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14)
리하르트 아델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은 성기사의 안색이 창백했다. 나를 밀쳤던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운 건지, 아니면 단순히 리하르트 아델의 질책이 두려운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나는 그저 내 일에 이 남자가 끼어든 게 싫었다.
“경은-.”
“제가.”
나는 이어서 계속 성기사의 행동을 지적하려는 듯한 리하르트 아델의 말을 끊고 나섰다.
“제가 허락도 없이 성녀의 몸에 손을 대려고 했기 때문이니 괜찮습니다.”
착한 척 저 기사를 옹호해주고 싶은 게 아니라, 이 남자가 내 일에 참견하는 게 싫은 거였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당신은 내 일에 관여하지 말라는 의미를 담아 덤덤히 말을 내뱉었다.
“……왜?”
리하르트 아델은 다시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제가 사랑해 마지않는 성녀를 앞에 두고서도 그녀가 아니라, 나를.
“왜 붙잡으려고 한 건데.”
또다시 순수하게 호기심이 깃든 시선이 날아들었다.
나는 아까부터 계속되는 의문에 혼란스러웠다. 이 남자는 정말, 진짜로, 왜 이러는 걸까.
보는 눈도 많은데 어째서 계속 내게 다가오고, 말을 걸고, 관심을 가지는 걸까. 자기가 흥미를 잃고 쓸모가 없어진 인형처럼 버린 내게, 어째서.
생각하면 할수록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내게 없던 마음이 생겼을 리도 없고. 이러는 이유가 뭔지 정말 궁금했다.
지금 당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보고 있는데, 굳은 눈동자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내겐 왜 이러는 거냐고. 이쪽도 이제 정말 단순히 이 남자의 행동과 머릿속이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어졌다. 심하게는 이 남자가 제정신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고.
“조금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나는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니 신경을 꺼주십사 하고 대답하려던 마음을 바꿔 조금 솔직하게 대답했다. 내 대답이 의외였던지, 리하르트 아델의 한쪽 눈썹이 위로 솟았다.
“네가 그녀에게?”
“네.”
나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성녀의 안색을 살폈다.
“그런데 지금은 안 된다고 하셔서 다급한 마음에 붙잡으려 한 거예요. 죄송합니다.”
“궁금한 게 뭔데?”
이상할 정도로 내게 궁금한 게 많은 남자는 예상대로 집요하게 캐물어 왔다. 성녀의 표정이 점점 더 차갑게 굳어졌다.
“그건-.”
“오늘!”
혹시나 하고 시도했던 방법이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지금껏 말없이 우리를 응시하고 있던 침묵을 깨고 성녀가 외쳤다.
“저녁쯤이면 시간이 날 것 같아요. 그때 둘이서 얘길 나눌까요, 헤더 영애.”
아주 조금 초조한 얼굴, 다급한 음성이었다. 그녀는 무리해서 상냥하게 웃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웃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웃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날, 나라는 사람의 존재 자체가 견딜 수 없다고 말하는 듯하던 시선을 뒤로 감춘 채.
어쨌든 나는 그녀가 더 이상 나와의 대화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주겠다고 대답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목적을 이룬 셈이었다. 성녀의 제안에 나는 그렇게 하겠다 대답하고는 얌전히 물러났다.
“리하르트.”
그대로 성기사들과 함께 떠날 줄 알았던 성녀가 리하르트 아델을 불렀다.
“곁에 있어 줄래요?”
성녀가 눈처럼 희고 고운 손을 그를 향해 내밀며 말했다. 리하르트 아델은 그에 당연하다는 듯 그녀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내 앞을 완전히 지나치기 직전 그가 내게 힐끔 시선을 던져왔다. 나는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그 시선에 눈썹을 모으며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뭘 쳐다보냐는 듯 반항적인 눈빛으로 노려보았더니, 그런 내가 아주 가소롭고 우습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걸어가 버렸다. 덕분에 내 기분은 한층 더 나빠졌다.
리하르트 아델은 에스코트하듯 성녀의 손을 잡은 채 점점 멀어져갔다. 여기까지 와서도 저 두 사람이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는 뒷모습을 봐야하다니. 나도 참 어지간히 불행한 사람이라 생각하며 익숙한 통증이 느껴지는 가슴께를 꾹 눌렀다.
다행히 혼자 세상의 온갖 불행을 떠안은 사람인 양 우울해하고 있을 시간은 길지 않았다. 주변에 있던 황성의 기사들이나 마법사들 중 누군가 달려가 내가 이곳에 있음을 알린 것인지, 레이몬드 2황자가 금세 눈앞에 등장한 탓이었다.
“헤더 영애, 여긴 또 어떻게……. 설마 그 교수 짓입니까.”
그는 설마 보고를 받고도 정말 내가 여기 있을 줄은 몰랐다는 듯 황망한 얼굴로 나타나선 아주 정확하게 내가 이곳에 서 있게 된 경위를 짚어냈다.
레이몬드 2황자의 표정이 생각보다 더 심각해 보여서 나는 잔뜩 기가 죽은 표정으로 대답을 망설였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수척해진 얼굴이며 더 날카로워진 턱선 탓에 살짝 예민한 인상이 된 것도 조금 낯설게 느껴졌고.
“정답이군요.”
“…….”
나는 본의 아니게 감히 그의 질문에 침묵으로 답하고는 식은땀이 배어나는 손을 치마에 문질렀다. 그리고 레이몬드 2황자의 단정한 미간이 좁아졌다든가 예쁜 입술이 한숨을 내쉬는 모습을 곁눈질로 살피다 멈칫했다.
그의 등 뒤로 커다란 나무에 몸을 반쯤 숨긴 시온이 서 있었다. 그녀는 손짓과 발짓을 동원해 내게 뭔가를 전하고자 했는데, 나는 본능적으로 그게 자신의 존재를 레이몬드 2황자에게 알리지 말라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알겠다는 의미로 눈을 한 번 깜빡여주자 그녀도 알아들은 듯 손가락으로 동그라미 표시를 해왔다.
“뭘 보는 거예요?”
자꾸 그의 등 뒤를 힐끔거리는 내 시선을 알아챈 그가 뒤를 휙 돌아볼 때는 깜짝 놀랐으나, 다행히 시온이 잽싸게 나무 뒤로 숨은 덕분에 들키지 않았다. 특별히 눈에 띄는 걸 발견하지 못한 레이몬드 2황자는 금세 다시 나를 돌아보고는 재차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내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이렇게 위험한 곳까지 온 건 칭찬해줄 수 없지만, 어쨌든 마침 잘됐네요.”
그는 제법 길어 눈가까지 내려온 머리칼을 성가신 듯 쓸어넘기곤 빙긋 웃었다. 한 차례 꾸중을 들을 줄 알았건만, 갑자기 그가 웃으며 잘됐다고 하기에 나는 조금 의아한 얼굴을 했다. 내 표정을 읽은 그가 짧게 웃음을 흘렸다.
“벌써 며칠이나 헤더 영애를 만나지 못해서 생각보다 꽤 힘들었거든요.”
레이몬드 2황자의 손이 뻗어와 자연스럽게 내 왼손을 잡았다. 그리고 내가 어? 하는 사이 어느새 우리는 나란히 손을 잡은 채 걷고 있었다. 그 일련의 행동들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어색해할 틈도 없었다. 그냥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그와 나란히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으니까.
굳이 손을 잡고 가야 하나 싶긴 했지만, 왠지 손바닥에 땀이 배어나는 듯해 조금 부끄러워서 손을 빼고 싶긴 했지만, 나는 일단 얌전히 그를 따라 걸었다. 아마 주변에 황실의 기사들이 많으니 보는 눈을 의식해 일부러 더 그러는 걸 수도 있겠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계속 바다 근처에 머물고 있으니 영주가 뭘 또 음식 같은 걸 잔뜩 보내온 모양이에요. 아직 식사 안 했죠? 헤더 영애도 같이 가서 들어요.”
처음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걸어가는 동안 레이몬드 2황자가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지난 며칠간 영주성을 떠나있었던 그는 현재 다른 마법사들과 함께 바다 근처의 임시 숙소에서 머물고 있다고 했다. 원래는 요양이나 관광을 위해 영지에 들린 귀족들을 위한 휴양 시설을 겸한 여관 하나를 통째로 숙소로 사용 중이라고.
그동안 영주성에 돌아오지 못한 건, 갑자기 한 번씩 결계가 불안정해질 때가 있어 그가 마법진 가까이에서 대기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고 간략하게 설명해주기도 했다.
시온을 통해 들은 것도 있고 어느 정도는 알고 있던 얘기들이었지만, 나는 그를 통해 처음 듣는 것처럼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나를 보며 그가 기특하다는 듯 또다시 웃음을 흘렸고, 나는 그 예쁜 미소에 홀리지 않기 위해 어색하게 시선을 돌려야 했다.
“2황자 전하, 여기 계셨군요!”
레이몬드 2황자가 말했던 임시 숙소에 다와갈 즈음, 건물 안에서 낯익은 얼굴의 남자가 허둥지둥 달려나왔다. 남자는 레이몬드 2황자를 발견하고 쩔쩔매며 다가와 허리를 굽실거렸다.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전하 덕분에 이 멜린트 영지민들도 저도 겨우 안심하고 일상을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높은 톤이며 비굴하게 웃는 얼굴을 어디서 봤나 했더니, 처음 이 땅에 왔던 날 만났던 영주였다.
영주는 투실투실한 뺨에 맺힌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연신 레이몬드 2황자의 눈치를 살폈다. 레이몬드 2황자와 그의 휘하의 마법사들 덕분에 저 괴물들로부터 영지가 파괴당하고 영지민들이 처참히 학살당하는 끔찍한 상황을 막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영주의 저런 태도가 영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옆에 계신 아름다운 레이디께서는 일전에 말씀해주신 약혼녀십니까?”
영주는 한참 동안 레이몬드 2황자에게 허리를 굽실거리며 알랑방귀를 뀌더니 돌연 내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피곤한 얼굴로 영주의 말을 받아주던 레이몬드 2황자의 눈동자가 아주 잠깐 반짝인 것 같았다.
“과연 전하의 약혼녀십니다. 단언컨대 그동안 제가 봐왔던 그 어떤 여성분보다 아름답고 매력적인 분이라 확신합니다. 오늘 날이 무척 흐리다 했더니 태양도 여기 계신 레이디 앞에서 빛을 잃고 구름 뒤로 모습을 감춘 것이었군요.”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말도 안 되는 미사여구를 덧붙인 아부와 같은 칭찬에 나는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 약혼녀시라니 전하께서는 역시 신의 사랑마저 독차지한 총아가 틀림없으십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두 분이 함께 서 계시니 이리 날이 흐린데도 주변이 환하게 빛이 나는 듯합니다. 덕분에 소신의 어둡고 아둔한 시야도 밝게 트이는 듯하며…….”
아무리 중앙귀족에 맞먹는 부와 거대한 영지를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결국은 수도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방의 귀족. 나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부족한 영주가 보기엔 아무리 이름 없는 귀족가의 영애라도, 레이몬드 2황자의 약혼녀라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아부를 떨어댈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멀리서부터 진짜 사랑하는 연인처럼 레이몬드 2황자와 다정하게 손을 잡고 오는 모습까지 보였으니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영주는 말도 안 되는 아부를 멈출 생각이 없었고, 나는 처음 겪는 당혹스러운 상황에 경악했다. 마치 어디 종이에 적어 외워 오기라도 한 것처럼 다다다 말을 쏟아내는 영주를 가까스로 외면하고 레이몬드 2황자를 올려다보았다.
애타게 도움을 청하는 내 표정을 마주한 레이몬드 2황자가 큽, 하고 겨우 웃음을 참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반대로 돌렸다.
설마 지금 내 얼굴이 웃겨서 웃으신 건가요. 아니, 웃으시는 건 좋은데 좀 도와주시고 나서 웃으시면 안 될까요. 진짜 더는 못 견디겠어서 그래요. 그런 마음을 담아 간절한 시선을 보냈더니 다행히 그게 통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