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16)
“클레어, 괜찮아요?”
레이몬드 2황자는 실수를 저지른 하녀에게도, 하녀를 혼내고 있는 영주에게도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영주가 저렇게 열심히 자신의 충정을 알아달라는 듯 열정적으로 하녀를 혼내고 있음에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오로지 내가 괜찮은지 아닌지에만 관심이 있는 듯한 그 눈동자를 보며 나는 가만히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분명 내 몸의 일부인 목과 머리가 덜걱하고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느낌이 났다.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는 레이몬드 2황자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마 도수가 세진 않아 식전주로 내놓으려던 것인데 중간에 급히 과일 주스로 교체하다 저희 측 실수로 섞인 것 같습니다.”
아마 하녀들의 총 책임자인듯한 중년의 여자가 앞으로 다급히 걸어 나와 영주의 앞에 서서 허리를 깊이 숙였다. 영주는 그녀에게까지 어린 하녀를 대하듯 호통을 치긴 그랬는지, 거칠게 혀를 한 번 차고는 못마땅한 표정만 지었다.
애초에 그가 아무리 작당하고 반역을 꾀한 역적을 잡은 것처럼 하녀를 호되게 꾸짖어도 정작 레이몬드 2황자는 그들에게 관심도 없으니 저도 조금 민망해진 모양이었다.
“도수가 세진 않지만, 이 정도 술에도 취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때 리하르트 아델이 마시던 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그가 무덤덤하게 내뱉은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여들었다. 그 시선들은 「에이, 말도 안 돼. 겨우 이런 과일주에?」라고 말하는 듯했다.
딸꾹!
그가 웃기지도 않은 농담이라도 했다는 듯 헛웃음을 삼키는 시선들에 화답하듯, 내 몸이 작게 들썩였다.
리하르트 아델에게서 내게로 옮겨온 여러 쌍의 눈동자들이 설마 하는 빛을 띠었다.
딸꾹!
약간, 기가 막혀하는 것 같기도 했다.
* * *
눈앞이 뱅글뱅글 돈다. 몸이 내 것이 아닌 양 흐물거린다. 자꾸 딸꾹질이 나고, 머릿속이 어지럽고,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가 없다.
낯선 감각이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처음 경험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어느새 앉은 상태로도 몸을 잘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리면서도 내가 취했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술보다는 주스 쪽에 더 가까운, 고작 과일주 몇 모금에 말이다.
“클레어.”
레이몬드 2황자의 목소리였다. 그가 내가 들고 있던 유리잔을 부드럽게 빼앗아 가며 내 이름을 불렀다. 나를 걱정하는 목소리였다. 몽롱한 가운데도 그의 목소리만은 또렷하게 들려오는 게 신기했다.
목소리도…… 멋있어.
평소에도 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드는데, 왠지 레이몬드 2황자의 표정이 묘했다. 당황하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 전 다른 사람들이 나를 쳐다볼 때처럼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눈빛이기도 했다.
내가 너무 취해서 그런가. 하긴 꼴사납긴 하겠다. 어린애도 아니고 이 나이를 먹고 과일주 몇 모금에 정신을 못 차리는 여자를 보면 누구라도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1년 전이었던가. 태어나 처음으로 마셨던 술에 취해 해롱거리던 나를 보며 리하르트 아델도 두 번 다시 술은 입에도 댈 생각하지 말라며 단호하게 충고했던 기억이 났다.
혹시 나 지금 또 그때처럼 바보같이 웃고 있나?
“바보 같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웃고 있는 건 맞아요.”
나는 반쯤 감고 있던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뭐야, 지금 나한테 대답한 건가? 나 속으로만 생각한 건데, 이상하네……. 설마 이 사람 독심술도 하는 걸까.
“아뇨, 아쉽게도 독심술은 할 줄 모릅니다.”
레이몬드 2황자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막 꽃망울을 터뜨린 장미처럼 해사하게 웃는 얼굴에서 나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무리 봐도 이 사람은 너무 예뻐. 이 미모로 저렇게 웃는 건 진짜 반칙이다. 저런 얼굴로 웃으니 황제들이 저 미소에 홀려서 나라를 말아먹는 거잖아.
나는 멍하니 레이몬드 2황자의 얼굴을 응시하며 맥락 없이 앞뒤가 맞지 않는 생각을 이어나갔다. 어차피 평소처럼 나 혼자 속으로 생각만 하는 건데 뭐 어때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꼭 레이몬드 2황자가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쿡쿡 웃음을 흘렸다. 나는 왠지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졸음이 쏟아졌다.
너무 졸리니까 먼저 자러 간다고 해야겠다. 나는 앉아 있던 의자에서 호기롭게 일어났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려는데 테이블에 머리가 쿵 부딪쳤다. 앗, 진짜 아프네. 나는 부딪친 이마를 손으로 문지르며 주춤주춤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서 또 비틀거렸더니 어느새 레이몬드 2황자가 일어나 내 팔을 단단히 붙잡아주었다.
“푸핫!”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웃음소리가 들린 방향을 돌아보았다. 거기엔 리하르트 아델이 손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저 사람이 저런 식으로 웃는 건 처음 봐서 당황한 나는 졸린 눈을 바보처럼 끔뻑였다.
“클레어, 방으로 돌아갈래요?”
옆에서 레이몬드 2황자가 내 주의를 끌려는 듯 말을 걸어왔지만, 나는 아직도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리하르트 아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왜 웃지. 기분 나빠.
그리고 정말 갑자기 짜증이 확 났다. 살면서 이토록 감정 기복이 심한 건 처음이었다. 내가 마신 과일주가 정말 도수가 낮은 게 맞는 걸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클레어, 그만 방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레이몬드 2황자가 내 귓가에 걱정스럽게 속삭였다. 하지만 나는 꽤나 심통이 난 상태라 그의 말에 대답도 하지 않았다.
“리하르트.”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그를 제지하듯 성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성녀가 손을 들어 그의 팔을 붙잡자 리하르트 아델이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녀를 돌아보았다.
또다시 나를 외면하고는, 그녀만을 바라보는 리하르트 아델을 보고 있자니 점점 더 화가 났다.
저 남자는 내게 정말 왜 그러는 걸까. 왜 나를 도와준 걸까. 왜 내가 신경이 쓰인다고 대답한 걸까. 왜 자꾸 내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걸까.
내가 그렇게 우스운 걸까. 내가 그렇게 바보 같고 한심해 보이는 걸까. 버려지고도 자기에게 미련을 못 버리는 내가 재밌는 걸까. 그래서 심심풀이 삼아 건드리고 파드득 반응하는 나를 즐기고 있는 걸까.
화가 났다. 차라리 날 버렸을 때처럼 한 점 미련도 갖지 못하게 내버려 두지. 내가 죽든 말든 아무 관심 없다는 듯이 지나가 버리지. 차라리 그랬다면 나도 이렇게까지 화가 나진 않을 텐데.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차피 「진짜」인 그녀가 나타나면, 나 같은 건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무시하고 갈 거면서.
그렇게 나를 몇 번이고 비참하게 만들 거면서.
무심코 손에 힘을 주고 주먹을 말아쥐는데 동그란 뭔가가 손에 잡혔다. 이게 뭐지,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나는 손안에 쥐어진 뭔가를 리하르트 아델을 향해 힘껏 내던졌다.
툭. 날아간 뭔가가 정확히 리하르트 아델의 머리를 맞추고 바닥에 떨어졌다. 넓은 식당 안에 순식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술이 이토록 사람의 이성을 흐리게 하고 쓸데없이 용감무쌍하게 만들어주는 거였던가. 감히 공작의 얼굴에 청포도를 던지고도 두려운 것 없이 씩씩 숨을 몰아쉬던 나는 그제야 조금 분이 풀리는 듯했다.
큽, 하고 누군가 힘겹게 웃음을 참는 듯한 소리가 잠깐 들렸다.
리하르트 아델이 완전히 얼이 빠진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뭐라고 한 마디 쏘아붙이고 싶었는데, 갑자기 너무 많은 생각이 들어 당장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리고 일단 지금 나는 너무 너무 졸렸다.
나는 호기롭게 리하르트 아델의 이마를 청포도 맞춘 것치곤 금세 전투력을 잃고 졸린 눈을 비볐다.
안 되겠다. 너무 졸려서 아무 생각도 못 하겠어.
“저 먼저 자러 갈게요. 다들 안녕히 주무세요.”
나는 다시 한 번 공손히 꾸벅 인사를 했다. 바보같이 또 테이블에 이마를 박을 뻔했는데, 그보다 빨리 레이몬드 2황자의 손이 내 이마를 감쌌다.
어, 고맙습니다? 인사해야지. 아니다, 여기선 죄송합니다가 먼저인가. 어라?
“둘 다 안 해도 괜찮아요.”
이상하네, 아무래도 이 사람 독심술을 하는 게 틀림없다. 생각만 하고 말은 안 했는데 왜 자꾸 내 마음을 아는 거지. 아무래도 마법사들은 사람의 마음도 읽을 수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이건 합리적인 의심이다.
“진짜 독심술 같은 건 할 줄 모른다니까요.”
레이몬드 2황자가 자꾸 너무 예쁘게 웃었다. 왜 저렇게 자꾸 웃는 걸까. 진짜 진짜 예뻐서 눈을 뗄 수가 없는데. 금색 실타래 같은 머리칼에 순금을 박아넣는 듯한 눈동자라니.
안 그래도 예쁜 얼굴에 저렇게 특별한 색까지 지녔다니, 역시 이 사람은 반칙이다. 성녀 아리아도 그렇고, 레이몬드 2황자도 그렇고, 다들 너무 너무 치사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렇게 머리 색부터 평범하디 평범한 갈색인데. 색도 외모도 태어난 가문도 모든 게 평범한데. 마치 태어날 때부터 주인공과 조연의 역할이 정해져 있는 것 같아서 속상했다. 안 그래도 졸리고 힘든데 서러움이 더 밀려들었다.
‘이제 보니까 알렌님과 많이 닮았네.’
평소엔 늘 눈을 피하기 바쁜 레이몬드 2황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으니, 문득 천사 같은 얼굴의 황자님이 떠올랐다. 두 분 다 카롤리나 황후를 많이 닮아 있어 자연히 둘도 닮아 있는 탓이었다.
우리 알렌님이 자라면 딱 저런 느낌이겠지? 우리 알렌님도 저렇게 예쁘고 멋있게 성장하시겠지.
아……. 어떡해, 알렌님 보고 싶어. 유리님도 보고 싶어. 어떡하지, 눈물 날 것 같아. 그런데 내가 돌아가면 안 되겠지? 그럼 유리님이 위험해지니까…….
“얼른 데리고 돌아가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어느새 코를 훌쩍이고 있는데, 성녀가 불쑥 끼어들어 외쳤다. 왠지 조금 다급해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그녀가 내 쪽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레이몬드 2황자를 향해 말했다.
성녀를 돌아보려 몸을 틀면서 내가 비틀거리자 레이몬드 2황자의 말이 뻗어왔다. 그는 “실례.”하고 짧게 말하고는 내 팔을 잡고 내가 똑바로 설 수 있게 도와주었다.
“클레어, 걸을 수 있겠어요?”
나는 성녀의 표정을 확인하지 못하고 다시 레이몬드 2황자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항상 생각한 거지만 이 사람이 다른 이들 앞에서 친밀하게 클레어, 하고 불러주는 내 이름이 조금 간지러웠다. 부끄럽기도 하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쓸데없이 가슴이 설레기도 하니까.
사람들이 볼 때만 일부러 그런다는 걸 알지만 지금은 왠지 그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뺨을 뚱하니 부풀리며 팔을 흔들어 레이몬드 2황자의 손에서 벗어났다. 비틀거리며 물러나자 레이몬드 2황자가 다시 재빨리 손을 뻗어왔다.
나는 무사히 그 손에 다시 붙들리지 않고 뒤로 물러나 똑바로 섰다. 갑자기 멀쩡하게 서는 나를 보며 아름다운 금색 눈동자에 당황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