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7)
풀어주기 직전 한 번 내 몸을 강하게 끌어안은 팔이 조금…… 신경 쓰였지만, 아무것도 모른 척 조용히 그로부터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침묵.
괜히 분위기가 어색해져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배고프진 않아요?”
내가 입 안으로 나오려는 말들을 삼켰다가 다시 내뱉으려다가 망설이는 사이, 레이몬드 2황자가 평소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머뭇거리며 고개를 들자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잔잔하게 미소짓고 있는 근사한 얼굴이 보였다. 그 미소만 보면 정말 조금 전에 있었던 일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져, 어색해하며 거리를 두던 내가 도리어 이상해 보일 정도였다.
“아까 보니까 저쪽 노점에 맛있어 보이는 게 많던데 가볼까요?”
레이몬드 2황자가 자연스럽게 내 손목을 잡으며 노점들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긴 다리로 성큼 걷는 것 같아 보여도 알고 보면 내 보폭에 맞춰 느리게 걸음을 옮기는 그를 따라 나도 다시 걷기 시작했다.
괜히 그의 말투, 행동 하나하나에 쓸데없는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뭐든 담담하게 받아칠 수 있도록 하자고 다짐하면서.
이후로는 특별한 일 없이 겉보기에 우리는 정말 평범하게 축제를 즐겼다. 처음 보는 특이한 거리의 음식들을 사 먹어 보기도 하고, 예쁜 장신구들을 구경하다 그에게 선물 받기도 하고, 호신용 단검에도 관심을 보였으나 그의 손에 끌려 금세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도 하고, 공을 던져 표적을 맞추는 게임을 하다 상품으로 커다란 인형을 받기도 했다. 그러다 또다시 배가 고파져 노점에서 파는 빵과 과일 음료를 사서 분수대에 걸터앉아 나눠 먹기로 했다.
레이몬드 2황자는 축제가 처음이라고 말하는 것치곤 성 밖의 거리나 사람들에게 꽤 익숙해 보였다. 북적이는 사람들 틈을 쉽게 빠져나가는 능력이라든가, 황족이라는 신분을 감춘 채 영지민들과 소탈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라든가,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거리에 앉아 음식을 먹는 행동이라든가, 하는 게 말이다.
한평생 고귀한 신분으로서 황실이라는 높고 견고한 울타리 속에서 자라왔을 사람이 위화감없이 거리의 사람들 틈에 섞여 있는 게 신기했다. 나는 사람 자체에 익숙하지 않아 내내 허둥거렸지만, 레이몬드 2황자는 나와 함께 있는 동안 줄곧 모든 것들에 익숙한 태도로 말하고 움직였다. 그게 나는 너무 신기해서, 축제 자체를 즐기기보다는 그런 그를 관찰하는 것에 재미가 들렸다.
지금도 한 손에는 빵을 다른 손에는 과일 음료를 들고서 아무렇지 않게 그걸 먹고 마시는 레이몬드 2황자의 모습을 계속 힐끔거렸다.
“헤더 영애, 그거 맛있어요?”
한참 빵을 맛있게 먹고 있던 레이몬드 2황자가 문득 궁금하다는 듯 내게 물어왔다. 과일 음료는 둘 다 똑같은 거였지만 빵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이 먹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빵에 그가 관심을 보이기에 나는 얼른 손을 움직여 내가 베어 물지 않은 쪽을 떼어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나보다 레이몬드 2황자의 행동이 더 빨랐다. 그는 몸을 기울여 내쪽으로 다가와 내가 먹고 있던 빵을 작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방금까지 내가 먹고 있던 부분을 그대로 베어 문 거였다.
“아, 헤더 영애 것도 맛있네요. 두 개 살 걸 그랬나.”
나는 당황해 굳은 채로 그가 베어 문 빵을 보고 있는데, 레이몬드 2황자는 태연하게 빵이 맛있다는 소리나 하고 있었다.
내가 먹고 있던 부분이었는데. 입술이 닿았고, 이가 닿았고, 침이 묻었을지도 모르는데. 그걸 그대로 드시면 어떡해요.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을 목구멍 너머로 삼킨 채 애써 담담한 얼굴을 했다. 그냥 내가 먹고 있던 빵이 맛있어 보였던 거겠지. 빨리 한 입 먹고 싶었던 거겠지. 내가 떼주길 기다리기도 힘들었던 거겠지. 당황하지 말고, 괜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겉으로 티 내지 말자.
나는 다른 곳에 신경을 돌리기 위해 빵을 내려다보던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들었다. 석양이 내려앉은 광장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다들 조금씩 지친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축제를 즐기고 있는 게 보였다.
오랜만에 만난 듯한 지인과 눈물을 글썽이며 악수를 나누는 사람, 아들로 보이는 남자아이를 목말 태운 채 집시의 춤을 구경하고 있는 사람,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걸어가며 서로를 바라보는 연인들…….
빵을 손에 쥔 채로 멍하니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을 응시하고 있자니,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저기 동생들의 손을 잡고 웃으며 걸어가는 여자아이가 나였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의 손을 잡고 함께 지금 이 축제를 즐기고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 꼭 축제에 함께 오는 게 아니더라도, 지금 두 사람을 만나고 싶고, 두 사람을 꼬옥 끌어안아주고 싶다는 생각.
“저…….”
무의식중에 또다시 두 사람을 떠올리고 있던 나는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옆에서 가볍게 손을 털고 있던 레이몬드 2황자가 그런 내게 시선을 가져왔다. 나는 아까 레이몬드 2황자가 베어 문 이후로 그대로인 빵을 내려다보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언제쯤 수도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나도 모르게 무심코 질문을 던지자마자 곧바로 후회했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지. 내가 왜 유리 황녀를 떠났던 건데. 유리 황녀가 나를 버리지 않은 거라면 뭐. 나 때문에 유리 황녀가 위험해질 수도 있기 때문에 스스로 황성을 떠난 거였지 않나.
그런데 그새 이유는 죄다 잊어버린 채 유리 황녀에게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나 하다니. 이렇게 멍청할 수가 있나.
유리 황녀가 날 내치려던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정신을 못 차리고 이따위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내가 한심해 미칠 것 같았다.
당황해 급히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입 밖으로 튀어 나간 질문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빨리 돌아가고 싶어요?”
질문에 곧바로 질문이 돌아왔다.
나는 입을 틀어막았던 손을 어색하게 내리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사실 진짜 묻고 싶은 건 따로 있었다. 유리 황녀가 나를 내치지 않았다고는 했지만, 그게 앞으로도 계속 곁에 있어도 된다는 뜻인지. 지금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는 뭘하고 있는지. 혹시 나를 찾고 있진 않은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대답이 돌아올까 무서워서 쉽게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어떤 대답이 돌아와도 나는 두 사람의 곁에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저는…….”
말을 하려다 멈추고, 몇 번을 머뭇거리다 겨우 다시 말문을 뗐을 때였다.
“저기 언니, 오빠.”
불쑥 끼어든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우리는 동시에 옆을 돌아보았다.
거기엔 이제 겨우 7, 8살쯤 돼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나와 레이몬드 2황자를 번갈아 보는 눈동자가 왠지 잔뜩 기대에 차인 듯해 조금 부담스러웠다.
당황해서 여자아이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는 우리에게 여자아이가 방긋 웃으며 물어왔다.
“혹시 두 분은 연인이신가요?”
이 아이에게까지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지 않나. 반사적으로 아니라고 대답하려는 나보다 먼저, 레이몬드 2황자가 아이와 시야를 맞추며 미소 지었다.
“그렇게 보여?”
“네.”
레이몬드 2황자는 확실히 그렇다 아니다 대답하지 않았지만, 여자아이는 그 질문만으로도 이미 우리가 연인이라고 확신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아이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몸을 들썩이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모는 보이지 않고, 어린아이 혼자 늦은 시각에 돌아다니는 모습이 걱정스러웠다. 아이 주변을 돌아보며 부모로 보이는 사람을 찾는데, 여자아이가 한 걸음 더 우리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언니 오빠는 두 분의 미래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그리고 던져오는 질문에 레이몬드 2황자가 고개를 옆으로 슬쩍 기울이며 반문했다.
“……미래?”
“네, 저쪽으로 가면 엄마가 봐주실 거예요. 우리 엄마는 미래를 볼 줄 알거든요. 궁금한 건 다 알려줄 수 있어요. 옆집 할아버지나 동네 아주머니들도 다들 우리 엄마가 잘 맞춘다고 그랬어요.”
갑자기 다가와 말을 건다 했더니 아이 나름의 호객행위였던 모양이었다. 아마 아이의 어머니가 점을 봐주는 점술가인 것 같았다.
나는 아무리 그래도 이런 어린아이에게 호객을 시켜도 되는 건가 하는 오지랖 넓은 걱정을 하며 아이의 열띤 설명을 들었다. 아이가 너무 열정적으로 제 어머니의 대단함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있었기에, 아이의 성의를 무시하기도 그렇고, 잠깐이라도 가서 점을 봐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 혼자 있는 게 아니라 어쩌지 하는 표정으로 레이몬드 2황자를 돌아보았다. 내 시선을 느낀 듯 그도 나를 돌아보았다. 잠시 내 표정을 살피던 그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직 시간도 있는데, 한 번 가볼까요?”
내게 의사를 묻는 질문이었지만, 여자아이가 먼저 반응을 보였다.
“정말요?”
여자아이가 눈에 띄게 기뻐하며 내게 반짝거리는 눈빛 공격을 가해왔다. 그 잔뜩 기대에 찬 눈빛을 받고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내가 네, 하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아이가 꺄 소리를 지르며 폴짝폴짝 뛰더니 내 팔을 잡고 쭉쭉 당겼다.
“언니, 이쪽이에요. 이쪽.”
여자아이는 왠지 의사 결정권이 내게 있다고 여긴 건지, 레이몬드 2황자가 아니라 내게 더 적극적이었다.
나는 나보다 한참 작은 여자아이에게 끌려가면서 조금 착잡한 심정이었다. 어째선지 나는 항상 다른 누군가에게 이런 식으로 여기 저기 끌려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우유부단하고 유약한 성격 탓일까, 이런 성격부터 고쳐야 할까. 혼자 갑자기 심각해져선 끙끙 앓았다.
그런 와중에도 여자아이는 걸어가는 내내 제 어머니에 대한 자랑과 설명을 열심히 늘어놓았다.
최근에는 연인점이라는 것도 생겼는데 언니 오빠가 함께 보면 좋을 것 같다느니, 두 사람이 얼마나 잘 맞는지, 평생 함께 할 수 있는지, 얼마나 많은 별들의 운명 속에서 엮인 인연인지 알 수 있다는 제법 그럴듯한 말도 해왔다.
여자아이가 우리는 데려간 곳은 광장의 중심에서는 조금 떨어진 외곽 골목 바로 입구 쪽에 있는 작은 집이었다. 흔한 간판 하나도 없어 일반 가정집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엄마, 엄마!”
여자아이는 집 앞에 도착하자 내 손을 놓고 먼저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미야 너, 또 말도 없이 나갔지! 엄마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여자아이의 외침에 이어 조금 나이가 있는 여자의 목소리가 매섭게 날아들었다. 왠지 아이가 혼나는 분위기라, 나와 레이몬드 2황자가 어색하게 서로를 마주보고 있을 때였다.
여자아이가 다시 집에서 튀어나오더니 우리 곁으로 다다닥 달려와 나와 레이몬드 2황자를 방패막이처럼 내세웠다.
“손님 모셔왔어요. 여기, 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