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10)
“방까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어느샌가 곁에 다가온 하녀가 공손히 말을 건네왔고, 그녀를 따라 다시 내가 머무는 방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밤이 늦어 혼자 간단히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에도. 온통 머릿속에는 레이몬드 2황자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한 물음표와 오갈데 없는 원망의 감정만이 가득 차 있었다.
내 뺨에 입을 맞추며 다정하게 웃던 그와 성녀와 마주 끌어안고 있던 그의 뒷모습이 나란히 떠올라,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성녀에게도 똑같이, 혹은 더 다정하게 웃어줬겠지, 성녀에게도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입 맞췄겠지, 그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점점 더 기분이 나빠졌다.
나한테는 굳이 그럴 필요 없을 텐데, 왜 굳이 나한테까지 그래서 사람을 심란하게 만드는지, 그래서 잠들지도 못하게 만드는 건지.
자꾸만 그가 내 뺨에 입을 맞췄을 때의 감촉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감촉을 지우려 몇 번이고 세게 뺨을 문질렀다. 그로 인해 피부가 울긋불긋 물들고 보기 싫게 부어오르는 걸 알면서도 뺨을 문지르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 날밤, 결국 나는 한숨도 잠들지 못하고 밤을 하얗게 지새워야 했다.
* * *
“너 얼굴이 왜 이래? 누가 때렸어?”
아, 역시. 그냥 넘어가긴 힘든 얼굴이구나.
다음 날 아침부터 불쑥 찾아온 시온이 내 얼굴을 보곤 따지듯 물어왔다. 눈 뜨자마자 확인한 내 얼굴이 형편없다는 걸 나도 알고는 있었기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막상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오니 뭐라고 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거울 속의 나는 왼쪽 뺨만 퉁퉁 붓고 피부가 쓸려 빨갛다 못해 피멍처럼 퍼런 자국이 남아있었다. 뺨에 입맞춤을 당한 게 아니라, 뺨을 얻어맞았다고 하는 쪽이 훨씬 신뢰가 가는 몰골이었다.
나는 부디 그녀가 내 말을 믿고 넘어가 주길 바라며 더듬더듬 대답을 내어놓았다.
“그, 어제 살짝 부딪쳤어요.”
“누구 주먹에 살짝 부딪혔는데?”
“그게 아니라…… 그냥 넋 놓고 걷다가 벽에 이렇게 쿵하고.”
“사람하고 쿵한 게 아니고?”
시온이 대충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 눈을 부릅뜨며 말을 받아쳐 왔다.
적당히 넘어가 줄 줄 알았던 시온이 생각보다 집요하게 캐 물어오는 바람에 나는 둘러댈 말을 잃고 허둥댔다.
“누가 때렸냐니까? 혹시 그때 그놈이야? 그 얼굴만 번지르르한 재수 없는 놈!”
그녀가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들은 나는 순간 데자뷔 같은 것을 느꼈다.
나는 누가 들어도 어색한 거짓말을 멈추고, 가만히 시온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묘하게 그녀가 유리 황녀와 닮은 것 같다고 느끼긴 했었다. 외모는 전혀 다르지만, 시원시원한 말투와 언제나 당당한 행동거지, 처음부터 이상할 정도로 내게는 친절한 태도 같은 것들이 그랬다.
지금 내 뺨을 보고서 잔뜩 흥분해 누가 때렸냐고 소리를 질러대는 그녀의 모습이 꼭, 처음 황성에 들어갔을 때를 똑같이 연상시켰다. 그때 유리 황녀도 내게 누가 때렸느냐고 따져 묻다 마지막엔 리하르트 아델의 이름을 언급했었다.
문득 그 사람에게 조금 미안한 감정도 들었다. 내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결국 그는 두 명의 여성분들에게 여자를 때리는 최악의 인간으로 여겨지고 있었으니까.
의외로 그런 쪽으로는 무척 엄격해서, 자기보다 약한 존재를 무력으로 억누르는 인간은 살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아니에요. 이건 정말 제가 실수로 부딪쳐서 생긴 거예요.”
자꾸 웃음이 나와서 손등으로 입가를 슬쩍 가린 채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시온은 웃음기 가득한 어조로 대답하는 나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들여다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콧김을 훅 내뿜었다.
“……진짠가?”하고 작게 중얼거리는 걸로 봐선 약간 긴가민가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럼 들어 봐. 내가 어제 드디어 상급 개체 하나를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봤거든!”
시온은 잔뜩 신이 나 있었다. 보기 드물게 방방 뛰며 눈을 반짝거리는 게 어린아이처럼 즐거워 보였다. 그래서 차마 그걸 굳이 왜 봤냐고 묻진 못하고 그녀가 침을 튀겨가며 늘어놓는 말들을 경청했다.
“마탑의 그 괴짜들이 대단하긴 하더라고. 아니, 대단한 건 그 황자인가. 갑자기 찾아왔을 때는 뭔가 싶었는데…… 어쨌든 덕분에 엄청난 걸 봤다니까!”
황자라면, 레이몬드 2황자를 말하는 건가.
그를 언급할 때는 잠시 멈칫하며 슬쩍 내 눈치를 보던 그녀는 그때의 상황을 다시 떠올린 듯 흥분에 차 움켜쥔 양손을 부르르 떨었다.
“레비아탄! 마물들의 왕, 그 오만한 천족들마저 벌벌 떨게 했다는 흉포한 괴물이 「문」을 헤집고 기어 나와선 거의 뭍에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왔었어. 실드 때문인지, 「문」의 제약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이상은 접근하진 못하고 금세 문 너머로 자취를 감추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대단했어. 수천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오로지 역사서와 신전의 벽화에서나 보던 신화 속의 마물들 중 하나를 직접 내 눈으로 본 거니까.”
그녀는 한참 동안 자신이 직접 눈으로 본 상급 개체의 기괴하고 끔찍한 외형과 그보다 더 끔찍했던 악취, 끊임없이 울려 퍼지던 비명과 같은 울음소리 등을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솔직히 말하면 신화 속의 괴물에 대해 관심도 없고, 그에 대해 그렇게까지 자세히 알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무척이나 들뜨고 즐거워 보이는 그녀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나는 애써 관심 있는 척 열심히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엄청 좋은 게 나올 것 같아. 아니, 아니다. 나왔을지도 모르겠다……라고 해야 하나.”
신나게 말을 이어가다 또다시 그녀가 조금 멈칫하는 기색을 보였다. 억울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슬퍼하는 것 같기도 한 표정이 아주 잠깐 드러났다 이내 사라졌다.
알게 된 시간이 길지는 않지만, 늘 자신만만하고 거침없이 말하고 행동하는 그녀에게선 본 적 없는 가라앉은 분위기에 나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그래서 말인데, 오늘은 너도 같이 가지 않을래?”
그녀가 흐릿하게 중얼거린 혼잣말이 무슨 의미일까 고민해봤지만 딱히 내가 답을 찾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닌 듯해 조용히 침묵만 지키고 있을 때였다.
“아니, 꼭 가야 해.”
갑자기 시온이 레비아탄에 대해 이야기할 때처럼 과하게 눈동자를 반짝이며 외쳤다. 내 양손을 꼭 붙들고선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한 그녀에게 나는 떨떠름한 시선을 던졌다.
“어딜요?”
“「문」에.”
어, 그러니까 지금 나한테 30분이 넘게 장황하게 설명해줬던 그 무시무시한 괴물을 만나러 같이 가자고 한 게 맞나?
나는 그녀가 지금 농담을 건네고 있는 것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그녀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한없이 진지한 눈동자가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해오고 있었다.
나는 내게 갑자기 왜 이러냐는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제가…… 왜요?”
“너도 봐둬야 할 것 같아서.”
“아니, 그러니까 제가 왜…….”
“가자, 너도 꼭 봐둬야 해.”
시온이 벌떡 일어나더니 내 손을 쭉 잡아당겼다. 그녀는 작은 체구에 비해 상당한 팔 힘의 소유자였다. 순식간에 나를 강제로 일으켜 세우고는 문가로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시, 싫어요, 싫어요. 저는 마물 같은 거에 관심 없어요.”
이대로는 정말 바다에서 기어 올라오는 마물들의 코앞까지 끌려갈 것 같았다. 나는 그녀가 문을 활짝 열고 방을 나가려는 찰나 문고리를 힘주어 붙들고 버텼다.
“어, 어?”
내가 이렇게 강하게 싫다는 의사를 내비치는 것에 시온도 꽤 당황한 것 같았다. 그녀는 문고리를 꼭 붙들고 버티는 나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더니, 금세 다시 내 팔을 힘껏 당기며 강한 어조로 외쳤다.
“가자, 가야 해. 네가 꼭 봐둬야 해서 그래!”
문득 유리 황녀가 어른이 되면 이런 느낌일까 싶을 만큼 막무가내인 시온의 행동에 나는 질린 얼굴로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싫어요, 제가 그 괴물을 봐야 하는 이유가 뭔가요!”
“그야 어쩌면 네가……!”
필사적으로 버티고 선 내게 시온이 답답하다는 듯 뭔가를 외치려다 입을 급히 다물었다. 그러고는 진지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나직이 질문을 던져왔다.
“너, 네 그림을 그리고 싶다며?”
한껏 낮아진 목소리가 오히려 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힘이 있었다. 머뭇거리며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자 시온이 진지한 눈동자로 말을 이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있어 제일 중요한 게 보다 더 많은 걸 보고 듣고 느끼고 상상하는 거야. 남들은 보지 못하는 것까지 보고 또 보고 눈에 새겨넣어 두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알겠어?”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평화롭게 지내고 있던 나를, 굳이 그 위험한 곳에 억지로 데려가려는 행동까지 납득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나는 그녀의 눈을 피하고선 버벅거리며 어떻게든 신화 속 괴물을 코앞에서 마주하는 불행을 피하고자 애썼다.
“그, 그렇다고 그런 무시무시한 괴물까지 보러 갈 필요는…….”
“괴물이요?”
불쑥 들려온 목소리는 호기심에 가득 차 있으면서도 상냥했다. 갑자기 끼어든 낯선 음성에 시온의 움직임이 멎었다. 나 또한 그녀를 따라 고개를 돌려 상대를 바라보았다.
나와 시온의 시선을 동시에 받게 된 성녀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혹시 바다에 가시려는 거예요?”
어, 뭐야.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시온이 당황해선 주춤했다. 전혀 예상에 없던 인물이 갑자기 다가와 아는 척을 하자 그녀로선 보기 드물게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아, 저는 아리아라고 해요.”
“그거야…… 당연히 알지.”
태연히 자기소개를 하는 성녀에게 시온이 불편한 태도를 내비치며 삐딱하게 답했다. 그에 성녀의 뒤에 조용히 시립하고 있던 성기사가 험악하게 얼굴을 구기며 앞으로 나섰다.
“성녀께 예를 갖추십시오.”
“전 괜찮아요, 그러지 마세요.”
성녀가 재빨리 나서서 남자를 만류했고, 잠시 시온과 성기사 사이에 눈싸움이 오가다 남자가 먼저 시선을 내리며 뒤로 물러났다.
“무슨 여신처럼 떠받들고 있네. 그래봤자 같은 인간인데.”
시온은 남자를 못마땅한 듯 노려보다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작게 속삭였다. 나는 그녀의 말에 뭐라 답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데 그 대단한 성녀께서 우리처럼 미천한 사람들에게는 무슨 볼일이신지?”
“아, 지나가다 본의 아니게 대화를 엿듣게 됐는데……. 바다로 가신다고 한 같아서 끼어들고 말았어요.”
시온이 팔짱을 낀 채 빈정거리듯 던진 질문에도 성녀는 싫은 기색 없이 생글생글 웃으며 답했다. 그러면서 슬쩍 내게로 시선을 옮겨오는데, 마지막으로 그녀와 얘기를 나눴던 때가 생각나 반사적으로 성녀의 시선을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