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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19) (82/152)

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19)

유리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클레어가 그림을 그린다는 것도 전혀 몰랐던 레이몬드였다. 실제로 오늘 그녀가 벽화를 그리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도 그 사실에 크게 관심이 없기도 했다.

그랬는데도 막상 다른 이가 준비해준 캔버스와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조금 분한 마음이 들었다. 제가 나타난 걸 알기 전까지 밝게 웃고 있는 클레어의 미소를 본 뒤라 더 그런 기분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왠지 자신보다 훨씬 늦게 알고 지낸 저 여자가 더 클레어를 잘 아는 것 같았고,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외부인인 채로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것만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이런 식으로 패배감을 느끼는 건 리하르트 아델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는데 말이다.

레이몬드는 굳어지려는 얼굴을 펴고 클레어 앞에서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제가 언제 그런 어두운 생각을 했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혹시 버젯 교수의 제자가 되기라도 한 거예요?”

“……제자요?”

일부러 평소보다 더 밝은 어조로 물었건만 돌아오는 반응은 의아해하는 기색이 짙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어리둥절한 그녀의 눈동자에 레이몬드의 고개도 옆으로 기울었다.

“음?”

가만히 그녀와 그녀의 뒤에 서서 어느새 딴청을 부리고 있는 시온을 바라보던 그가 혹시 하는 얼굴로 물었다.

“클레어, 저 사람 누군지는 알고 있나요?”

“저를…… 구해주신 분이에요.”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의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클레어의 대답에 레이몬드의 찌푸려진 눈동자가 시온에게 향했다. 그녀는 여전히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식으로 애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무책임해 보이는 태도에 레이몬드는 그녀가 고의로 자신의 정체를 클레어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시오네트라 버젯 이라는 건 본명이고, 아마 그쪽에서 알려진 이름은 알테노이즈. 이 이름이라면 클레어도 들어봤겠죠.”

다행히 이번엔 클레어의 표정에도 변화가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눈동자가 점점 더 커지며 놀란 빛을 띠었다.

”레지나 왕립 예술 아카데미의 제 1교수이자 아카데미 역사를 통틀어 현재까지도 대륙 최고라는 평을 받고 있는 천재 화가. 그게 세간에 알려진 버젯 교수의 평입니다.”

레이몬드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그리라고 해서 정말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듯한 클레어가 걱정이 되면서도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점조차 귀엽다고 생각하는 스스로가 또 조금 걱정스러웠다.

피가 무섭다고, 이러다 자신도 나중에 아버지처럼 아내가 뭘 하든 예뻐 죽겠다는 팔불출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 모르는 것 같아서 재밌었는데. 왜 황자 전하가 말해버리시는 겁니까.”

지금껏 모른 척 대화를 엿듣고만 있던 시온이 그제야 끼어들어 작게 투덜거렸다.

농담 반 진담 반이 섞인 그녀의 투덜거림에 클레어도 느릿느릿 뒤를 돌아보았다. 생각 이상으로 놀란 듯 클레어는 쉽게 말문을 떼지도 못한 채 시온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놀라서 굳은 눈동자며 살짝 벌어진 입술이 무척 사랑스러워서, 레이몬드는 자기도 모르게 눈꼬리를 길게 휘며 웃었다. 클레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그는 놀란 기색이 역력한 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은 걸 뒤늦게 눈치챘다.

그러고 보니 어제 과일주에 상당히 취했었지. 클레어가 벽화를 그리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 깜빡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린 그는 염려가 담긴 말투로 다정하게 물었다.

“속은 좀 괜찮아요?”

말을 던져놓고 보니 왠지 노골적으로 어제 일을 상기시키는 질문이라 아차 싶었다. 혹시 어제 일 때문에 저를 더 불편해하거나 피할지도 모른다는데 뒤늦게 생각이 미쳤다.

“네? 네…….”

차라리 아예 자신도 까맣게 잊어버린 척 다른 질문을 할 걸 그랬나 하고 후회하는데, 의외로 그녀의 반응은 덤덤했다.

그동안 레이몬드가 봐온 그녀라면 어제의 일을 몸서리치게 부끄러워한다거나 스스로의 행동을 자책하며 그에게 미안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냥 평소처럼 적당히 불편해하고, 적당히 예의를 차리는 느낌 그대로였다.

조금 의외다 싶으면서도 다행이었고,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왠지 아주 조금은…… 심통이 났다.

이쪽은 상대를 착각 당해 뺨에 키스를 당하고, 어린애한테나 할 법한 짧은 키스에 설레어 밤새 잠도 못 잤건만. 그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라, 자신만 바보가 된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이 덤덤한 반응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싶어 레이몬드는 가만히 그녀의 눈빛이나 표정을 살폈다.

‘설마.’

시오네트라 버젯의 제자가 되기라고 한 거냐고 물었을 때처럼 어리둥절한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기만 하는, 평소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그녀의 태도를 응시하던 레이몬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하나도 기억을 못 하는 건가.’

그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클레어를 바라보다 질문을 던졌다.

“헤더 영애, 혹시 어제 일 기억 나요?”

그에 겨우 그가 상상했던 그녀의 반응들 중 하나가 튀어나왔다.

“아, 저기. 그게…….”

클레어는 깜짝 놀라더니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쉽게 대답을 꺼내지 못했다.

‘진짜 기억 못 하는 거군.’

레이몬드는 처음에 보였던 클레어의 덤덤한 반응에 한 번, 그리고 그녀가 진짜 어제 일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제 뺨에 키스를 당한 순간에 심장이 쿵 내려앉을 만큼 놀랐던 자신이, 저를 향해 환하게 웃는 그녀의 미소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스스로가 너무도 가엾고 억울하기까지 했다.

“……어제 일 하나도 기억 안 나요?”

“그, 그게…… 정말 죄송합니다.”

그가 허탈한 숨을 삼키며 기운 없는 목소리로 묻자 클레어는 점점 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호, 혹시 제가 어제 전하께 어떤 결례를…….”

평소의 그였다면 이렇게까지 곤란해하는 클레어를 두고 그녀가 더욱 곤란해할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 기분 따윈 적당히 흘려넘기고 그녀가 더는 곤란해하지 않도록 화제를 옮겼을 터였다.

하지만 왠지 오늘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젯밤 그가 밤새 잠 못 이룬 것처럼 그녀도 조금은 더 곤란해했으면 했다. 그리고 어제 일이 이대로 깨끗이 지워버린 것처럼 잊히지 않았으면 했다.

상대를 착각했든 뭐든 처음으로 그녀가 먼저 제게 닿아준 순간이니까. 바보 같더라도, 제게는 기념할 만한 소중한 기억이니까.

“어제 헤더 영애가 나한테 입 맞춘 것도 생각 안 나요?”

그래서 심술을 부렸다.

“무, 뭐, 뭐, 뭐…….”

먼저 반응을 보인 건 뒤쪽에 서서 안 듣는 척 이쪽의 대화를 다 듣고 있던 시오네트라 버젯이었다. 괜히 벽화의 스케치를 살펴보는 척 이쪽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그녀가 입을 쩍 벌린 채 경악한 눈으로 레이몬드를 돌아보았다.

레이몬드는 방금 한 얘기가 대체 어찌 된 상황인지 알고 싶어 미칠 것 같은 얼굴을 한 그녀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고 클레어에게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클레어는 이번에도 예상과 달리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색소가 옅은 눈동자가 멍하니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조금 전 레이몬드가 꺼낸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무해한 눈동자를 깜빡이기만 했다.

“헤더 영애?”

마치 자신의 말 자체를 듣지 못한 것도 같은 그 반응에 레이몬드가 한 걸음 더 다가서며 클레어의 시야를 당겼다. 그에 겨우 그녀가 반응을 보였다. 갑자기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오자 움찔한 클레어가 주춤 두 걸음을 물러섰다.

뭐, 항상 이런 식이지.

레이몬드는 무의식중에 그녀가 보인 반응에 또다시 씁쓸한 미소를 삼켰다.

제가 한 걸음 다가갈라치면 그녀는 두 걸음을 물러난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거리가 그녀와 자신의 마음을 내비치는 거울과 같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자신은 앞으로 누구도 사랑하지 못할 거라며 보이지 않는 선을 긋던 그녀의 목소리가, 지금도 또렷이 그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처럼.

그런 거라면, 지금까지와 같아서는 앞으로도 이 관계가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면. 클레어가 두 걸음 물러나기 전에, 그가 두 걸음 더 앞서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고 제게로 당기는 수밖에 없지 않나.

“얼마 전에 내게는 남들이 보지 않을 땐 연인다운 행동을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으면서. 헤더 영애는 어제 나한테 입까지 맞췄죠.”

레이몬드는 일부러 말을 애매하게 했다. 그리고 예쁜 얼굴을 붉히며 당황해하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했었다. 혹은 어제의 일을 간신히 기억해내고 부끄러워하며 제게 미안해하는 그녀를 상상했다.

그럼 괜찮다고 웃으며 그녀를 달래주려 했다. 자신은 오히려 횡재한 기분이었다며 은근슬쩍 제 마음을 내비치려는 속셈도 있었다.

“제가 어제, 감히, 전하께 그런 짓을…….”

당연하지만, 그가 기대한 그녀의 반응 중에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사색이 된 얼굴을 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했……었…….”

그런데 클레어는 또다시 전혀 기대한 것과는 다른 쪽으로 튀어 나갔다. 잠시 멈칫하던 그녀가 뭔가를 떠올린 듯 창백하게 질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뒤늦게 어제의 일들을 기억해낸 듯한 클레어는 수줍어하지도 그에게 미안해하지도 않았다.

“제, 제가 감히, 어찌, 전하께, 그런, 저는, 황족 모독죄…… 당장, 교수형에 처해야…….”

“잠깐, 잠깐만요!”

클레어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횡설수설하더니, 레이몬드가 생각지도 못한 극단적인 방향으로 튀어 나가 도리어 그를 당황케 했다.

“아니, 왜 얘기가 거기까지 튀는 겁니까.”

“제가 죽을 죄를……!”

“이런, 안 돼요. 무릎 꿇지 마요.”

겁에 질린 소동물처럼 덜덜 떨다 흙바닥에 무릎까지 꿇으려는 클레어를 레이몬드가 잽싸게 잡아챘다.

고개도 들지 못하는 그녀의 팔을 힘주어 붙들고 선 레이몬드는 자신의 경솔한 언행을 후회했다. 애초에 자신과 그녀 사이에 진짜 연인들처럼 연애 감정이 오가고 있는 것도 아닌데, 이따위 저급한 장난을 치려 한 스스로가 견딜 수 없이 한심했다.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을 수도 있다고 했던가. 자신의 실없는 한마디 때문에 벌벌 떨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속이 꽉 막힌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이걸로 다시 한번 더,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감정을 확실히 알게 된 것 같아 착잡해졌다.

그저 아주 조금 심술을 부려, 조금이나마 그녀가 자신을 이성으로 의식해주기를 바랐던 것뿐인데. 결국엔 그녀에게 있어 자신의 존재는 여전히 그저 「유리 크리스틴 카지스」를 위한 계약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걸 명확히 하게 되었을 뿐이니까.

그녀의 안에서 자신은 진짜 연인이 될 가능성 따윈 조금도 없는 불편한 타인일 뿐이라는 걸 알게 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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