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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9) (72/152)

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9)

진지하게 제 말을 들어주는 레이몬드 2황자가 마음에 들었던지, 그녀가 쥐고 있던 구슬들을 우리에게 가져도 좋다며 건네왔다.

신경을 써주는 듯한데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우리는 감사의 인사를 하며 각자의 구슬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하나 더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 말씀드리고 싶은데.”

그러고는 그녀가 할 말이 더 남은 얼굴로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냥 저희 일족에게 전해지는 전통점이니까, 너무 맹신하지는 않으셔도 되지만.”

이번엔 정말로 꺼내기 어려운 말인지, 여자는 조금 불안한 얼굴로 나와 레이몬드 2황자의 눈치를 살폈다.

“여자분의 운명의 별이 머지않아 꺼지게 되는 걸로 보여요. 별의 빛이 꺼진다는 건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지만…….”

그리고 다음 말은 차마 꺼내기 힘든 듯 말끝을 흐렸다. 몇 번 입을 벙긋거리다 꾹 닫아버리는 그녀를 보며, 레이몬드 2황자가 상대를 편안하게 만드는 미소와 함께 말했다.

“솔직하게 말씀해주셔도 됩니다.”

무슨 말이든 괜찮으니 말해 달라는 그의 태도에 겨우 결심을 굳힌 듯 여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부분은 그 사람의 죽음을 의미해요.”

여자의 말이 끝났음에도 이번엔 레이몬드 2황자가 “그렇군요.”하고 담담하게 답하지 않았다. 그는 무표정하게 여자의 말을 생각하는 듯했고, 나 또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머지않아 죽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그녀의 말이 쉽게 믿기지 않기도 했지만, 실제로 그렇다 하더라도 딱히 슬프다거나 두렵다는 감정이 들진 않았던 탓이다.

나의 죽음이라니, 아직은 너무 까마득하고 너무 아득한 일처럼 느껴져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는 쪽이 정확하리라.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우리를 대신해, 도리어 얌전히 책을 읽고 있던 미야가 놀란 눈으로 이쪽을 돌아보는 게 느껴졌다.

우우웅.

한참 전부터 여자의 말소리에 섞여 묘한 울림이 들린다고 생각은 했었다. 무심코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찾다 보니 레이몬드 2황자에게 시선이 가 닿았다. 그의 상의 안쪽 주머니에서 우웅 하는 진동과 함께 희미한 푸른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내가 눈치챈 걸 안 레이몬드 2황자가 살짝 난감한 얼굴을 하며 주머니에 손을 푹 꽂아 넣었다. 나는 그 푸른빛이 항상 그가 누군가로부터 호출을 받을 때마다 울리던 마력구로부터 새어 나오는 것이라는 걸 단숨에 알아챘다.

고작 그것만 봤을 뿐인데도 나는 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눈을 크게 떴다.

“오늘…… 휴가받으신 거 아닌 거죠?”

설마 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으니 레이몬드 2황자가 슬쩍 내 눈을 피했다.

“받긴 받았어요. 하루를 통째로는 아니었지만.”

그 말은 그는 오늘도 바쁜 사람이었고, 벌써 제 할 일을 하러 갔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나와 하릴없이 연인점 같은 걸 보고 있을 게 아니라.

“빠, 빨리 돌아가요.”

작게 투덜거리듯 내뱉는 그의 말에 나는 아연한 얼굴을 하며 다급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레이몬드 2황자에게도 어서 일어나시라 재촉 섞인 시선을 던지자 그가 마지못해 일어서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와중에 그는 여자에게 받은 구슬을 주머니에 느긋하게 챙겨넣고 있었다.

“가기 싫은데.”

“마차, 마차를 잡아 올게요.”

한없이 여유로운 그와 달리 나는 마음이 바빠졌다. 먼저 축제에 가자고 제안한 건 레이몬드 2황자라는 사실도 잊은 채 괜히 나 때문에, 내가 이 사람을 독점하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머, 이렇게 많이 주시면 안 돼요.”

“아뇨, 걸맞은 금액을 지불한 겁니다. 부담 갖지 마십시오.”

나는 계속 문가만 돌아보며 발을 동동 구르는데, 레이몬드 2황자는 급한 기색도 없이 여자에게 금화 3개를 건네며 친절하게 웃었다. 여자가 미안해하며 다시 돈을 돌려주려 하자 단호히 손을 내밀어 거절했다.

“언니, 오빠. 잘 가요.”

“오늘 고마웠어. 덕분에 새로운 추억이 생겼네.”

그는 여자아이와도 다정하게 작별 인사를 주고받고는 여전히 느긋한 발걸음으로 모녀의 집을 나섰다.

나는 문 앞까지 나와 우리를 배웅하는 두 사람에게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는 바삐 걸음을 옮겼다. 혼자 허둥대며 광장 쪽으로 걸어 나가려는 나를, 그가 부드럽게 잡아챘다.

“이쪽이에요.”

그는 발을 동동 구르는 내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쿡쿡 웃으며 느리게 내 손을 당겼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마차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게 보였다.

“전하, 빨리요.”

하지만 마음이 바쁜 나와 달리 레이몬드 2황자는 일부러 더 그러는 것처럼 느릿느릿 걸었다. 그에 답답해진 나는 그의 손을 꼭 붙들고서 걸음을 빨리했다. 앞서 걸으며 재촉하듯 그를 돌아보자 잠시 멍한 얼굴로 나를 빤히 응시하던 그가 내 손을 마주 꼭 붙들어왔다.

“의외로 이런 것도 좋네요.”

그러고는 조금 의미 불명의 말을 내뱉으며 걸음을 빨리해 나와 속도를 맞춰왔다.

우리는 거의 뛰듯이 걸어가 늘어선 마차 중 가장 앞에 있던 마차로 다가갔다. 마부에게 목적지를 말하고 돈을 건네줄 때 마부가 우리 얼굴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살피던 것만 제외하면, 우리는 별탈 없이 무사히 영주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전하!”

레이몬드 2황자의 얼굴을 드러내는 것으로 통행증을 대신하고 영주성의 입구를 지나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나이가 제법 있어 보이는 남자가 창백한 얼굴로 구르듯 달려왔다.

절박하게 레이몬드 2황자를 부르는 남자는 광장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내 모습과 너무 흡사해서 나도 모르게 짠한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지금까지 어디 계셨던 겁니까? 어째서 저희 쪽 연락을 계속 받지 않으신 겁니까? 하루종일 레스티아님께서 얼마나……!”

“알았어, 알았어. 가서 들을 테니까 그만해.”

레이몬드 2황자는 다가오는 남자를 귀찮다는 손짓으로 저지하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노골적인 그 태도에 남자도 움찔하고는 답답한 듯 발을 동동 굴렀다. 나는 아무래도 광장에서 내가 저러고 있었던 것 틀림없다고 여기며 남자를 향해 안타까운 시선을 보냈다.

“게다가 또 호위도 없이 나가셨지 않습니까. 진정 제가 쓰러지는 걸 보고 싶으십니까.”

“어차피 나한텐 별 의미가 없어서.”

레이몬드 2황자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답했다. 그 모습에 남자가 이마를 짚었다.

“일단은…… 빨리 와주셔야 합니다. 레스티아님도 이제 한계십니다.”

남자는 상대가 제대로 들어주지도 않을 잔소리는 포기한 듯 한숨을 짧게 내쉬며 말했다.

남자의 재촉에 레이몬드 2황자는 모른 척 그를 외면하듯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뭘 본 건지 잠깐 멈칫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계속 레이몬드 2황자의 눈치만 살피고 있던 나는 그의 금색 눈동자가 일순간 차갑게 가라앉으며 구겨지는 걸 보았다.

한순간에 변한 그의 싸늘한 표정에 놀란 나는 시선을 떨어뜨리며 그로부터 살짝 몸을 물렸다. 다음 순간, 레이몬드 2황자의 시선이 내게 와닿은 것이 느껴졌다. 내가 갑자기 왜 그러는지 아는 것처럼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는 듯 그의 손이 뻗어와 다정하게 내 손을 붙잡아왔다.

보는 눈이 많음에 당황해 고개를 드니 그는 어느새 평소와 같은 얼굴로 미소 지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안해요, 클레어. 또 일하러 끌려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아, 네, 하고 조금 허둥대며 답하니 그가 다시 짧게 웃음을 흘렸다.

그럼 나는 이제 다시 내 방으로 돌아가야지. 나는 오늘 하루 내내 봐온 덕분에 이제는 조금 내성이 생긴 듯한 그의 웃는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며 그에게 붙잡힌 손을 빼내려 했다.

그런데 그런 내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던 레이몬드 2황자가 내 손을 놓아주지 않고 오히려 제 쪽으로 더 깊이 당겼다. 그가 당기는 대로 힘없이 움직인 나는 순간 내 뺨에 와 닿는 부드러운 감촉에 흠칫 몸을 굳혔다.

실제로는 몇 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겠지만, 내게는 뺨을 가볍게 내리누르던 입술이 떨어지기까지가 한참이 걸린 것 같았다.

“데이트는 다음에 이어서 해요.”

그대로 넋이 나가 굳어버린 내게 레이몬드 2황자가 그 예쁜 미소처럼 녹아내릴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만,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모양새만 그러했고, 목소리는 전혀 작지 않아서 아마 다른 사람들에게도 충분히 들리고도 남았을 듯했다.

그는 그 상태로 내 손을 잡고는 계속 시선을 맞춰왔다. 왠지 대답을 바라는 것 같아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럼 나중에 봐요.”

그제야 그가 만족했다는 듯 웃으며 내 뺨을 매만지다 돌아섰다. 마지막까지 남들 보란 듯이 지나치게 친밀하고 애정이 깃든 스킨십이었다.

겨우 돌아서는 표정이나 손길에서도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 다른 이가 보기엔 정말 그가 약혼녀인 나를 사랑해 마지않는 것처럼 보일 게 분명했다. 한시가 급하다며 그를 재촉하던 남자가 믿기 힘들다는 눈으로 나와 레이몬드 2황자를 번갈아 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웃긴 건 나도 그 남자와 똑같은 얼굴로 레이몬드 2황자를 쳐다보고 있다는 거였다. 몇 걸음 걸어가다 다시 내 쪽을 돌아보며 손을 살랑살랑 흔들어 보이는 그를, 나는 황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저 사람이 지금 나한테 뭘 한 거지. 방금 그게 내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그거 맞나. 아니, 무슨 생각으로 나한테 그런 거지.

일부러 저 사람들이 보라고 그런 건가? 자길 데리러 온 부하에게, 어느새 우르르 몰려온 다른 기사들과 우연히 길을 지나던 영주성의 하인들에게?

‘정말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요?’

그에게 범인인 나로서는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는 깊은 생각이 있겠거니 여기려고 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단순히 우리가 약혼 관계라는 걸 의심받지 않기 위해서라고 해도 이건 너무 과하지 않은가.

아무리 그래도, 정말, 아무리 그래도…… 뺨에 입을 맞출 필요는 없지 않은가.

무심코 방금 전의 일을 다시 떠올린 나는 뒤늦게 얼굴을 붉히며 손등으로 뺨을 문질렀다. 순식간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의 입술이, 손이 닿았던 곳들이 타는 듯이 뜨거웠다. 순간적으로 가까워졌던 근사한 얼굴이라든가, 귓가에 닿았던 낮은 목소리와 숨결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이제 레이몬드 2황자도 갔으니 나도 알아서 내가 머물고 있는 방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계속 여기 멀거니 서서 구경거리가 될 필요는 없는데.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할 만큼 레이몬드 2황자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휘둘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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