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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13) (76/152)

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13)

“그땐 잘도 따져 묻더니 이젠 할 말이 없으시다?”

그러는 게 아니었는데, 어울리지도 않는 짓은 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때도, 오늘도, 기껏 구해주러 온 사람에게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없이 적반하장의 태도를 내보이는 건 정말 나답지 않았다. 뭐하러 구해줬느냐고, 그냥 무시하고 가지 왜 왔느냐고, 따져 물었던 그때의 내가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 내가 그렇게 말하고 행동했던 모든 게 사실은 알고 보면 전부 그를 향한 투정일 뿐이었다는 걸 아니까. 어째서 나를 버린 거냐고, 어째서 나를 사랑해주지 않은 거냐고.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을 감춘 채 억지스럽게 화를 내고 소리를 질렀으니까.

할 수만 있다면 내 머릿속에서도, 이 사람의 머릿속에서도 깨끗이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이 다시 들춰내지니 정말 쥐구멍이라도 파서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대답 대신 그에게 붙잡힌 손을 놓아 달라는 의미로 당겼다. 그는 그런 나를 못마땅한 눈으로 내려다볼 뿐, 손을 놓아주진 않았다.

“넌 없어도 내가 할 말 있어. 그러니 시간 좀 내.”

이 사람이 정말 왜 이러는 걸까. 불안한 마음에 가슴이 거칠게 뛰었다. 이 사람이 내게 할 말이 뭐가 있지.

날 버리던 순간에조차 변명 한마디, 미안하다는 사과 한마디 없이 깔끔하게 이별을 통보했던 사람인데. 그래서 나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떠나야 했는데. 당신의 옷깃 하나 붙잡지 못하고, 날 떠나지 말라 애원하지도 못했는데. 당신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 주제 파악도 못 하는 지긋지긋한 여자로 기억되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조용히 떠나야 했는데.

그런데 당신은 어째서.

지금에 와서야 나를 붙들고, 내게 할 말이 있다고 하는 걸까.

“이거 좀 놔요.”

“싫어, 놔주면 바로 도망갈 거잖아.”

주변을 돌아다니는 황성의 기사들이나 마법사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따라붙는 걸 느끼고, 붙잡힌 손목을 놓아달라 요구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단호했다.

도망이라니, 순간 발끈했던 나는 여기서 화를 내는 것도 괜한 감정 소모다 싶어 치미는 짜증을 내리눌렀다.

“……얌전히 얘길 들을 테니 놔주세요.”

포기했다는 얼굴로 그리 말하자, 잠시 미심쩍은 듯한 시선이 내려왔다. 또 싫다는 말이 나올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이번엔 별말 없이 손목이 풀려났다.

“그나저나 여긴 또 어떻게 온 거야? 전하께서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가 레이몬드 2황자를 찾는 것처럼 주위를 휙 둘러보며 말했다.

“하실 말씀이 뭔가요.”

나는 그가 하는 말의 의도를 모르겠다는 듯 눈살을 찌푸린 채 냉랭한 목소리를 냈다. 내가 생각해도 조금 무례하다 싶은 태도에 리하르트 아델의 미간에도 주름이 잡혔다.

“너, 원래 이런 성격이었던가?”

진짜 이 사람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내 무례한 태도에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정말 순수하게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묻고 있는 게 나를 황당하게 만들었다. 말문이 막혀 입술만 달싹이고 있으니 그걸 어떻게 해석한 건지, 그가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선 제멋대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럼 그동안은 다 가식이고 내숭이었던 건가.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뭘 하든 바보처럼 웃으면서 따르기만 했던 게 전부 다?”

조소에 가까운 웃음을 흘리지도 않았고, 빈정거리는 말투도 아니었다.

그가 그저 담담하게 나와의 과거를 떠올리며 내뱉는 말에 내 안에서 또 하나의 모래성이 무너져내리는 게 느껴졌다.

당신을 사랑해서, 당신에게 버려지고 싶지 않아서, 내 마음도 죽이고 그저 당신만을 위해 살아왔던 내가…… 천하에 다시 없을 바보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당신이 그런 말을 하는 건 너무 잔인하지 않나.

당신에게는, 당신에게만은 당신을 사랑했던 내 마음을 그런 식으로 폄하 당한 채 짓밟히고 싶지 않았는데.

손끝이, 입술이, 떨렸다.

이 사람에게 내가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아직도 이 사람의 말 한마디에 쉽게 상처 입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눈물이 날 것 같은 감정을 억지로 내리누르자 그 자리에 대신 분노의 감정이 빼곡히 들어찼다.

당신이, 내게, 이럴 순 없는 것 아닌가. 어떻게 내게, 그때의 나를, 그런 식으로 말할 수가 있나.

내가 대등한 힘을 소유한 사람이었다면, 있는 힘껏 이 사람을 때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떨리는 입술을 감추려 이를 악물고서 아래로 떨어뜨렸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래, 그 눈.”

놀랍게도 그는, 리하르트 아델은 웃고 있었다. 내 표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흥미로운 시선을 던지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그 반응에 당황해 멈칫하는데 그가 더 환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난 이쪽이 훨씬 마음에 들어.”

예전의 내가 아주 가끔밖에 보지 못했던 미소였다. 무척 진귀한 수집품을 어렵게 손에 넣었을 때라든가, 힘든 시기를 거쳐 모든 일이 전부 제 뜻대로 흘러갈 때에 그가 아주 가끔 내게 보여주던 미소였다.

과거의 내가, 그토록 원하고 바랐던 그 미소.

“재미없게 웃기만 하던 그때의 너보다 지금이 훨씬.”

나는 그의 웃는 얼굴을 멍하니 넋이 나간 눈으로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사람은 왜, 이제 와서 왜, 겨우 이 사람의 존재를 지워가고 있는 내게, 왜 이러는 걸까.

분노보다 슬픔이 앞서, 슬픔보다는 의문이 먼저였다.

이제 와서 내게 뭘 바라는 걸까. 이 사람이 내게 이런다고 얻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딱히 짐작 가는 게 없었다.

아니, 그에게 있어 이런 식으로 내게 다가오는 건 오히려 손해 볼 행동이 아닌가. 이 사람에게 나란 존재는 과거에도 지금도 그저…….

‘아리아 성녀.’

저 멀리, 그녀가 보였다. 이 땅을 감싼 결계처럼 성녀의 주위를 둘러싼 성기사들과 함께 어딘가로 걸어가는 성녀 아리아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가 나와 리하르트 아델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어느새 바로 앞에 있는 그의 존재마저 잊은 채 초조해졌다. 성녀가 눈앞에서 사라질까 다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잠깐, 또 어딜……!”

내가 갑자기 움직이는 바람에 방심한 듯 이번엔 그도 나를 붙잡지 못했다. 나는 점점 멀어지는 성녀만을 눈으로 좇으며 달렸다.

“아리아님!”

달리면서도 초조함을 못 이겨 커다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거리가 너무 멀어 들리지 않는 건 아닐까 불안했는데, 다행히 내 목소리를 들은 듯 그녀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나는 밀려드는 반가움에 그녀를 향해 손까지 크게 흔들었다. 성녀 아리아와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나를 알아달라는 듯이.

그런데 성녀 아리아는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보고는 이내 누가 있기라도 했냐는 듯 몸을 돌려 가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당황했다. 그리고 다시 초조해졌다. 이대로면 며칠 동안 계속 그랬듯이 그녀를 만나지 못할 것 같았다. 해결되지 못한 의문과 불안, 두려움의 감정을 안은 채 잠 못 드는 밤이 지속될 것 같았다.

나는 양손으로 치마를 꾹 눌러 잡은 채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다행히 그녀의 걸음이 그리 빠르지는 않아 금세 따라잡을 수 있었다. 어느새 눈앞에 그녀가 있었고, 돌아봐 주지 않는 그녀를 향해 초조한 손을 뻗었다.

그러나 내 손은 성녀에게 가서 닿기도 전에 중간에서 가로막혀 밀려났다. 그녀의 뒤를 따르던 성기사 중 하나가 내 손을 막아섰다.

“감히 누구에게 함부로 손을 대려는 거냐.”

누가 보면 내가 성녀를 해하기라도 한 것처럼 살벌한 시선이었다. 거대한 덩치의 성기사가 위압적으로 내 앞을 막아서자 성녀는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나는 이대로 그녀가 자리를 뜰까 초조해져 다급히 말을 내뱉었다.

“부탁드려요. 아리아님과 얘길 나누고 싶어요.”

그에 나를 혹 자객이 아닌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훑어보던 성기사가 이내 나를 알아본 듯 옆에 있던 다른 성기사를 돌아보았다. 아마 그가 성기사들의 대장 격인 사람 같았는데, 그 역시 지난 며칠간 끈덕지게 성녀의 거처를 찾았던 나를 알아보고는 성녀를 향해 공손한 어조로 물었다.

“어찌할까요, 아리아님.”

나는 앞을 가로막은 성기사의 눈치를 살피며 옆걸음으로 움직여 고개를 내밀었다. 그 순간 내 쪽을 돌아본 성녀와 눈이 마주쳤다. 청은색의 눈동자가 무표정하게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빙긋 웃었다. 명백하게 선을 긋고 벽을 세우는 미소였다.

“지금은 제가 조금 바빠서요. 죄송합니다.”

예상했던 그대로의 답변을 내어놓은 채 성녀는 몸을 돌렸다. 지난 며칠간 다른 성기사들을 통해 받았던 거절과 크게 다르지 않은 형식적인 답변이었다.

성녀가 먼저 걸음을 옮기자 성기사들도 다시 그녀의 주위를 감싸듯 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저는……!”

여기까지 와서 또다시 그녀를 놓칠 수 없었다. 나는 어차피 성기사들에게 가로막힐 걸 알면서도 과감히 성녀를 향해 팔을 뻗으며 다가섰다.

그리고 이번에도 예상대로 나는 중간에서 나를 막아선 성기사들에 의해 거칠게 뒤로 밀쳐졌다. 중심을 잃고 털썩 주저앉자 흙먼지가 훅 날리며 치마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주저앉을 때 바닥에 찧은 엉덩이가 제법 아팠다. 그리고 남들 앞에서 어린애처럼 넘어지고 주저앉은 모습이 창피했다.

“일어설 수 있겠어?”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는 찰나, 커다란 손이 옆에서 불쑥 내밀어졌다.

또 이 사람인가.

이상도 하지. 이제 와서 이 사람이 내게 이러는 게 왜 이렇게 불쾌할까. 그토록 바랐던 이 사람의 관심을 받고, 신경 쓰인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기쁘지 않았다. 지난 몇 년간 이 사람을 사랑하고 이 사람에게 버려져 죽을 만큼 괴로웠던 나였는데.

이제라도 이 사람이 내게 관심을 보이면 기뻐해야 하는 게 아닌가. 어째서 나는 기쁘지 않고, 오히려 화가 나는 걸까.

나는 짜증스러운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조심하며 혼자 힘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기껏 내민 도움의 손길을 거절당했음에도 리하르트 아델은 딱히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제 손을 회수했다.

그는 무덤덤하게 일어서서 흙먼지가 묻은 치마를 툭툭 털고 있는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성기사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충성을 맹세한 주군이 다르다고는 하나, 그대들도 분명 기사 서약을 마친 기사들일 터인데.”

그의 시선에 성기사들의 표정이나 행동이 눈에 띄게 굳는 게 보였다. 아마 자기들 생각에도 방금 전 나를 밀쳐서 넘어지게 한 건 조금 과했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기사된 자로서 존중하고 보호해야 할 레이디를 그런 식으로 대해서야 되겠나.”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지나치게 낮고 싸늘해서 오히려 더 상대를 움츠러들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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