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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12) (75/152)

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12)

나는 지난 며칠 간의 기억을 헤집으며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삼켰다.

나는 3일 전 성녀가 내게 했던 말들에 대해 다시 한번 더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그날 밤 성녀가 다시 영주성으로 돌아왔다는 말에 그녀가 머무는 거처를 찾았으나, 피곤하다는 이유로 방문을 거절당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우연히라도 밖에서 그녀를 만나기 위해 영주성 입구를 어슬렁거리기도 했지만 쉽게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성녀와도 원래부터 알던 사이냐, 둘이 대체 어떻게 아는 사이냐며 시온으로부터 계속 질문 공세에 시달리기도 했고.

한 번은 성녀의 호위인 성기사에게 주의를 받기도 했다. 성녀는 신의 사자로 더없이 고귀한 존재이며, 현재 그녀는 이 나라, 더 넘어서 이 대륙을 위해 자신이 지닌 힘을 쏟아붓고 있다고 했다.

그녀에겐 휴식이 필요하며, 나 따위에게 내어줄 시간은 없으니 두 번 다시 찾아오지 말라는 식으로 돌려 말하는 걸 들었다. 그래서 나는 영주성 안에서는 그녀를 만나기 힘들 거라는 걸 알았다. 혹 그녀가 일부러 나를 피하고 있는 것이라면 더더욱.

최근 성녀는 매일같이 네 번째 「문」에 간다고 들었다. 정확히는 「문」과 가까운 바다와 맞닿은 결계에. 그곳에서 레이몬드 2황자를 비롯한 마법사들과 협력해 결계를 강화하고, 문에 접근할 방법을 찾고 있다고 했다.

수백 년간 인간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했고, 그래서 맞서 싸워야 했고, 없애려 노력했지만, 밝혀진 게 거의 없는 미지의 적을 사라지게 할 열쇠를 찾고 있다고 했다.

나는 매일 같이 발이 닳도록 바다에 가는 시온에게 나도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정면으로 대화를 청한다면 성녀도 받아줄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계산이 있어서였다.

원래부터 끈질기게 나를 바다에 데려가고 싶어 했던 시온은 흔쾌히 내 부탁을 받아주었고, 그게 지금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였다.

그래, 분명 여기에 온 건 내 의지였다. 시온의 강요도 아니고, 성녀가 이곳까지 오라며 날 부른 것도 아니고, 오롯이 내 의지.

그럼에도 나는 또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마탑주 황자가 이미 저쪽에서 대기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어. 별일 없을 거야. 오늘도 결계가 완벽하게 안전하다고 판단이 됐으니까 내가 접근하는 걸 허락해준 거고.”

결계에 달라 붙어있는 마물들로 인해 내가 겁에 질려있다는 걸 아는 시온이 위로하듯 말을 건네왔다.

“아, 그런데 너도 간다는 말은 안 했는데……. 뭐, 괜찮겠지.”

반 박자 늦게 혼잣말처럼 작게 덧붙인 말은 살짝 불안했지만.

나는 그녀에게 괜찮다는 듯 웃어 보이다 이내 자신 없는 얼굴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아무리 봐도 저 창문 너머의 풍경은 익숙해지질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

일부러 창밖을 보지 않으려 시선을 떨어뜨린 채 한숨만 푹푹 내쉬는 나를, 시온이 빤히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좋아하는 결계 너머의 마물들이 아니라 내게 계속 시선을 두는 게 의아해 고개를 들었다. 할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내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가 또다시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이 정도로 예쁘면, 저 대단한 황자도 반해서 쫓아다니는 건가.”

“……네?”

“응?”

내가 곧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한쪽 눈썹을 휘며 대답하자 그녀가 살짝 멈칫하는 기색을 보였다. 뭐지? 하고 그 반응을 의아하게 여기는 순간, 때맞춰 마차가 멈춰 섰다.

돌부리에 바퀴가 걸린 듯 살짝 덜컹거리는 바람에 나와 시온 둘 다 자세가 흐트러졌다. 평소 같으면 썩 좋지 않은 마차의 탑승감에 짜증을 냈을 그녀는 오히려 반갑다는 듯 얼른 마차 문을 열었다.

“어, 도착했네. 내리자, 내려!”

그러고는 내가 뭐라고 할 틈도 없이 후다닥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나는 뭔가 조금 찜찜한 기분을 안은 채 그녀를 따라 마차에서 내렸고, 이내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게 되었다.

바다를 코앞에 둔 땅에 내려서니 자연히 결계와도 가까운 거리에 서게 됐고, 결계에 달라붙은 마물들 또한 지나치게 가까웠다. 악취도, 그 형형하고 기괴한 생김새도, 모든 게 끔찍했다.

나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치는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시온이 다가와 내 손을 덥석 붙들었다.

“괜찮다니까. 걱정하지 말고 이쪽으로 와.”

시온은 내 손을 잡고는 아무렇지 않게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바다 쪽으로 시선도 주지 않으려는 나와 달리, 그녀는 색색의 달콤한 사탕을 눈앞에 둔 아이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마물들을 바라보며 걸었다.

등 뒤에서 시온의 호위들이 따라붙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나마 그 소리가 아주 조금 나를 안도하게 했다. 시온의 말에 의하면 다들 무시무시한 몸값을 자랑하는 용병들이라 했으니, 혹시 모를 상황에서도 그녀의 곁에만 붙어있으면 목숨 정도는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쟤네 저기 모여있다.”

시온이 손짓하는 곳을 돌아보니 탑의 소속임을 증명하는 검푸른 로브를 갖춰 입은 마법사들이 보였다. 그녀가 놀이터에 옹기종기 모여 놀고 있는 어린애들을 가리키듯 말했지만, 멀리서 보기에도 하나같이 대단해 보이는 사람들뿐이었다.

그중 결계에 가장 가까이 다가선 세 사람은 무겁고 진중한 표정으로 바다를 응시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황자는 안 보이네. 나중에 보이면 말해야겠다.”

시온은 마법사들 주위를 이리저리 살펴보고는 레이몬드 2황자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서 심드렁한 얼굴을 했다. 그러고는 이내 마법사들에게는 흥미를 잃은 듯 다시 결계에 달라붙은 마물들에 관심을 돌렸다.

“어! 저거, 야! 릴리아트다 저거! 가보자, 빨리!”

그러다 레비아탄 때처럼 뭔가 마음에 드는 마물을 발견한 듯 내 손을 놓고 혼자 후다닥 달려가 버렸다. 그녀의 호위들도 빠르게 뒤를 따르는 게 보였다.

어느새 뒤에 혼자 덜렁 남겨진 나는 손을 들어 괜히 뺨을 한 번 매만졌다. 벌써 저만큼 멀어진 시온을 가만히 바라보다 뒤늦게 내가 여기까지 온 목적을 떠올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성녀는 어디에…….’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성녀는 물론 레이몬드 2황자도, 리하르트 아델도 보이지 않았다. 결계를 지키듯 늘어선 황실의 기사들과 마법사들만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바쁘게 눈동자를 굴리며 세 사람을 찾았으나 한참이 지나도 세 사람 중 누구 하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설마 오늘은 여기 오지 않는 건 아니겠지, 하는 불길한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소매로 코와 입을 가리고 설 만큼 지독한 악취 사이로 낯선 꽃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어디서 이런 향기가 나는 거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향기가 흘러드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금빛의 결계 너머로,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푸른색의, 바다의 요정이 있다면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까 싶을 만큼 예쁜 여자아이였다. 나도 모르게 멍하니 그 애를 바라보고 있으니 여자아이가 웃었다. 예쁜 입술을 길게 늘이며 방긋 웃는 얼굴이 무척 예쁘고, 무해해 보였다.

분명 머리로는 저 애도 결계 너머의 마물들 중 하나라는 걸 아는데도, 왠지 내게만은 해를 끼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향해 웃고 있는 푸른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을수록 머릿속에 안개가 피어오르듯 판단력이 흐려지는 게 느껴졌다.

잠깐 가까이 가는 건 괜찮지 않을까. 결계 너머는 위험하니까, 저 애만은 이 안으로 들여보내 줄 수 없을까. 저렇게 예쁜 아이인데, 절대 사람에게 해를 끼칠 것 같지 않은데.

제정신이라면 할 수 없는 생각을 하며 한 걸음 한 걸음 결계 가까이 다가섰다. 그리고 느리게 뻗은 손이 이제 막 결계에 닿으려는 찰나였다.

“손대지 않는 게 좋아.”

커다란 손이 내려와 내 손목을 힘주어 붙들고는 그 이상 결계에 다가가지 못하게 했다. 그에 겨우 정신이 든 나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들었다.

“너무 가까이 가지 마. 실수로라도 결계 밖으로 나갔다간 호된 꼴을 당할 테니.”

어째서인지 시야도 흐리고, 귓가도 멍한 상태라 한순간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흐릿한 시야로 내 손목을 붙든 커다란 손만 보고는 반사적으로 레이몬드 2황자부터 떠올렸다. 영주성 내에서 내가 어디에 있든 불쑥 나타나던 그의 존재가 어느새 조금 익숙해진 건지도 몰랐다.

“전……!”

최근 며칠간 만나지 못한 것도 있고 해서인지, 반가움이 먼저였다. 나는 무심코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가 눈앞에 선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멈칫 움직임을 멈췄다.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뿌리치듯 리하르트 아델에게 붙잡힌 내 손목을 빼내고는 얼른 거리를 벌렸다.

“일전에도 생각했지만, 그게 도와준 사람한테 보일 표정인가.”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불쾌하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나를 향해 리하르트가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러게 그냥 무시하고 가지 그랬어요. 자꾸 뭐 하러 나 같은 사람에게까지 신경을 쓰시는지 이해가 가질 않네요. 또다시 삐딱하게 받아치고 싶은 마음을 눌러 삼킨 채 나는 무감각한 어조로 답했다.

“죄송합니다.”

감정이 표정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나는 이 사람이 갑자기 내게 왜 이러는지 혼란스럽고, 불안하고, 무서웠다.

이 땅에서 우연히 재회했을 때는 반쯤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던지라, 이 사람에게 화를 내고 소리를 질렀었다. 왜 온 거냐고, 나 같은 건 내버려 두면 되지 않았냐고.

그에 생각지도 못한, 지금 다시 떠올려도 이해가 되지 않는 대답을 듣고 더 혼란스러워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 성의 없고 말도 안 되는 이 남자의 대답에 「혹시나」하고 가슴 한구석에서 역겨운 미련 따위가 고개를 내밀었다.

난 그게 싫었다. 그게 불안하고 무서웠다.

멍청하고 또 멍청한 내가, 또다시 이 남자의 시선과 말 한마디, 손짓 한 번에 휘둘려 속절없이 이끌려가진 않을까 두려웠다.

말을 길게 섞고 싶지 않았기에, 그렇게만 대답하고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그리고 재빨리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가려 했다.

때마침 저 멀리 성기사들에게 둘러싸이다시피 한 성녀 아리아가 시야에 들어온 참이었다.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잠깐 얘기 좀 해.”

하지만 한 발자국도 떼기 전에 다시 팔이 붙잡혔다. 미간을 모으며 놓아달라는 듯 손을 당겼으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감정이 격앙되지 않도록 주의하며 침착하게 답했다.

“저는 공작 각하와 할 말이 없습니다만.”

“저번이랑은 태도가 너무 다르지 않아?”

순간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지 않는 탓이었다. 내게는 그저 잊고 싶을 뿐인 기억을 들추는 그의 말에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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