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18)
아마 내가 깨어난 이 방은 영주가 마법사들을 위해 개조했다는 임시 숙소의 방들 중 하나겠지. 시온도 어제 곧바로 영주성으로 돌아간 게 아니라면, 여기서 머물렀을 테니 어찌어찌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왔을 테고.
띄엄띄엄 떠오르는 기억의 조각들을 맞춰보던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영주와 함께 했던 오찬 이후의 기억들이 가물가물했다. 영주가 말이 무척 많았고, 그 자리에 성녀와 리하르트 아델이 함께 있었고, 낯선 손님이 한 명 더 있었다.
나는 그 불편한 자리에서 과일과 주스만 간신히 목구멍으로 넘기고 있었다. 여기까진 제대로 기억이 나는데 이후의 기억이 꼭 누가 강제로 지운 것처럼 뚝 끊겨 있었다.
내가 어떻게 이 낯선 방에 와서 잠들어 있었던 건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게다가 푹 자고 일어난 것 같은데도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이며, 심한 두통의 원인은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기억이 없다는 것만큼 무섭고 불안한 게 있을까.
‘게다가 왠지 중요한 걸 잊고 있는 듯한 기분이…….’
지끈.
생각을 하려고 하면 할수록 머리가 더 아파져 왔다. 나는 한 차례 더 찬물을 얼굴에 끼얹은 후 수건으로 대충 얼굴을 닦으며 시온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는 동안 억지로 기억을 더듬어 보던 중 어제 기껏 그녀가 나를 바다에 데려다 줬는데 정신이 없어 나만 레이몬드 2황자와 돌아온 게 생각났다. 중간에 레이몬드 2황자와 같이 있을 때 마주치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 나를 기다렸던 건 아닌지 미안함이 들었다.
“응? 아니, 클레어가 어제 그 황자랑 가는 거 보고 나도 그냥 알아서 돌아왔어.”
세수를 하고 돌아와 함께 식사를 하게 된 시온에게 어제는 말도 없이 먼저 돌아가서 미안했다고 하니,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입 안에 있던 샐러드를 우아하게 씹어 삼켰다. 그러고는 덤덤하게 식사를 이어나갔다.
나는 그런 그녀를 조금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평소 그녀의 성격이라면 내게 그 황자와는 무슨 사이냐며 득달같이 달려들어 물어볼 듯한데, 그녀는 딱히 관심이 없는 듯 식사에만 열중했다.
예전에 리하르트 아델과 우연히 마주친 뒤에는 이런저런 질문들을 마구 쏟아냈었던 걸 기억하는 나로서는 고개가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상대가 관심도 없는데 굳이 내 쪽에서 레이몬드 2황자와의 관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할 것까진 없지 않나 싶어 나도 그냥 모른 척 넘어갔다.
그보다는 내가 어제 어떻게 이 낯선 방에 들어와 자게 되었는지에 대해 떠올리는 게 더 급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식사를 하는 척은 해야 할 것 같아 나는 따뜻한 수프를 억지로 한 모금 삼키며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영주가 말이 너무 많았고, 레이몬드 2황자가 계속 내게 신경을 써줬고, 나는 그게 부담스러웠고,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과일이나 주스를 마셨었고…….
챙그랑!
순간 들려오는 날카로운 소리에 깜짝 놀라 앞을 바라보니, 시온이 쥐고 있던 포크를 떨어뜨린 듯 굳은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떨어뜨린 수저를 내버려 둔 채 테이블 한쪽에 있던 종을 울려 하녀를 불러 새 포크를 가져다 달라 말했다.
그리고 조용히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하는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단순히 수저를 떨어뜨린 것뿐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굳은 표정이 꼭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괜히 수프를 수저로 젓기만 하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어디 몸이라도 안 좋은 걸까 몰래 그녀를 힐끔거리는데 그런 나와 눈이 마주친 시온이 씩 웃으며 물어왔다.
“그보다 클레어, 혹시 벽화도 그려봤어?”
한순간 변한 분위기에 당황해 그녀가 건넨 질문은 반 박자 늦게 머릿속에 입력됐다. 나는 잠시 허둥대다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 살짝 시선을 떨어뜨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그려본 적이 있긴 해요.”
“오, 그럼 얘기가 더 쉽겠네.”
시온이 잘 되었다는 듯 손뼉을 짝 치며 눈을 반짝였다. 저런 표정을 지을 때의 그녀는 조금 무서웠다. 성 꼭대기에 올라 뛰어내리겠다 협박하던 때의 유리 황녀를 떠오르게 하는 느낌이 들어 나를 불안케 했다.
“오늘 영주한테 허락을 딱 받아왔거든. 이 건물 후문 쪽에 안 쓰는 건물들이 몇 개 있는데 거기다 벽화 연습해도 된다고 허락받았어.”
결계에 들러붙어 있는 마물들을 보러 가자고 할 때처럼 이번에도 내가 상상도 못한 말을 꺼내는 그녀였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다 손가락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혹시 제가 그리는 건가요?”
끄덕끄덕. 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벽화를요?”
기대에 가득 찬 눈빛도 날아든다.
“어……, 왜요?”
이 질문 며칠 전에도 똑같이 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그릴 일이 있을 테니까.”
이 답변도 똑같이 들었던 것 같고.
그때와 다른 게 있다면, 이번엔 내게도 그리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는 거였다.
황성에서 유리 황녀를 위해 그렸던 벽화가 완성된 걸 봤을 때의 벅찬 감정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정작 내가 진짜 원했던, 완성된 벽화를 보고 기뻐해 줬으면 했던 사람의 환하게 웃는 얼굴은 아쉽게도 보지 못했지만.
가슴이 콩콩 뛰었다.
예전부터 벽화에 관심이 많기도 했고, 많이 접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도전 정신이 들기도 하고, 단순히 캔버스에 그릴 때와는 또 다른 설렘도 있었다.
갑자기 내게 벽화를 그리라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고 싶은 걸 하게 해주겠다는데 마다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어쩐지 나보다 더 기대에 찬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제가…… 그리고 싶은 걸 그려도 되나요?”
* * *
―헤더 영애는 언제쯤 수도로 돌려보낼 생각이니?
레이몬드는 오늘 아침에도 제 어머니인 카롤리나 황후로부터 받은 연락을 떠올렸다.
철혈의 황후라 불리는 게 무색하게도 알기 쉽게 감정을 드러내는 어머니는 오랜만이었다. 여동생인 유리 황녀와 관련해서는 자주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기도 하셨지만, 자신과 일대일로 있을 때 저토록 감정을 드러내는 일은 많지 않은 분이었다.
그런 제 어머니가 클레어 헤더를 계속 이 영지에 두는 걸 줄곧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그녀를 수도로 데려오길 원하고 있었다.
그렇게나 클레어 헤더가 황성에, 유리 황녀나 제 곁에 있는 걸 내켜 하지 않던 분이. 유리에게선 이미 굳이 수도로 데려오지 않아도 된다, 클레어 헤더가 원하는 대로 해주길 바란다는 답변을 들었음에도 말이다.
얼핏 유리로부터 그녀가 그린 그림 하나를 제 어머니가 무척 마음에 들어하셨다는 말을 듣긴 했다. 자신의 어머니가 유별나게 그림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름도 없는 아마추어의 그림 하나에 어머니가 그렇게까지 마음을 빼앗길 수 있는지, 평론가들도 혀를 내두른다는 그 대단한 심미안을 어찌 만족시킬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게다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클레어 헤더를 유리 곁에 들러붙은 지저분한 먼지 정도로 취급하던 분이, 고작 그림 하나에 갑자기 태도를 바꾼다는 것도 쉽게 납득가지 않았다.
첫날을 제외하고는 연락도 없이 잠잠해진 유리와 달리, 매일 같이 연락을 해오는 카롤리나 황후의 태도에 레이몬드는 줄곧 의아함을 느끼고 있었다.
“시오네트라 버젯님과 후문 쪽에 계신다고 합니다.”
클레어 헤더의 호위를 맡긴 기사들 중 하나가 그녀의 위치를 알려왔다. 레이몬드는 곧장 기사가 말한 곳으로 걸음을 옮기며 생각에 잠겼다.
그렇지 않아도 둘 모두에게 볼 일이 있던 그였다.
최근 클레어 헤더를 납치하려 했던 이의 꼬리가 잡혔다. 생각보다 거물이라고 해야 할지, 예상치 못한 인물이 나왔다고 해야 할지. 꼬리를 붙잡은 인물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이번 일에 대해 시오네트라 버젯의 도움을 받기도 했고, 왠지 그녀는 처음부터 상대가 누구인지 아는 것 같기도 했었다. 그런 그녀와 먼저 대화를 나눠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상황을 보고 있었다.
“어, 황자 전하네.”
기사의 보고대로 클레어 헤더는 시오네트라 버젯과 함께 임시 숙소의 후문 쪽에 있었다. 뭘 하고 있었던 건지 뺨이며 손과 팔, 옷에 물감 같은 걸 잔뜩 묻힌 채였다. 둘 중 먼저 자신을 발견한 시오네트라 버젯이 그에게 알은체를 해왔다.
그녀의 외침에 클레어 역시 그를 돌아보았다. 늘 그렇듯 어딘가 조심스럽고, 불편해하는 시선이 따라온다. 가만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척 시선을 피하기도 하고.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표정, 말투, 태도였다. 뭐, 이게 평소 자신이 봐왔던 원래 그녀의 모습이긴 하지만.
유리와 알렌, 그 녀석들에겐 자주 웃어줬으면서. 더없이 소중한 걸 보듯 바라보곤 했으면서. 자신에겐 한결같이 그저 조심스럽고 어렵고 불편한 사람을 상대하듯 한다.
‘어제 웃어준 것도 나를 알렌으로 착각하고 웃은 거였지.’
상대를 착각한 미소에, 뺨에 살며시 닿아왔던 입술에, 순간 가슴이 떨려서 밤새 잠도 못 잔 쪽이 바보 같은 거고.
레이몬드는 무심코 입가에 떠오른 씁쓸한 미소를 지운 채 클레어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면서 보니 그녀는 낡은 건물 외벽을 캔버스 삼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얼굴이며 옷이 엉망이 된 건 그 탓인 듯했다.
아직까진 스케치만 겨우 완성하고 이제 막 색을 칠하기 시작한 단계라, 명확히 무어라 판단하긴 어려웠지만 문외한인 그가 보기에도 평범한 아마추어가 그리는 느낌은 아니었다.
과연 유별한 심미안을 지닌 제 어머니가 관심을 가질만 하다 싶어 레이몬드는 살짝 감탄 어린 눈으로 벽화를 바라보았다.
“저…… 2황자 전하?”
다가오다 말고 인사 한마디 없이 멀뚱멀뚱 벽만 쳐다보고 있으니 클레어가 제 몸으로 슬쩍 그림을 가리며 말을 걸어왔다. 그가 제 그림을 보는 게 쑥스러운 듯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클레어의 모습에 레이몬드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 미안해요. 인사도 없이.”
벽화의 스케치가 멋지다고 한마디를 할까 하다가 미완성인 그림을 멋대로 보고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실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관뒀다. 그렇다고 방금까지 정신없이 그림을 보다 한마디도 않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아 질문을 조금 바꿔 관심을 보였다.
“클레어를 찾고 있었는데 갑자기 벽화를 그리고 있어서 조금 놀랐어요.”
“아, 이건 여기에 그리고 싶은 걸 그려도 된다고 해서…….”
그가 관심을 보이자 클레어가 우물쭈물하며 눈동자를 굴려 저만큼 뒤에 선 시온을 가리켰다. 레이몬드는 클레어의 시선을 따라 그녀를 돌아보는 대신 벽화의 주변을 바라보았다.
제법 준비를 철저하게 해서 벽화를 그리는데 필요한 도구들이 주변의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전부 저 여자가 준비해준 건가.’
그제야 레이몬드가 시온을 돌아보자 눈이 마주친 그녀가 씩 웃으며 인사를 건네왔다.
“안녕하십니까, 황자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