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15) (78/152)

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15)

“자자, 고맙지만 약혼녀에 대한 칭찬은 그쯤 해주겠나.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라 부담스러워하는군.”

그렇게 말한 레이몬드 2황자가 자신의 몸으로 영주와 내 사이에 벽을 만들었다. 덕분에 나는 영주의 불꽃 같은 부담스러운 시선으로부터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런,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소신이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오늘은 또 왜 찾아와서 이렇게 귀찮게 구느냐고 묻는 듯한 말투였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나를 대할 때와는 달리 사람을 대하는 것 자체가 싫은 듯한 심드렁한 그의 태도나 말투가 신기하면서도 왠지 나까지 어깨가 움츠러드는 느낌이었다.

원래는 상대를 대할 때 저런 분위기라면 내게는 유리 황녀 때문에 일부러 신경을 써서 친절하게 대해주는 걸 테니까. 그럼 아무래도 나를 대할 때의 레이몬드 2황자는 무척 힘들고 피곤한 상태가 아닐까 생각되니까.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상냥하게 대해줘도 뒤에서는 나를 굉장히 대하기 불편하고 성가신 상대라고 여기고 있지 않을까 불안해지니까.

“아아, 실은 오늘은 전하께서도 그렇고, 성녀께서도 이 숙소에서 머물 거라고 하시기에……. 혹시 숙소에 불편한 곳은 없으신지 한 번 더 살펴볼 겸 왔습니다. 그리고 고생하고 계시는 두 분을 위해 오는 김에 제 성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요리사들도 전부 데려왔습니다. 괜찮으시면 전하의 약혼녀분께서도 함께 점심 식사를 하시지요.”

영주는 무척 잘 되었다는 듯 손뼉까지 치며 나를 돌아보았다. 영주의 살집에 반쯤 덮인 눈동자가 나와 레이몬드 2황자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마지막 말은 내게 외친 것이었지만, 그 눈동자는 레이몬드 2황자에게 「저 잘했지요? 전하뿐만 아니라 전하의 약혼녀도 살갑게 챙기고 있지 않습니까? 이 정도면 저도 쓸만하지요?」하고 칭찬을 바라는 눈빛이었다.

“어떡할까요, 클레어?”

나는 당연히 레이몬드 2황자가 적당히 알아서 거절해주겠지 생각하고 그 부담스러운 식사 초대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레이몬드 2황자가 영주에게 「미안하지만」하고 말문을 열지 않고 내게 의견을 물어왔을 때 무척 당황했다.

“영주가 이렇게 신경을 써주니 오늘은 함께 식사를 하는 건 어떤가요.”

그리고 내가 거절하기 힘든 방향으로 제안을 끌어왔을 때는 더 당황했다.

여기서 내가 싫다고 대답하면 영주의 친절한 마음을 무시하는 게 되어버리는 상황이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곤란해하는 표정으로 레이몬드 2황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평소처럼 무조건 내 의견을 따라주겠다는 듯 다정하게 나와 시선을 맞춰왔다.

이상하다, 내가 잘못 느낀 건가. 이 사람이 일부러 내가 거절하지 못하게 말을 걸어왔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자의식과잉인가. 나는 살짝 찜찜한 기분을 안고 고민하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어디 괜찮기만 하겠습니까. 이렇게 아름다운 분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할 수 있다니 저희 가문의 영광이요, 소신의 인생에서 최고의 날이라 자부할 수 있는 날이 될 것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또다시 부담스러운 눈빛 공격과 아부성 발언들이 쉼 없이 날아들었다.

나는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뒷걸음질을 쳐 다시 레이몬드 2황자의 등 뒤로 슬쩍 몸을 감췄다. 그런 나를 보며 레이몬드 2황자가 재미있다는 듯 웃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진짜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지?

* * *

“……전하께서 설계한 가설이 가능하다고 입증되면 「문」에 대한 대처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달라지겠군요. 단순히 막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아예 존재 자체를 말살하는 것까지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저 씹어 삼켜도 시원치 않을 빌어먹을 괴물 놈들을 깨끗이 치워버리고 제 영지가 원래의 명성을 되찾고 전보다 더 번영할 수 있는 날도 머지않았군요.”

“영주께서는 너무 앞서가시는 듯하군요. 일단은 방어가 최우선, 그다음이 「문」에 대한 접근입니다. 아직 이쪽은 「문」에 대한 정보가 너무 적습니다. 저쪽을 파악하는 게 먼저. 공격은 그 이후의 이야깁니다.”

“예, 그렇지요. 하하, 제가 너무 앞서간 감이 있군요. 과연 레스티아님이십니다. 평소에도 레스티아님의 대단하신 위명은 익히 들어왔습니다만, 저 같은 범인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지혜롭고 현명한 눈을 지니신 분답습니다.”

“대단하신 건 옆에 계신 레이몬드님이시지, 제가 아닙니다.”

“클레어, 한 잔 더 줄까요?”

쉬지 않고 말을 내뱉는 영주와 그의 말을 냉랭하게 받아치는 남자의 대화가 오가는 도중, 레이몬드 2황자가 그런 두 사람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태도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덕분에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로 몰렸다.

여전히 흥미 본위로 반짝이는 영주의 부담스러운 시선과 무표정한 얼굴의 낯선 미청년의 탐색하는 듯한 시선이 내 얼굴에 내리꽂혔다.

한없이 태연하기만한 레이몬드 2황자와 달리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견딜 수 없었던 나는 고개를 거의 테이블에 박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사합니다.”

우리는 현재 영주의 초대로 넓은 식당 한가운데 차려진 오찬을 즐기고 있었다. 긴 테이블 위로 끝도 없이 차려진 다양한 음식들이 눈길을 사로잡고 군침을 돌게 했으나, 나는 내 앞에 한가득 차려진 눈과 입을 즐겁게 하는 음식들을 하나도 마음 편히 즐기지 못했다.

그 이유로 첫 번째는 나와 레이몬드 2황자 말고도 영주 주최의 오찬에 초청된 이들이 더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중 한 명은 아예 처음 보는 낯선 사람으로 레이몬드 2황자로부터 직접 소개를 받았다. 상대는 진한 흑발에 흑안의 예쁘장한 외모를 지닌 마법사였는데, 고작해야 16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어려 보이는 외모와 달리 마탑의 부마탑주라는 직함을 달고 있어 나를 놀라게 했다.

게다가 나이도 나보다 한 살 더 많다는 사실로 한 번 더 놀라게 했다. 무뚝뚝한 말투에 서늘한 얼굴을 하고는 오찬 내내 척 보기에도 엄청 달아 보이는 케이크를 몇 조각이나 먹어 치우는 것도 조금 신기했고.

그리고 나머지 둘은…….

“아리아님은 레이몬드 전하께서 내신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무래도 이번엔 아리아님께서 지니고 계신 신성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보니 어깨가 무겁진 않으실까 염려되는군요.”

“저는 괜찮아요. 신의 말씀을 듣는 자로서 제 힘을 필요로 하는 이가 있다면 당연히 손을 내밀어줘야죠.”

성녀 아리아와 그녀의 옆자리를 지키고 앉은 리하르트 아델의 존재였다. 둘 다 내게는 별 관심없이 영주의 말에 간간이 대꾸를 하면서 얌전히 식사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내 입장에선 저 두 사람이 맞은편에 앉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신경이 곤두서서 뭘 먹든 이게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클레어, 여기 청포도도 무척 달고 맛있어요. 먹어봐요.”

바로 이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영주의 대화 시도를 모조리 무시한 채 순수하게 오찬을 즐기고 있는 레이몬드 2황자 탓이었다. 필요 이상으로 나를 챙기는 그의 지나친 친절이, 자꾸만 오찬에 참석한 이들의 시선을 내게 몰리게 했다.

거기엔 당연하게도 성녀와 리하르트 아델의 시선도 포함되어 있는지라 앉은 자리가 가시방석이나 다름없었다.

처음엔 레이몬드 2황자가 직접 내 앞으로 가져다주는 음식들이 부담스러워 거절도 해봤으나, 그럴수록 더더욱 열정적으로 맛있어 보이는 것들을 내 접시 위로 가져오는 그였다.

“그건 입에 맞아요? 한 잔 더 줄까요?”

이 상황에서 수저를 놓치거나 손을 달달 떨지 않고 무사히 음식을 입까지 운반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대신 간단히 마실 수 있는 과일 주스만 홀짝거리고 있으니 레이몬드 2황자는 내가 그걸 좋아해서 그것만 마시는 줄 아는 듯했다. 뒤에 있던 사용인들에게 손짓해 내가 마시던 걸 종류별로 더 가져다 달라고 요구까지 했으니까.

“전하께서 헤더 영애를 정말 많이 아끼시나 봅니다.”

그리고 마지막 이유는 틈만 나면 내게 부담스러운 관심을 보이는 영주 탓이었다. 그는 레이몬드 2황자로부터 내 이름까지 알아내선 헤더 영애의 눈동자의 밤하늘의 별보다 어쩌고, 헤더 영애의 목소리는 세이렌보다 어쩌고 하며 말도 안 되는 아부를 쏟아내며 오찬 내내 나를 괴롭게 했다.

이거 봐, 또 영주의 관심이 우리 쪽으로 날아왔잖아. 방금까지 성녀나 레스티아 라는 이름의 마법사와 진지하게 결계에 대해 논의하던 영주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는 게 느껴졌다. 대체 저 여자의 어디가 그렇게 매력적이라 레이몬드 2황자가 저렇게까지 감싸고도는지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조만간 2황자 전하의 국혼 소식으로 또 한 번 제국이 들썩이려나요.”

“나도 영주가 기대하는 소식을 빨리 들려줄 수 있으면 좋겠군.”

오찬에 참석한 후 레이몬드 2황자가 처음으로 영주의 말에 제대로 대답했다.

그는 시종일관 다정한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더없이 사랑스러운 연인처럼 대했다. 그런 레이몬드 2황자와 내게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몰려 있었다.

나는 성녀와 리하르트 아델 쪽은 돌아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시선을 접시 위의 청포도로 내렸다. 얼마 먹지도 않았건만 먹은 게 전부 체할 것만 같았다.

나는 얼굴 위로 끈덕지게 달라붙는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과일 주스가 담긴 유리잔을 들어 올렸다. 속이 답답해 유리잔 속의 과일 주스를 단숨에 쭉 들이켰다. 그러고 나니 그나마 조금 속이 풀리는 것도 같았다.

하녀가 새로 가져온 주스는 앞서 마시던 것들보다 쓴맛이 감돌았다. 달콤한 과일향은 비슷했지만 묘하게 뒷맛이 쓰고 목구멍이 홧홧했다. 왠지 몸이 나른하고 졸음이 밀려들었다.

어? 이거 괜찮은 건가 하고 생각한 순간.

“이거 술이군요.”

리하르트 아델의 굳은 음성이 테이블을 넘어 내 귓가로 닿았다.

그의 한마디에 제일 마지막에 과일 주스 병을 가져다주었던 하녀가 당황한 얼굴로 허둥지둥 다가왔다. 자기가 가져온 유리병을 들여다본 하녀의 표정이 불안하게 변했다.

“죄, 죄송합니다. 실수로 제가 과일주를 가져온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어찌 이렇게 귀한 분들을 모셔놓고 실수를 하나! 다섯 분 모두 술을 즐기시지 않으니 일절 가져오지 말라 했을 터인데!”

눈이 자꾸 감기고 눈앞이 가물가물한 가운데, 사색이 된 하녀에게 큰소리로 호통을 치는 영주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죄송합니다, 전하. 이번 일은 제가 확실히 책임을 묻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정신이 없는 중에도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못한 듯한 어린 하녀가 고개를 숙인 채 벌벌 떨고 있는 게 싫다고 생각했다.

나는 레이몬드 2황자에게 저 아부 떨기 좋아하는 영주가 하녀를 혼내지 않게 해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무거운 고개를 움직여 옆을 돌아보자, 계속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은 레이몬드 2황자의 걱정스러운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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