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8)
“어머.”
여자아이를 따라 밖으로 나왔던 여자가 우리를 발견하곤 멈칫했다. 여자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며 머쓱하게 웃더니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애가 자꾸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서.”
단정하게 땋아 내린 검은 머리칼에 선한 눈동자가 인상적인 여자는 누가 봐도 여자아이의 부모라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꼭 닮은 외모를 갖고 있었다.
그녀는 우리 뒤에 숨어있던 제 딸아이의 팔을 당겨 제 옆으로 오게 하고는 미안함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혹시 이 애가 배고픈데 빵을 사 먹을 돈도 없다면서 우는 척을 하거나 집에 아픈 할아버지가 있는데 약값이 없다며 거짓말을 했나요?”
“아, 아니에요! 이번엔 진짜 그냥 정직하게 말해서 모셔온 거예요.”
전적이 있는 듯 여자아이의 강한 부정에도 여자는 의심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여자아이가 의심을 받고 혼이 나고 있는 상황인데도, 모녀는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어느새 두 사람이 마주 꼭 잡고 있는 손이라든가, 여자가 은연중에 아이를 보호하듯 살짝 제 뒤에 세운다든가 하는 행동이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나는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종류의 관계와 서로를 향한 애정이 부럽기도 했다.
“미야의 말이 맞아요. 연인점도 봐주신다는 얘길 듣고 찾아왔어요.”
멍하니 모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나를 대신해, 레이몬드 2황자가 나서서 여자아이를 두둔해주었다. 한 번 들은 아이의 이름을 그새 기억하고 다정하게 불러주는 게 그답다고 생각했다.
연인점을 보러왔다는 말에 여자가 제 딸아이를 향한 엄한 시선을 거둔 채 어머머 하고 한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그러고는 우리를 번갈아 바라보는데, 그 시선이 처음 우리에게 다가왔을 때 여자아이가 보여줬던 표정과 비슷했다.
여자의 시선이 내게 향했을 때는 곤란한 듯 레이몬드 2황자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아마 미야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적당히 그렇게 말한 것 같은데, 굳이 상관도 없는 사람에게까지 우리가 연인이라고 인식시킬 필요가 있나 싶었다.
“일단 들어오세요. 진짜 손님이신 줄도 모르고 제가 너무 오래 세워뒀네요.”
여자는 친절하게 말을 건네고 여자아이와 함께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를 따라 나와 레이몬드 2황자도 걸음을 옮겼다. 여자와 아이가 사는 집은 작고 낡았지만 내부가 무척 아늑하고 아기자기한 느낌으로 꾸며져 있었다. 모녀와 꼭 닮은 집의 분위기가 조금은 기분을 편안하게 만들어줬다.
레이몬드 2황자는 집안에 들어서면서 답답한 듯 후드를 휙 벗었다. 그 모습에 모녀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또다시 어머머 하고 짧게 외쳤다.
레이몬드 2황자의 수려한 외모를 자주 봐왔던 나조차도 그가 후드를 벗자 한순간 집 내부가 환하게 밝아지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으니, 저 두 사람이 저렇게 넋이 나간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후드를 쓰고 있을 때도 멋진 분일 거라 예상은 했지만, 상상 이상으로 굉장한 미남이셨네요.”
여자가 솔직하게 그의 뛰어난 외모에 대해 솔직하게 감탄하자, 레이몬드 2황자는 늘 듣던 말이라 익숙한 듯 민망한 기색도 없이 “감사합니다.”하고 대답했다. 그 초연하고 담담한 태도가 왠지 더 근사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두 분의 점을 봐 드릴게요. 여기 잠깐 앉아주세요.”
여자는 낡은 테이블 앞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작은 테이블에는 세 개의 의자가 있었고, 미야를 제외한 세 사람이 하나씩 의자에 둘러앉았다.
슬쩍 눈동자를 굴려 보니 레이몬드 2황자는 이 상황 자체가 꽤 흥미진진한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를 잠시 힐끔거리다 다시 여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여자는 어딘가에서 꺼내온 주머니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다시 색색의 구슬 같은 것을 꺼내어 순서대로 내려놓았다.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색색의 구슬에 시선을 빼앗겨 있는데, 나를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구슬을 전부 꺼내어놓은 여자가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무심코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하고 쓰다듬으려 했으나 손끝에 후드가 턱 걸렸다.
“이쪽 분도 잠깐 눈을 볼 수 있을까요.”
후드 밑에 가려진 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으니 여자가 살짝 곤란한 듯한 얼굴로 말했다.
얼굴도 꼭 봐야 하는 건가. 나는 조금 내키지 않아 머뭇거리다 후드를 당겨 벗었다. 또다시 어머머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의 시선이 꼼꼼하게 내 얼굴을 훑어내리는 게 느껴졌다.
“두 분 다 정말 미남미녀시네요.”
레이몬드 2황자에 비하면 나는 한없이 평범에 가까운 외모인지라, 나는 여자의 의례적인 칭찬에 민망해져 시선을 테이블 끝에 두었다.
“감사합니다.”
대답은 이번에도 레이몬드 2황자가 대신해주었다. 그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있었는데, 나는 새삼 그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이번엔 여기 있는 구슬 중에 마음에 드는 걸 하나씩 골라주시겠어요? 두 분이 똑같은 게 마음에 드시면 그렇게 고르셔도 돼요.”
여자의 말에 나와 레이몬드 2황자는 바로 시선을 내려 테이블 위에 있는 구슬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예쁜 하늘색의 유독 반짝거리는 구슬이 있는가 하면, 손대는 것도 꺼려질 만큼 까맣고 지저분해 보이는 구슬까지. 다양한 형태와 색의 구슬들이 테이블 위에 가득했다.
나는 조금 진지해져선 신중하게 구슬을 살피다 제일 처음에 눈에 들어온 구슬을 집어 들었다. 예쁜 하늘색의 유독 반짝거리는 구슬이었다. 많은 구슬들 중 제일 눈에 띄고, 제일 예쁜 구슬이었다.
그런 나와 반대로 레이몬드 2황자는 딱히 고민을 하지도 않고 그중 제일 평범한 구슬을 골랐다. 유독 작고, 밋밋하고, 평범한 갈색 구슬이었다. 레이몬드 2황자가 집어들기 전에는 있는지조차 몰랐을 만큼 존재감이 없는.
여자는 그런 나와 레이몬드 2황자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결과를 알려드리자면.”
내가 조금 늦게 구슬을 골라 건네주자, 여자는 우리가 고른 구슬을 돌려받더니 왠지 즐거워하며 후후 웃었다.
“일단 남자분이 여자분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하시겠네요.”
안타깝다는 어조와 달리 레이몬드 2황자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나는 그런 여자를 보며 살짝 맥이 탁 풀렸다.
점을 보는 것도, 집시를 만나는 것도 처음이라 내심 기대를 했었던 나였다. 옛날부터 집시들에겐 특별하고 신비로운 힘이 있다고 하여 실제로 그들이 말한 미래가 정확히 들어맞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건국신화의 대현자 루셀도 결코 집시들의 말을 허투루 들어 넘기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막상 그녀가 꺼낸 말은 너무 사실과 다르고 신빙성이 없어 김이 새버렸다. 생각해보면 실제로 미래를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벌써 대예언자로 불리며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어린 여자아이가 축제에 모인 사람들에게 굳이 홍보를 하러 나올 필요도 없이 말이다.
‘애초에 마음고생을 해도 내가 하겠지, 이 사람이 아니라.’
나는 내심 기대했던 마음이 푹 꺽이자 실망을 금할 길이 없었다. 레이몬드 2황자가 농담조로 꺼낸 연인점을 보고 나면 앞으로 내 미래에 대한 이야기도 묻고 싶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불안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기대고 싶었다.
그런데 이게 다 엉터리라고 생각이 드니 당연히 크게 실망하고 기운이 빠질 수밖에.
아마 레이몬드 2황자도 황당해하고 있지 않을까, 하고 살며시 옆을 돌아보다 나는 내심 감탄했다. 레이몬드 2황자는 괜히 황족이며, 마탑주를 맡고 있는 게 아니라는 듯 표정 관리가 아주 능숙했다. 실망한 기색은커녕 그는 아주 진지하게 여자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이렇게 아름답고 매력적인 분이라서 그런지, 남자분의 주변만 해도 여자분께 목을 매게 되는 별들이 많네요. 가깝게는 혈연과도 여자분을 두고 경쟁할 수도 있겠으니 조심하셔야겠어요. 호호호.”
그녀는 계속 내가 아닌 레이몬드 2황자를 바라보며 말을 잇고 있어, 내 실망한 표정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연신 웃음기를 거두지 않는 그녀의 다음 말에는 나도 조금 놀랐다. 혈연이라고 구체적으로 짚는 말에 반사적으로 떠오른 사람이 있어서였다.
무심코 유리 황녀의 얼굴을 떠올리던 나는 고개를 휙휙 저었다. 이미 이런 건 다 엉터리라고 결정을 내린 뒤였기에 특별히 귀담아듣지 않으려 했다.
“음, 그리고.”
방금까지 웃으며 재잘재잘 말을 늘어놓던 여자의 표정이 일순 어두워졌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사실 두 분은 서로가 운명이 아니에요.”
그녀가 미안하다는 듯 꺼낸 말이 오히려 신뢰가 갔다. 나는 이미 실망을 크게 했으면서도, 다시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원래 운명의 짝은 따로 있다는 뜻이에요. 아마 지금쯤이면 두 분 다 원래 운명의 짝을 만났을 텐데, 그럼에도 지금 함께 있는 건 서로라.”
여자가 우리에게서 건네받았던 두 개의 구슬을 손안에서 굴리며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남자분께서 마음고생을 하게 될 것 같다고 여긴 건.”
탁, 손안에서 굴리던 구슬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고는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한 여자의 눈동자가 내게 향했다.
구슬을 굴리던 것처럼 내 눈동자를 샅샅이 살펴보듯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가 왠지 조금 무섭게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미래를 볼 수 있다는 여자의 말을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으면서도.
“남자분의 운명의 별은 이미 여자분께로 향했지만, 여자분의 운명의 별은 아직 남자분께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여자의 눈을 피하지도 못하고 긴장한 채 마주하고 있는데, 다행히 여자는 금세 내게서 레이몬드 2황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이쪽의 미남이 훨씬 고생하게 되실 것 같아요.”
그리고 다시 처음과 같은 미소를 보였다.
나는 여자의 말을 진지하게 듣다가 다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상대는 진중했지만 결론부터 보면 마치 레이몬드 2황자가 나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레이몬드 2황자가 마음을 끓이고 고생하게 된다는 투였다.
‘역시 엉터리 같아.’
나는 다시 심드렁해져선 여자가 아니라 다른 곳에 관심을 두었다. 아직도 테이블 위에 가득한 예쁜 색색의 구슬이라든가,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혼자 얌전히 동화책을 읽고 있는 여자아이라든가, 작고 낡았지만 깔끔하게 잘 정리가 되어 있는 집안이라든가.
“그렇군요.”
이미 흥미를 잃은 나와 달리 레이몬드 2황자는 줄곧 진지한 태도로 여자의 말을 듣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