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5) (68/152)

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5)

“단순히 그날 널 구해준 게 다가 아니지?”

“그리고 저거 성녀 애인이라고 소문이 파다하던데? 너도 알아?”

“혹시 저 새끼가 너한테도 껄떡대는 중이야? 얼굴만 번지르르한 게 여기저기 찔러보고 다닐 것처럼 생기긴 했던데.”

“근데 성녀가 연애해도 괜찮은 건가? 성국에서 가만히 있나?”

줄줄이 쏟아지는 곤란한 질문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내가 난처해하는 걸 알고는 다행히 시온도 심드렁한 얼굴로 더 캐묻지 않고 넘어가 주었다.

그리고 또 계속 시간이 흘러서, 레이몬드 2황자의 옷깃조차도 보지 못한지 딱 일주일째가 되던 날. 그가 앞으로는 제 마음대로 하겠다며 당당히 선포했던 말도 거의 잊어갈 즈음이었다.

“헤더 영애.”

점심 식사 시간이 가까워진 시각. 평소보다 많은 하녀들이 내가 머무는 방으로 줄줄이 들어오는 가운데, 레이몬드 2황자가 같이 점심 식사를 하지 않겠냐며 내게 찾아왔다.

일주일 동안 그와는 스치듯 만나는 일도 없었던 터라 느슨하게 풀어져 있던 나는 허둥대며 그를 맞이했다.

그는 급한 일이 대충 해결돼서 이제 자주 같이 있을 수 있다며 밝은 얼굴로 내게 말했고, 나는 그 말에 오히려 아연해져서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도 몰라 굳어있었다.

“음식이 별로 입에 안 맞아요?”

헤더 자작가에 있을 때는 구경도 해보지 못한 진귀한 음식들이 잔뜩 차려져 있는데도 나는 눈앞에 있는 레이몬드 2황자가 불편해 음식을 깨작거리기만 했다. 그런 나를 가만히 지켜보던 레이몬드 2황자가 당장 요리사를 불러 새로운 요리를 올리라고 할 기세로 말을 걸어왔다.

“아, 아뇨. 맛있어요. 아침을 많이 먹었더니 지금은 배가 별로 안 고파서…….”

실제로 그가 손짓으로 뒤에 서 있던 하녀를 부르기까지 하는 바람에 나는 당황해서 얼른 대답했다.

“그런 것치곤 일주일 전에 봤던 것보다 더 마른 것 같은데.”

잠시 말없이 나를 쳐다보기만 하던 레이몬드 2황자가 혼잣말처럼 낮게 말했다. 딱히 대답을 바라는 말은 아닌 것 같아도 그냥 무시하기도 그래서, 나는 우물쭈물하며 적당한 말을 골랐다.

“그, 그런가요.”

그렇게 겨우 흘러나온 대답이었다. 어딘가 좀 덜떨어진 대답을 내어놓고 나니 당장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눈앞에 있는 음식이 더 먹기 싫어졌다.

“그동안 방 밖으로도 한 걸음도 안 나갔다면서요, 답답하지 않았어요?”

다행히 레이몬드 2황자가 금세 화제를 돌려주었다.

“네? 네.”

이 사람이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은 들지도 않았다. 아마 다른 하녀들이나 가끔 방문을 열면 문 양옆으로 서 있던 기사들이 보고를 한 거겠지 싶었다.

그 질문을 시작으로 레이몬드 2황자는 만나지 못한 지난 일주일간을 채우듯이 계속 말을 건네왔다. 불편했던 건 없는지, 더 필요한 건 없는지, 그리고 그동안 뭘 하며 지냈는지. 소소한 질문과 대답이 한참 오가다 그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시오네트라 버젯과는 어떻게 아는 사입니까?”

처음 듣는 낯선 이름의 등장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리둥절해하는 내 표정을 읽은 레이몬드 2황자가 도리어 이쪽이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매일 헤더 영애의 방에 들락거린 여자 말이에요.”

“아.”

나는 뒤늦게 아, 하고 멍청한 소리를 내고는 붉은 머리칼을 지닌 시원시원한 인상의 미녀를 떠올렸다.

그 낯선 이름이 시온의 풀네임인 것을 알아챈 나는 수프를 떠먹던 수저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손을 무릎 위로 내려 마주 잡고 꼼지락거렸다.

“저, 실은.”

머릿속으로 잠깐 생각을 정리하고는 레이몬드 2황자에게 솔직하게 말을 꺼냈다. 사막 위에서 나를 구해주었다던 사람이 그녀였다는 걸 밝히자, 그가 그제야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랬군요.”

그러고는 뭔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침묵했다. 나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눈동자만 데구르르 굴렸다.

“자꾸 말 걸어서 미안해요. 나 때문에 거의 먹지도 못했네요.”

내가 가만히 그의 눈치만 살피고 있는 걸 안 레이몬드 2황자가 미안함이 담긴 미소를 그렸다. 그러고는 테이블을 가득 채운 음식들을 내 앞으로 밀어주며 다정한 투로 말했다.

“난 신경 쓰지 말고 어서 들어요. 이래서야 나중에 유리 녀석한테 헤더 영애의 식사도 제대로 안 챙겨줬냐고 혼날 것 같아서 걱정되네요.”

부담스러운 관심과 조금은 불편한 친절에 나는 당혹스러운 마음을 애써 감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가 성녀와 가까워진 게 아닐까, 머지않아 그쪽에서 먼저 계약 파기를 제시해올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 정반대의 상황에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이몬드 2황자는 또다시 일이 생긴 듯 다급히 방을 나갔다. 아쉬운 듯 인사를 하고 떠나는 그를 배웅하고, 이후로 당분간은 또 그와 마주칠 일이 없겠구나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내 생각과 달리 그날 저녁에도, 그 다음 날에도 그는 틈만 나면 나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자주 찾아오는 그에게 나는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자주 오셔도 괜찮은 건가요?”하고 물어본 적도 있다. 그러자 그는 급한 일은 대충 다 해결했다며, 듀란 영지에 머무는 동안 자신과 어울려 달라며 해사하게 웃었다.

그 지나치게 예쁘고, 지나치게 부담스러운 미소 앞에서 나는 차마 싫다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즈음부터 시온은 나를 찾아오지 않았고, 대신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레이몬드 2황자가 그 빈자리를 채워주었다.

시간이 많아진 그는 생각보다 꽤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마력구로 호출을 당해 어디론가 불려갈 때를 제외하고는 피곤하다 싶을 만큼 내 곁에 자주, 오랫동안 머물렀다.

내가 화장실을 가거나 씻거나 옷을 갈아입거나 잘 때를 제외하고는 웬만해선 내 옆에서 떨어지려고 하질 않았다. 식사는 물론, 작은 것 하나라도 나 혼자 하게 내버려두는 법이 없었다.

그런 그의 말과 행동들이 왠지 내가 또 말도 없이 사라질까 의심스러워 그러는 건 아닐까 추측만 하다가, 하루는 도저히 못 참겠어서 직접 대놓고 물어보았다.

“아, 조금은 그런 이유도 섞여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랬더니, 설마 했던 대답이 진짜로 돌아왔다. 당황한 내가 결연한 얼굴로 앞으론 절대 그러지 않을 테니 이렇게 감시하듯 붙어있지 않으셔도 된다고 했더니.

“으음, 못 믿겠는데.”

라는 대답과 함께 사람 정신을 쏙 빼놓을 만큼 예쁜 미소가 돌아왔다. 그 미소에 홀려서 별다른 반박도 하지 못한 나는 그날도 점심을 먹다 살짝 체하고 말았다.

그래도 그는 원체 바쁜 사람이다 보니 쉬다가도 호출이 들어와서 나가고 했는데, 그때가 그나마 내가 조금 숨을 돌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저 오늘은 하루를 통째로 휴가받았어요.”

레이몬드 2황자에 의한 집요한 밀착 감시 5일째가 되던 날이었다.

“성안에만 있으니 답답하지 않아요? 오늘부터 광장에서 축제를 연다는데, 같이 가지 않을래요?”

“축……제요?”

“네, 축제요.”

갑자기 휴가가 생겼다며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다가온 레이몬드 2황자에게 나는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듣자 하니 그동안 네 번째 문으로 인해 공포에 휩싸인 채 고통받고 힘들어했던 영지민들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미뤄졌던 축제를 크게 연다는 듯했다. 실드가 견고하게 자리를 잡고 듀란 영지가 안정을 되찾았다는 걸 대외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축제라는 설명도 들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레이몬드 2황자와 내가 같이 그 축제에 참여하는 건 또 다른 문제이지 않은가. 잘못하면 꼭 데이트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텐데. 유리 황녀의 눈이 미치지도 않는 여기서도 굳이 그렇게 약혼한 사이처럼 행동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그런 내 표정을 읽은 건지 레이몬드 2황자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뒷말을 덧붙였다.

“영주가 헤더 영애와의 관계를 자꾸 캐묻기에 약혼녀라고 말해뒀거든요. 모처럼 휴가가 생겼는데도 약혼녀를 내버려 두고 혼자 축제에 가면 의심스러운 눈으로 볼 것 같아서요. 소문이라는 게 언제 어디서 샐지 모르니, 혹시나 유리 녀석의 귀에 들어갈지도 모르고.”

듣고 보니 그럴 법했다. 게다가 지금 영주성에는 다른 황실의 기사들도 잔뜩 머물고 있으니까.

유리 황녀가 나를 내친 게 아니고, 아직 유리 황녀의 눈에 내가 레이몬드 2황자의 약혼녀로 보일 필요가 있다면, 나는 레이몬드 2황자의 요청에 따를 필요가 있었다. 아직 그와 맺은, 그리고 카롤리나 황후와 맺은 계약이 끝난 게 아니니까.

내가 알겠다고 답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만족한 듯 그가 다시 환하게 웃었다. 그 미소를 보고 있자니 왠지 눈이 부셔서 나는 살짝 눈가를 찌푸렸다.

요즘 레이몬드 2황자는 이상하다 싶을 만큼 자주 웃고는 했는데, 그 예쁜 얼굴로 미소 지으며 나를 가만히 쳐다볼 때면 생각하곤 했다. 역사에 등장하는 황제들이 어째서 아름다운 여인에게 홀려 폭정을 휘두르고 나라를 몰락하게 만드는 건지 그 이유를 알 것도 같다고.

저렇게 예쁜 얼굴로 웃으면서 이거 해 달라 저거 해달라 요구해오면 나도 모르게 전부 들어주고 말 것 같았다. 아차 싶어 정신을 차려보면 이미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고 남은 것이 없는 것이다. 지금 내가 살짝 그런 느낌이었다.

‘나라서 다행이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크게 착각을 했을지도.’

나야 워낙 어릴 때부터 자기 객관화라든가, 주제 파악을 하는 일에 익숙한 사람이니 제법 면역이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면 저 미소에 홀려 어쩌면 레이몬드 2황자가 나를 좋아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착각도 하기 쉬울 것 같았다.

30분 뒤에 다시 데리러 오겠다며 방을 나선 레이몬드 2황자를 배웅한 후, 나는 찜찜한 기분으로 옷장을 뒤적였다. 후드가 달린 겉옷 중 적당한 걸 꺼내 주섬주섬 입으면서도 계속 뒤통수가 찜찜했다.

한 번도 축제 같은 행사에 참여해본 적이 없기에 내심 기대가 되면서도, 옷을 껴입는 내내 찜찜하고 불편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최근 지나치게 잘 웃고, 지나치게 내 곁에 오래 붙어있는 레이몬드 2황자의 의도가 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어서였다. 유리 황녀가 함께 있는 황성에서도 이렇게까지 자주 나를 만나러 온 적은 없었기에 더 그랬다.

내가 그렇게 신뢰가 없나? 또 내가 말도 없이 사라질까 봐 걱정돼서 저러는 거겠지?

그런 거면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지 않아도 되는데…….

이제 정말 안 그럴 건데.

‘아마 이렇게 말해봤자 안 믿겠지.’

나는 우울한 숨을 길게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잠깐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인데, 그새 약속한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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