이는 누님이야! 형슈님 보고 시푸면서 아니라고 해찌!”
나이 차가 꽤 남에도 둘은 괜히 남매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똑같은 수준으로 싸우기 시작했다. 서로를 노려보며 씩씩 숨을 몰아쉬는 모양새도 똑같았다.
유리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 몇 번 입을 벙긋거리다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커다란 눈망울에서 어느새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도, 나도…… 언니 보고 싶은 거 참고 있는 거거든!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 바보, 바보 알렌!”
“흐아아아앙! 알렌 바보 아니야아아!”
“알렌님, 유리님, 무슨 일이십니까? 괜찮으십니까?”
둘이 투닥투닥 다투다 우는 소리를 듣고 달려온 알렌의 유모와 시녀장이 쿵쿵 문을 두드려댔다.
문 잠가놓길 잘했다. 유리는 그 소리에 겨우 정신이 들어 코를 훌쩍이며 바깥을 향해 괜찮다고 외쳤다. 그러자 겨우 바깥이 잠잠해지긴 했지만 계속 문밖에 서서 안절부절못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새 알렌도 울다 지친 듯 아까처럼 빽빽 울어대지 않고 얌전히 훌쩍거리기만 했다. 유리는 어느새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된 남동생을 가만히 바라보다 손수건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왜 형슈님하테 돌아오라구 하지 아나써요?”
눈썹이 아래로 축 처진 채 제 누님을 올려다보는 알렌의 눈망울에 원망이 가득했다.
“지금이라두 해요. 빨리. 알렌이 보고 싶어 한다구 해요.”
그리고 조그만 손을 뻗어 유리의 소매를 꼬옥 붙잡고서 재촉하듯 말했다. 유리는 손수건을 찾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서려던 자세 그대로 멈춰 섰다.
풀썩. 소리가 나도록 침대에 다시 주저앉은 유리의 눈동자에 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다 내가 잘못한 거야.”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전부 알고 있다는 걸 이용해서 신이라도 된 양 심취해 있었다.
“내가 언니를 더 괴롭게 만들었어. 이 세계가 계속 언니를 몰아붙이면서 경고를 해오고 있었는데 난 그것도 모르고 내 멋대로 굴고 있었어. 내가 무조건 옳다고 여겼어. 언니가 아파하고 괴로워할 때도 난 그냥 내 입맛대로 이야기를 바꿀 생각밖에 없었던 거야.”
클레어 헤더를 위한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저 자기만족이었을 뿐이다. 거기에 클레어 헤더의 의견 따윈 조금도 없었으니까. 그녀는 그저 아무것도 모른 채 제게 휘둘리고 의미 없는 개죽음을 당할 뻔한 가여운 사람이었고.
멍청한 자신 때문에 클레어 헤더는 더 빨리 죽었을지도 모른다. 원작과 달리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 속에 남겨지지도 못한 채 아무 의미도 없는 죽음을 맞이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냥 원작 그대로 흘러가게 두는 게 오히려 그녀를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가슴 한 켠이 와르르 무너지는 듯했다. 미안하다는 말조차 꺼낼 수 없을 만큼 죄스럽고 미안했다.
자기혐오가 밀려들었다. 자신이 저 이기적인 주인공들하고 뭐가 다른가. 자신도 똑같았다. 아니, 오히려 훨씬 더 질이 나쁘다. 어쭙잖은 영웅 심리에 휩싸여 함부로 누군가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려고 했으니까. 그런 자신에게 도취하여 한 사람의 인생을 더 엉망으로 망쳐버렸으니까.
지금도 클레어 헤더는 전혀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 주인공들의 메인 무대 위에 억지로 세워져 있다. 마물들이 득실거리는 땅에서 불안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어쩌다 그렇게 된 건지, 진실을 알게 되면 저를 원망하는 눈으로 바라볼지도 모른다.
―결국 너도, 그 여자도 퍼즐을 완성하기 위한 작은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만 깨닫게 되겠지.
―제자리가 아닌 곳에 조각을 맞춰봤자 퍼즐은 완성되지 않으니까.
성녀 아리아, 저와 비슷한 처지의 빙의자로부터 세계의 규칙을 전해 듣게 된 날로부터 유리는 줄곧 혼란스러웠다. 줄곧 괴로워했다.
또다시 억지를 부려 클레어 헤더를 저 무대에서 강제로 끌어 내리는 게 나을지, 이제부터라도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두는 게 나을지. 어느 쪽도 결정하지 못하고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 그때 형슈님이 다친 거 때무네 그래요?”
어느새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펑펑 눈물을 쏟고 있는 유리의 등에 작고 다정한 손이 닿아왔다.
“그건 알렌 때무니자나요. 알렌이 잘못한 거니까 알렌이 나빠요. 누님은 잘못 업써요.”
유리는 겨우 손을 떼고 고개를 들어 알렌을 바라보았다. 이제 다섯 살인 어린 남동생이 자신을 달래주겠다고 작은 손으로 제 등을 토닥여주고 있었다. 자기도 울음을 참느라 몸을 들썩이고 있으면서. 토닥토닥. 조심스럽고 다정한 그 손길에 더 눈물이 났다.
이해할 수 없었다. 믿기지 않았다.
이렇게 진짜처럼 살아 움직이고 있는데, 이렇게 다정한데, 이렇게나 사랑하게 되어버렸는데.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게 그저 책 속의 인물들일 뿐이고, 원작 내용을 해칠 정도로 방해가 되는 존재가 있다면 세계가 그 사람을 제거해 버린다니.
몸을 짓누르는 무력감에 허탈하고, 슬펐다.
눈앞의 알렌도,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도, 그리고 클레어 헤더도. 잊고 싶지 않은데. 잃어버리면 죽을 만큼 괴로울 것 같은데. 원작 내용을 따라 허무하게 잃어야 한다는 사실이 지독히도 괴로웠다.
처음엔 단순히 흥미 본위였다.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확신했을 때, 너무 괴로워서 뭐든 다른 곳에 눈을 돌릴만한 게 필요했던 것도 있다. 슬프고 억울한 마음, 가족들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을 잊기 위해 뭐든 좋으니 내가 이곳에 있어야만 하는 이유를 찾았던 것뿐일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