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11)
내가 원해서 이렇게 된 건 아니지만, 그녀가 충고를 해줬음에도 난 여전히 유리 황녀와의 인연을 완전히 끊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혹시나 성녀가 시온이 있는 앞에서 그때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내가 이 땅에 오기로 한 건 제국에서도 허락한 거거든? 마탑주인 황자하고도 개인적으로 거래, 크흠! 얘기가 된 부분이고.”
성녀의 말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시온이 불쾌한 얼굴로 쏘아붙이듯 말했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실은 저도 오늘부터 바다에 가게 될 거라서요. 혹시 두 분도 가시는 건지 궁금해서요.”
신기한 건 시온이 쭉 그런 태도를 비치는데도 성녀는 전혀 당황하지도, 기분 나빠하지도 않는다는 거였다. 인형처럼 예쁜 미소를 지은 채 담담히 질문에 답하고,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할 뿐.
“……그쪽이?”
시온이 한쪽 눈썹을 찌푸린 채 성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녀의 그 시선에 성기사가 또 한 번 울컥한 듯 미간을 구겼지만, 성녀가 전혀 개의치 않으니 꾹 참는 것 같았다.
“아아, 뭐. 그렇게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성녀의 말을 곱씹으며 뭔가 생각하는 듯하던 시온이 돌연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맞아, 우리도 오늘부터 갈 거야. 레비아탄의 비늘 하나까지도 전부 완벽하게 그릴 수 있을 때까지 관찰할 예정이라.”
그러면서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어깨동무를 해왔는데, 아무래도 「우리」라고 지칭한 게 나까지 포함된 말인 듯했다. 나는 눈에 띄게 굳은 얼굴로 시온을 돌아보았다. 저는 전혀 동의하지 않은 걸로 아는데요, 하는 눈빛으로.
“그렇군요. 그럼 당분간 자주 마주치게 될 것 같은데 잘 부탁드려요.”
성녀는 반갑고 기쁘다는 듯 활짝 웃었다. 그 미소에 시온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성녀는, 꼭 그때의 일을 잊은 것처럼 보였다. 나와 대화를 나눴던 날도, 내게 진지하게 충고를 해줬던 기억도, 전부 잊은 것처럼 웃고 있었다.
지금은 그때와 달리 시온이 있다고 쳐도, 너무 아무렇지 않게 다가와 말을 걸고 있어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저는 준비할 게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조금 있다 봬요.”
성녀는 한결같이 예쁜 미소를 짓고서 인사를 건네고는 몸을 돌렸다. 시온은 물론, 내게도 웃는 낯으로 눈인사를 건넨 후 돌아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자, 그럼 우리도 가야지? 어?”
그런 성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충동적으로 발을 움직였다. 시온을 뒤로한 채 달려가 성녀의 팔을 붙잡았다. 아니, 중간에 그걸 눈치챈 성기사가 성녀에게 닿기 전에 내 손을 쳐냈기에 목적을 다 이룰 순 없었다.
“……헤더 영애?”
그래도 성녀를 멈춰 세워 나를 돌아보게 할 순 있었다. 기척을 느낀 그녀가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막상 그녀를 멈춰 세우고는 머릿속이 새하얘져 잠시 허둥댔다.
지금 뭐하는 거냐고 따져 묻는 듯한 성기사의 매서운 시선과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성녀의 미소 앞에서 나는 주먹을 한 번 꾹 움켜쥐었다 풀었다.
“잠깐……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그리고 겨우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다.
* * *
“시간이 많지는 않아서, 되도록 짧게 말해줄 수 있을까요.”
비어있는 응접실 안, 그녀를 따르던 성기사와 시온은 문 너머에 남겨둔 채 둘만 되자마자 성녀가 옅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묘하게 냉기가 감도는 어조에 나는 살짝 움츠러든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나는 왠지 그녀가 화를 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가 잘못한 게 있어 제 발을 지리는 건지는 몰라도 나는 잔뜩 긴장한 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미안하지만 정말 시간이…….”
“저번에 제게 해주셨던 이야기들이요.”
성녀와 나는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성녀가 나를 향해 먼저 말하는 듯 눈짓했다. 나는 안절부절못하는 손으로 치마를 꼭 움켜쥔 채 조금 더 용기를 냈다.
“무시한 게 아니에요.”
성녀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알겠다는 듯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힘없이 미소 짓는 그녀를 보며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저도 피하고 싶었어요. 그분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나 하나만 사라지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황성에서도 나온 거였고. 정말 두 번 다시 연관되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마치 그녀에게 고해성사라도 하듯 내 마음을 털어놓는 목소리가 점점 작아져 갔다. 내가 듣기에도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말들이, 부끄럽고 미안했다.
“결국 이렇게 됐어요.”
기껏 충고까지 해줬더니 아직까지 유리 황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내 모습이, 그녀가 보기에 얼마나 한심할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저는 이제…… 어떡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그럼에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불안하고,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어서, 누군가에게라도 기대고 싶었다.
나는 황성에서 만났던 그녀를 떠올렸다. 알렌 4황자 함께 길을 잃은 내게 잠시 비를 피해가라며 손을 내밀어주고, 예지의 힘을 빌어 나와 유리 황녀가 다치지 않길 바랐던 그녀의 상냥함을 기억했다.
“모르겠다라.”
그래서 이번에도 나는 그녀가 나를 도와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러면, 그냥…….”
리하르트 아델에 대한 감정이나 그녀와의 미묘한 관계 같은 건 제쳐두고, 그때처럼 또 한 번 그녀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주길 바랐다.
더없이 한심하고 멍청하게도.
“영애가 죽어버리는 게 어때요?”
성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처음 대화를 나눴을 때와 마찬가지로 상냥하고 친절한 미소를 띤 채 내게 말했다.
“그게 모든 게 순리대로 돌아갈 유일한 방법이니까.”
나는 숨을 멈추고, 눈도 깜빡이지 않고서 그녀의 청색 눈동자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푸른 바다처럼 깊고, 하늘처럼 드높으며, 얼음으로 만든 창처럼 차갑고 예리하게 빛나는 눈동자를.
똑똑똑.
“아리아님.”
때맞춰 들려온 노크 소리와 그녀를 기다리는 성기사의 재촉이 침묵을 깼다.
무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던 성녀가 언제 그랬냐는 듯 방긋방긋 웃었다.
“이제 정말 가봐야 해요.”
그러고는 나와는 시선도 맞추지 않고 몸을 돌려 문가로 걸어갔다. 사라락, 그녀가 걸을 때마다 긴 치맛자락이 바닥에 쓸려 소리를 냈다.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기 직전, 그녀가 그제야 나를 돌아보았다. 쉿 하고 비밀이라는 듯 손가락을 입가에 대며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그건 농담이었어요.”
거의 입모양만으로 알아들은 말을 남긴 후 그녀가 방을 나섰다.
쿵. 문이 닫혔고, 나는 시온이 나를 찾으러 올 때까지 그 후로 한참을 성녀가 서 있던 자리를 바라보기만 했다.
내게 네가 죽는 것만이 모든 게 제자리를 되찾을 방법이라 말하고, 농담이라며 웃던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 * *
“어이.”
차갑게 뇌까리는 성녀의 음성을 듣는 순간,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여자분의 운명의 별이 머지않아 꺼지게 되는 걸로 보여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머릿속에 떠오른 건 엉터리라고 여겼던 집시 여인의 예언이었다.
“이봐.”
―별의 빛이 꺼진다는 건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지만…….
나와 레이몬드 2황자의 눈치를 살피며 어렵게, 어렵게 입을 연 그녀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저기요.”
―대부분은 그 사람의 죽음을 의미해요.
엉터리라고 여겼었고, 그때 당시엔 나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감흥도 받지 못했던 걸로 기억한다.
슬프지도 두렵지도 충격을 받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지금은 그때 그녀가 했던 말들이, 불안하게 나를 바라보던 눈빛이 잊히질 않았다.
―그러면, 그냥…….
집시 여인과 달리 그 사람은 미안함도, 불안해하는 시선도 없었다.
너무도 차갑게 나를 응시하던 청색 눈동자 앞에서 온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영애가 죽어버리는 게 어때요?
너라는 존재 자체가 견딜 수 없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새하얀 캔버스 위에 원치 않게 튄 오점처럼.
―그게 모든 게 순리대로 돌아갈 유일한 방법이니까.
“클레어!”
먹먹하던 귓가로 시온의 날카로운 음성이 훅 파고들었다.
“아.”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하던 정신이 돌아오며 나는 힘없이 눈을 깜빡였다. 그 상태로 정면을 바라보니 시온이 턱을 괸 채 못마땅한 시선으로 날 응시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지금 뭐라고 하셨…….”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녀는 미안해하는 나를 보며 표정을 조금 풀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렇게 넋을 놓고 있어? 정신 좀 차려봐.”
“죄송해요…….”
“두 번이나 죄송할 것까진 없고. 저기 봐, 이제 곧 도착할 거야.”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못마땅한 얼굴을 하던 시온이 창밖을 가리켰다. 부드럽게 굴러가는 마차 안에서 나는 그녀의 손을 따라 시선을 가져갔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 이내 아연한 얼굴을 했다.
점점 짙어지는 지독한 악취가 먼저, 뒤이어 나락의 끝자락과 같은 끔찍한 풍경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이미 한 번 경험한 적이 있는 풍경임에도, 진저리가 쳐지는 기괴한 모습들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몸을 움츠리게 된다.
돔 형태의 거대한 결계 너머로 수십, 수백은 되는 마물들이 달라붙어 몸뚱이를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어떤 것은 비명을 지르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한 모양새였고, 또 어떤 것은 당장이라도 결계를 무너뜨릴 것처럼 긴 손톱과 날카로운 송곳니로 투명한 벽을 긁고 있었다. 그리고 또 어떤 것은 기이한 웃음을 지은 채 다른 마물들을 짓밟고 결계를 타고 올라서고 있었다. 개중에는 그 마물들에 짓밟혀 짜부라지고 터지고 부서져 검푸른색의 피를 쏟는 것들도 있었다.
운 나쁘게 그 장면을 그대로 목격한 나는 윽, 신음을 흘리며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런다고 이미 본 것들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진 않지만.
“장관이지?”
그런 나를 보며 시온이 킬킬 웃었다.
“잘 봐둬, 분명 쟤네들도 그릴 일이 있을 테니까.”
그러고는 또다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그녀의 말에 전혀 동의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저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치미는 것들을 내 손으로 그리게 될 날은 없을 것 같았다. 애초에 저런 것들을 굳이 그림으로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없을 테고.
나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겨우 다시 고개를 들었다. 마차의 창문 너머로 스쳐 가는 마물들에 너무 시선을 주지 않으려 애쓰며 심호흡을 했다.
억지로 끌려온 게 아니라 내가 오고 싶어 한 거니까, 내가 필요해서 시온에게 부탁한 거니까. 싫어도 이 상황을 참고 견뎌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