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6) (69/152)

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6)

똑똑.

레이몬드 2황자가 곧 오겠다 싶어 마음이 바빠져 다급히 거울을 보며 옷매무새를 다듬고 있을 때였다. 약속 시간을 정확히 지킨 노크소리가 들렸다. 나는 숨을 크게 한 번 들이키고 내쉰 후 문가로 다가가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생각해보니까 이 문, 한 번 부셔졌던 것 같은데 이것도 어느새 고쳐져 있었다.

“헤더 영애, 준비 다 됐어요?”

잠시 쓸데없는 잡생각을 하는 사이 문이 완전히 열리고, 평소와 조금 다른 느낌의 레이몬드 2황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비슷한 색의 후드를 깊이 눌러쓴 그는 태양처럼 빛나는 금색 머리칼과 눈동자를 거의 다 가린 상태였고, 옷차림 역시 평민들이나 입을 법한 낡은 옷을 입고 있었다.

이러고 있으니 원래 그가 지닌 황족 특유의 화려한 분위기가 사라지고 그냥 평범한 미남자처럼 보였다. 아니, 그래도 그에겐 평범하다는 수식어는 그리 어울리지 않았지만 평소 그의 모습에 비하면 그렇다는 의미였다.

“그럼 갈까요?”

그는 자신과 비슷하게 후드를 꾹 눌러쓴 나를 만족스럽게 쳐다보고는 손을 내밀었다. 연회에 참석할 때처럼 에스코트를 하려는 건가 하고 별 생각없이 그의 손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런데 이번엔 뭔가 조금 달랐다. 레이몬드 2황자가 내 손을 가볍게 쥐고는 깍지를 낀 채 당겼다. 무심코 휙 끌려간 나는 어? 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딱히 뭐라 하진 못하고 그 상태로 그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사실 나 고백할 게 있어요.”

호기심 어린 사용인들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으며 영주성을 빠져나오는데, 레이몬드 2황자가 정면에 시선을 두고서 진지하게 말했다. 처음 헤더 자작가를 찾아왔을 때만큼이나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옆얼굴을 보며 나도 덩달아 긴장해 다음 말을 기다렸다.

“실은 축제에 가보는 건 처음이에요.”

“…….”

“헤더 영애는요?”

레이몬드 2황자는 진지하게 묻고 있었다. 걱정스러운 눈동자 앞에서 나는 그보다 더 심각한 얼굴을 했다.

“저도 처음인데 어떡하죠.”

푸핫!

살짝 옆으로 얼굴을 돌린 레이몬드 2황자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왜 웃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쿡쿡,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웃음을 흘리던 그가 그런 나를 돌아보고는 눈을 반달로 접으며 말했다.

“그럼 제가 한 번 힘내볼게요. 중간에 혹시 뭔가 실수하더라도 모른 척 봐줘요.”

그러고는 미리 대기시켜둔 듯한 마차에 나를 먼저 태우고, 자기도 마차에 올라 내 맞은편에 앉았다. 우리가 무사히 마차에 올라탄 것을 확인한 마부가 이내 마차를 출발시켰다.

‘다른 호위들은 뒤에 따라오는 걸까?’

당장 눈에 보이는 기사들은 보이지 않지만, 아마 보이지 않게 조용히 뒤를 따르겠거니 생각했다. 아무리 그가 현 세대에서는 따라올 자가 없는 천재 마법사라고는 해도, 한 나라의 황자가 호위도 없이 돌아다니진 않을 테니까.

부드럽게 굴러가는 마차 안에서 나는 맞은편에 앉은 레이몬드 2황자의 표정을 살폈다. 미소를 머금은 채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는 그는 오늘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요 며칠 계속 저런 느낌이긴 했지만 오늘은 유독 더 그래 보였다.

늘 차분하고 어른스러워 보였던 그가 오늘은 아이처럼 들뜬 모습이라 조금 신기했다. 이렇게 대단한 사람도 축제라는 단어가 무척 기대되고 설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그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하지만 몇 번 눈이 마주칠 때마다 눈이 시리도록 예쁘게 웃는 얼굴을 마주하고는 그것도 금세 관뒀다.

눈앞에 있는 남자의 미소는 심장에 너무 해로웠다.

우리는 마차를 타고 영주성을 나와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광장에서 내렸다. 언제 이렇게 준비를 한 건지, 거리며 건물들이 화려하게 치장되어 입구부터 축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다양한 물건과 음식들을 늘어놓고 판매하는 노점상들부터, 커다란 분수대 근처에서 자리를 깔고 노래를 부르는 음유시인과 춤추는 집시들, 아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인형놀이극과 묘기를 부리고 입에서 불을 뿜는 기인들. 광장은 마치 아예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한 번도 보지 못한 새롭고 신기한 것들 천지였다.

마차에서 내린 뒤로 나는 곁에 있는 레이몬드 2황자의 존재마저 잊은 채 주변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클레어.”

혼자 잔뜩 들떠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여기저기 쏘다니던 나는 부드럽게 손을 잡아 오는 손길에 조금 움찔했다.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보자, 내 손을 꼭 붙잡은 레이몬드 2황자가 웃음기 어린 눈으로 시선을 마주해왔다.

“같이 가요. 사람이 많아서 휩쓸릴 수 있으니까 조심해요.”

그러고는 내 손을 잡은 채로 옆에 나란히 서서 “어디로 갈까요?”하고 물어왔다. 아무리 봐도 내가 아니면 이 사람이 내게 마음이 있는 게 아닐까 착각할 만큼 다정한 행동이었다.

덕분에 조금 전까지의 흥분이 싹 가신 채 다시 옆에 서 있는 레이몬드 2황자에게 온통 신경이 쏠렸다. 걸을 때마다 스치는 팔과 어깨가 의식됐고, 그와 맞잡고 있는 손에 자꾸 땀이 나는 것 같아 신경 쓰여 안절부절못했다.

“우리 저기로 가 봐요.”

그런 내 상태를 전혀 모르는 레이몬드 2황자는 노점상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걸어가며 내 손을 끌었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무표정을 유지하며 그를 따라 걸어갔다.

나는 꽤 주변의 시선에 예민한 편이었다.

소곤거리는 여러 목소리들에 섞여 제법 노골적인 시선들이 와닿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눈을 굴려 주변을 돌아보았다.

후드를 깊이 눌러썼음에도 미처 다 감춰지지 않는 커다란 키와 늘씬한 몸, 턱 끝만 간신히 보임에도 알아볼 수 있는 근사한 외모 덕분에 레이몬드 2황자는 축제를 즐기러 온 여성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본인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지만, 수줍게 뺨을 붉히며 그를 응시하는 시선들과 주변의 수군거림에서 나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개중에는 남자들의 시선도 꽤 있었는데, 아마 레이몬드 2황자를 바라보다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굴까 궁금해하며 내 쪽도 쳐다보는 듯했다.

나는 거의 땅에 고개를 처박듯이 시선을 내린 채 후드를 더 당겨썼다.

그 와중에 지나치게 눈길을 끄는 레이몬드 2황자의 안전도 문득 걱정이 됐다. 축제는 아주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진행되고 있었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나를 납치하려던 괴한들처럼 갑자기 그에게 달려드는 사람이 있으면 어떡하나 싶었다. 내가 과연 제때 이 사람에게 날아드는 흉기나 주먹을 막아설 수 있을까. 제대로 방패막이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었다.

호위들은 잘 따라오고 있는 건가.

나는 그를 따라 걸으며 고개를 돌려 뒤를 힐끔 바라보았지만, 아무리 봐도 호위로 보이는 기사들은 보이질 않았다. 인파 속에 묻혀서 보이질 않는 건지, 애초에 따라오질 않은 건지 헷갈렸다. 후자라면 그건 정말 큰 문제였다.

“저쪽에도 뭐가 있어요?”

내가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걸 알아챈 레이몬드 2황자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뒤를 돌아보며 물어왔다. 나는 잠시 우물쭈물하다 솔직하게 말했다.

“아뇨. 그게 아니라. 호위기사들이 안 보이는 것 같아서요.”

“아아.”

그는 그제야 내 행동을 이해했다는 듯 시선을 제자리로 돌리며 웃었다.

“걱정 돼요?”

“네, 갑자기 전하께 누가 달려들기라도 하면,”

나는 살짝 초조해져서 얼른 대답했다.

“제가 잘 막아드릴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서요.”

“헤더 영애가…… 나를요?”

“네.”

왠지 그가 무척 황당해하는 기색이라, 저밖에 없잖아요 하고 덧붙이는 말은 거의 들리지도 않을 만큼 조그맣게 흘려냈다.

워낙 가까이 서 있다 보니 살짝 들린 후드 너머로 그의 눈동자가 또렷이 보였다. 황당해하다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가, 지금은 입술을 슬쩍 깨물며 웃음을 참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에 아주 조금 기분이 나빴고, 아주 조금 부끄러워졌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이 사람을 지켜준다는 발상은 어이가 없었던 걸까 싶었다.

“내가 헤더 영애를 지켜주는 거면 모를까, 그건 좀…….”

예상대로 레이몬드 2황자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어색하게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나는 아주 조금 더 내 자신의 발언이 부끄러워졌다. 내 몸 하나도 간수 못 해 결국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주제에 누굴 지켜주겠다는 건지.

다시 생각해보니 조금이 아니라 죽을 만큼 부끄러웠다. 아예 땅굴을 파고 머리까지 푹 파묻히고 싶은 심정이었다.

“앗, 미안합니다.”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는 레이몬드 2황자를 힘겹게 마주하고 있는데, 누군가 지나가며 내 등을 세게 치고 지나갔다. 갑자기 거칠게 떠밀린 나는 그대로 레이몬드 2황자의 가슴팍에 푹 쓰러지듯 안겼다. 순간 주위에서 꺄아, 하는 비명소리가 작게 들린 것도 같았다.

“이런, 괜찮아요?”

단단한 그의 가슴에 코를 세게 부딪친 나는 끙끙대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반사적으로 내 팔을 붙잡아준 레이몬드 2황자도 놀란 듯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어디 봐요.”

그가 양손으로 내 뺨을 감싸며 반강제로 얼굴을 들게 했다. 그러고는 진지하게 내 얼굴을 살피더니 다행이라는 듯 살짝 웃었다.

“코가 빨개졌어요. 다행히 피는 안 나네요.”

거의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와 있는 그의 눈동자가 조금 당혹스러웠다. 왠지 주변도 더 소란스러워진 것 같아 신경이 쓰였고.

그때 레이몬드 2황자가 갑자기 손을 내리고 팔로 내 허리를 감아 제 품으로 나를 깊이 끌어당겼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굳은 채 그의 품에 안겨있으니, 등 뒤에서 쿵쿵 거친 발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연애질은 딴 데 가서 하지. 누가 길 한가운데 서서 거치적거리게, 쯧!”

그에게 안긴 채로 옆을 돌아보자 덩치 큰 남자 하나가 우리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며 핀잔을 던지고 지나갔다. 길 중간에서 멀뚱히 마주 보고 서 있는 우리가 통행에 무척 방해가 되었던 모양이다. 남자와 함께 우르르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도 나와 레이몬드 2황자를 향해 호기심 어린눈으로 힐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남자가 외쳤던 연애질이라는 단어와 레이몬드 2황자의 품에 안겨있다시피 한 내 모습을 나는 한 박자 늦게 자각했다.

심장이 쿵쿵 소란스럽게 울렸다. 나는 행여나 그에게 그 울림이 전해질까, 밀려드는 민망함에 몸을 비틀며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그러나 단단하게 내 몸을 끌어안고 있는 그의 팔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당황해 고개를 들었으나 무슨 생각인지 레이몬드 2황자는 모른 척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전하, 이제 놔주셔도 될 것 같아요.”

나는 점점 더 많은 시선들이 우리에게 모여드는 걸 느끼고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만 놔주세요, 하는 나의 애원에 가까운 말에 그제야 그가 팔을 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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