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17)
“혼자 걸을 수 있어요!”
나는 단호하게 거절의 의사를 내비치곤 이번엔 눈앞에 테이블이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라는 걸 확인한 후 나는 허리를 숙여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저 먼저 갈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크흡, 큽. 레이몬드 2황자의 뒤로 또다시 누군가가 힘겹게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한둘도 아니었다. 나는 또다시 기분이 조금 나빠졌지만 아무 말 않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내가 멀쩡하게 혼자 걸어서 내 방까지 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빠르게 성큼 걷기 시작했다.
“잠깐, 그쪽은……!”
“어이, 너……!”
놀란 레이몬드 2황자의 목소리와 리하르트 아델의 목소리가 동시에 귓가에 닿았다. 레이몬드 2황자의 손끝이 내 옷깃을 붙든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 찰나에 나는 이미 벽에 쿵 얼굴부터 들이받고 있었다.
악,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너무 아프면 비명도 안 나온다더니 사실이었다. 눈앞에 별이 보이고 눈물이 찔끔 났다.
푸하핫! 또다시 리하르트 아델의 웃음소리가 정적을 깨고 식당에 가득 울려 퍼지는 와중에, 나는 코를 감싸 쥔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저 남자가 또 웃었어. 완전 크게 웃었어. 진짜 짜증 나.
“괜찮아요?”
나보다 더 놀란 듯한 레이몬드 2황자가 즉각 몸을 낮춰 앉으며 내게 물었다. 술에 취해 있으면서도 나는 오늘 나 때문에 고생이 많은 그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나는 코를 감싸는 척 얼굴 전체를 손으로 덮은 채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아뇨, 안 갠차는 거 가타요. 코가 부러진 거 가타요…….”
“어디 봐요, 피 나는 거 아니에요?”
부끄러워 죽겠는데 레이몬드 2황자가 내 손을 치우고 얼굴을 요리조리 살피는 시선이 느껴졌다.
“빨개지긴 했지만 다행히 피는 안 나네요.”
그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코피 여부를 확인해주었다.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척 얼굴을 푹 숙였다.
“도와줄게요. 일어나 볼래요?”
“아뇨, 혼자 할 수 있어요. 괜찮아요. 죄송해요.”
나는 어떻게든 빨리 이 장소에서, 레이몬드 2황자의 앞에서도 사라지고 싶었다. 그리고 더는 그에게 민폐 끼치지 않고 혼자 알아서 잘 갈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끼익.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 했으나, 이내 다리에 힘이 풀려 뒤로 휘청거렸다. 레이몬드 2황자의 손이 곧장 내 팔을 붙들었고, 등 뒤에서도 묵직한 힘이 내 몸을 받쳐주었다.
“취했을 땐 무슨 말을 해도 안 듣습니다. 억지로 데려가야 할 겁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과거의 일을 끄집어내는, 나를 아주 잘 안다는 듯이 무심히 내뱉는 말에 나는 왜 또 혼자 상처를 받고 있나.
나는 다리에 힘을 주고 똑바로 서서 내 어깨를 붙잡은 남자의 손을 쳐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레이몬드 2황자의 손도 같이 쳐내게 됐는데, 거기까진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애써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눈동자를 들어 리하르트 아델을 노려보았다.
나는 이미 충분히 상처받고 괴로워하고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는데, 당신은 왜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내게 다가오나. 무슨 자격으로, 당신이, 내게.
“전하께선 잘 모르시겠지만요.”
그런데 리하르트 아델의 눈동자는 내가 아닌 내 뒤에 선 레이몬드 2황자에게 향해 있었다. 무표정하던 얼굴에 미소까지 띤 채 레이몬드 2황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째 조금 묘한 느낌이었다.
“그렇군. 덕분에 앞으로는 참고하도록 하지.”
그리고 그에 대답하는 레이몬드 2황자의 태도도 왠지 묘하게 날이 서 있는 느낌이라, 나도 모르게 그를 힐끔 돌아보았다.
얼핏 보면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웃고 있는 듯하지만 금색 눈동자에 떠올라 있는 건 분명 싸늘한 비소였다. 눈앞에 있는 상대가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흘리는 웃음이 차갑기 그지없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남자가 레이몬드 2황자까지 불쾌하게 만든 걸까.
술에 취한 나는 아주 용감무쌍한 사람이었다. 나는 씩씩거리며 테이블을 돌아보았다. 청포도를 하나 더 던져야겠다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떼는 순간, 레이몬드 2황자의 손이 다시 내 손을 붙잡았다.
“방으로 가죠, 클레어.”
거절은 용납지 않는다는 투였다. 부드럽지만 강하게 손을 붙들어오는 힘도 그랬고, 가라앉은 채 내 눈을 똑바로 마주해오는 시선도 그랬다.
아무리 술에 취해 천지 분간도 못 하는 나라도 거기서 싫다고, 나는 저기 리하르트 아델에게 청포도 하나를 더 던져야 한다고, 떼를 쓰기는 힘들었다.
나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얌전히 레이몬드 2황자의 손을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지 서늘한 빛이 감돌던 금색 눈동자에 아주 조금 온기가 돌아왔다.
그는 그대로 함께 오참을 참석했던 이들에게 인사 한마디 없이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급히 옆으로 비켜서는 하녀들을 지나쳐 곧장 식당의 입구를 지나쳤다. 나는 조금 빠른 걸음의 그에게 맞춰 종종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중간에 내가 허둥대는 걸 알고 레이몬드 2황자의 걸음이 느려져 조금 걷기 쉬워졌다.
식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어 우리는 금세 목적지에 도착했다. 짙은 갈색의 문 양옆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레이몬드 2황자를 알아보고 즉각 예를 갖춘 후 방문을 열어주었다.
레이몬드 2황자는 기사들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와 손을 잡고 있던 나도 여기가 누구 방인지도 모른 채 자연히 그를 따라 걸어 들어갔고.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클레어, 묻고 싶은 게 있…….”
“하아암.”
바로 눈앞에 침대가 보여서일까. 참고 있던 졸음이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곁에 있는 레이몬드 2황자를 잠시 잊은 채 하품을 크게 했다. 내 하품 소리에 그가 살짝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예의 없는 행동이라는 걸 인식하기도 전에 재차 하품이 터져 나왔다. 눈도 자꾸만 감겨서, 나는 손을 들어 눈을 비비적거렸다.
“일단 한숨 자는 게 좋겠어요.”
다행히 그렇게 말하는 레이몬드 2황자는 크게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약간 웃는 게 기분이 좋은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지금의 나는 판단력이 많이 흐려져 있어 확실하진 않지만 말이다.
레이몬드 2황자는 선 채로 비틀거리는 내 손을 잡고 침대까지 이끌어주었다. 그리고 내가 얌전히 침대에 누워 이불을 목까지 끌어 덮는 걸 보며 작게 웃기도 했다.
“한숨 자고, 얘기는 다음에 해요.”
그렇게 말하며 웃는 레이몬드 2황자는 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저렇게 웃는 걸 보니 확실히 알렌 4황자는 형제 중 누구보다 레이몬드 2황자를 많이 닮은 게 보였다.
알렌 4황자도 항상 저렇게 웃으며 내게 다정하게 말을 건네줬었다. 형슈님, 형슈님 하고 불명확한 발음으로 나를 불러주는 게 좋았다. 자기 전에는 잘자요, 형슈님 하고 내게 인사를 건네주기도 했었다. 그리고 자기가 먼저 내 뺨에 뽀뽀를 하곤 내게도 자기 뺨에 뽀뽀를 해달라고 조르기도 했었다.
나는 그런 알렌 4황자가 귀여워서 웃으며 그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뺨에 입을 맞춰주곤 했었다. 그럴 때면 유리 황녀도 와서 뽀뽀를 조르는 바람에 셋이서 잠들기 전 인사로 뺨에 뽀뽀를 해주는 게 당연한 일처럼 굳어졌었다.
“내일 봐요, 클레어.”
지금은 다른 사람도 없는데. 레이몬드 2황자가 또 나를 이름으로 불렀다.
그는 반쯤 눈을 감고 있는 내게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고는 몸을 돌려 가려고 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런 레이몬드 2황자의 팔을 붙잡았다.
“클레어?”
어느새 이불까지 걷어내고 몸을 일으켜 앉은 나를 보며 그가 놀란 얼굴을 했다.
“왜요? 어디가 불편해요? 아니면…….”
나는 걱정스럽게 말을 건네며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온 그의 팔을 휙 당겼다. 그리고 순간 코앞에 다가온 그의 뺨에 쪽 입을 맞췄다. 아까보다 더 놀란 눈을 한 채 굳어버린 레이몬드 2황자를 두고 나는 헤헤 바보처럼 웃었다.
“잘 자요, 알렌님.”
아, 2황자 전하라고 했어야 하는데. 실수로 알렌님의 이름이 나왔다. 갑자기 알렌님 생각을 너무 많이 한 탓이었다.
실수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너무 졸려서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다시 털썩 침대에 누워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겨 덮은 나는 그대로 기절하듯 쿨쿨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완전히 잠들기 직전 레이몬드 2황자가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스치듯 들린 것도 같았지만, 확실하진 않았다.
* * *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똑똑. 노크 소리는 아마 내가 일어나 대답을 할 때까지 계속될 모양이었다.
으으, 머리야.
결국 나는 머리가 깨질 것처럼 지끈거리는 통증 속에서 눈을 떴다.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억지로 뜨고 시계부터 확인하니 벌써 오후로 넘어가는 시각이었다. 나는 부스스 몸을 일으켜 앉아 문가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몇 시간 전에도 아침 식사를 가져왔다며 누군가 문을 두드렸던 것 같다. 그때도 반복되는 노크 소리가 괴로워 식사를 하지 않겠다고 잠결에 대답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이번에는 점심 식사를 가져온 걸까 생각하며 침대에서 내려섰다.
아.
걸어가면서 뒤늦게 깨달았다. 여기가 영주성에서 내가 지내던 방이 아니라는 걸.
여긴 어디지? 하고 생각한 순간 머릿속으로 많은 게 스쳐 지나갔다.
어제 낮에 시온과 함께 바다로 왔던 것, 여기서 겨우 겨우 성녀를 만났던 것, 레이몬드 2황자와 마주쳐 그가 현재 머물고 있다는 숙소로 함께 왔던 것, 영주와 식사를 하게 되었던 것, 그리고…….
쿵쿵쿵쿵.
정중하던 노크 소리가 조금 무겁게 바뀌었다. 이 땅에 와서 지내는 동안 저렇게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다는 걸 아는 나였다. 게다가 아마 내가 예상한 상대도 이곳에서 머물고 있을 테니 그건 확신에 가까웠다.
나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는 손으로 꾹꾹 누르며 걸음을 옮겼다.
“클레어, 같이 점심 식사나 하지!”
문을 열자 예상대로 시온이 밝은 얼굴로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마침 이 친구들이 식사도 가져왔더라고.”
그녀의 옆에는 하녀들이 음식이 가득한 트레이를 들고서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었다. 나는 무거운 트레이를 든 채로 나를 기다린 그녀들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얼른 옆으로 비켜섰다.
방 한 가운에 있는 테이블을 가리키며 저기다 놔달라고 부탁하자, 그녀들은 재빨리 트레이에 있던 음식들을 테이블로 옮긴 후 방을 빠져나갔다.
머리는 지끈거리고, 잠도 덜 깬 상태에 전혀 식사를 할 기분이 아니었지만, 이미 문을 열어버린 뒤라 거절하기가 좀 그랬다. 게다가 아침에도 이렇게 식사를 든 채로 나를 찾아왔다가 그냥 돌아갔다고 생각하니 더 마음이 좋지 않기도 했고.
나는 자연스럽게 테이블에 가서 앉는 시온에게 세수를 좀 하고 오겠다며 잠시 자리를 떴다. 차가운 물에 세수를 하고 나니 조금 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