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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4) (67/152)

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4)

콰앙!

이번엔 아예 무언가 크게 부서지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얼핏 내 이름을 부르는 레이몬드 2황자의 목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그 소리에는 도저히 눈을 뜨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아직 잠에 취한 눈을 억지로 뜨고서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클레어 헤더!”

고개를 들자마자 잔뜩 화가 난 듯한 얼굴의 레이몬드 2황자가 보였다.

내가 또 뭔가 잘못한 걸까, 왜 저렇게 화가 난 거지. 저 나무 판자 같은 건 뭐지? 설마 저거 문인가?

잠이 덜 깨서 상황 판단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태로 나는 멍하니 레이몬드 2황자를 바라보았다.

잠들기 전에는 깜깜한 밤이었는데, 지금 그의 뒤로는 창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방안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왜, 대답을 안 해요. 놀랐잖아요.”

레이몬드 2황자는 근사한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부서진 문을 내던지고는 성큼성큼 내 앞으로 걸어왔다. 한 뼘도 되지 않을 거리까지 다가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낮춰 앉았다. 그의 뒤로 반쯤 부서진 채 덜렁거리는 문과 당황해 굳어있는 기사와 하녀들의 모습이 보였다.

“설마 여기서 잔 거예요? 밤새?”

잔뜩 화가 난 기세로 다가온 것과 달리 그는 평소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럼에도 표정은 쉬이 풀리지 않아서, 나는 몽롱한 와중에도 그의 눈치를 살피며 우물쭈물했다.

내가 무어라 대답을 못하고 우물거리자 그의 미간이 더 좁아졌다.

“앗!”

가만히 나를 지켜보던 그가 팔을 뻗어 나를 안아 올린 채로 침대로 걸어갔다. 순식간에 그에게 안겨 얌전히 침대에 눕혀진 나는 그가 이불까지 당겨 목 부근까지 덮어줄 때까지도 얼떨떨한 상태였다.

왠지 몸이 무척 무겁고, 뜨겁고,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 느낀 찰나, 기다렸다는 듯 목을 타고 기침이 터져 나왔다. 콜록. 기침을 토해내자 레이몬드 2황자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의원을.”

그가 문가를 향해 외치자, 목을 길게 빼고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던 하녀들이 엉덩이에 불이라도 붙은 듯 부리나케 어디론가 달려갔다.

그 모습을 멀거니 보고 있는데, 눈앞이 가물가물했다.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보려고 했지만 결국 나는 까무룩 다시 잠들고 말았다.

* * *

꿈도 꾸지 않고 푹 잠이 들었다 깼을 때는, 다시 사위가 어두워진 밤이었다. 겨우 주변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만 빛을 밝힌 마력구가 천장에 둥둥 떠 있었다. 저건 언제 봐도 참 신기하다니까.

내가 색색 내뱉는 숨소리만 들리는 조용한 방안에서 눈을 깜빡이며 그 마력구를 응시하고 있을 때였다.

“정신이 들어요?”

당연히 방안에는 나 혼자만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옆에서 갑자기 누군가 말을 걸어왔을 때는 정말 소스라치게 놀랐다. 다행히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지만 놀란 눈으로 옆을 돌아보자,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건지 레이몬드 2황자가 의자에 앉은 채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갑자기 움직이면서 뭔가 이마에서 주륵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뭔가 하고 눈을 돌리는 순간, 그보다 먼저 손을 뻗어온 레이몬드 2황자가 물이 적셔진 수건을 가져가 다시 차가운 물에 담그는 게 보였다.

“몸은 어때요? 약을 먹어야 하는데, 뭔가 먹을 수 있겠어요? 아, 물부터 마실래요?”

아기 새를 챙기는 어미 새처럼 다정하게 말을 걸어오는 그의 모습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혹시 목이 많이 아픈가요? 말하기 힘들어요?”

걱정스러운 눈동자, 다정한 음성, 그리고 조심스러운 손길까지.

“열은…….”

나는 열을 재보려는 듯 내 이마로 뻗어오는 손을 피해 움찔 몸을 움츠렸다. 레이몬드 2황자의 손이 내게 닿기 직전 허공에서 멈췄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게 느껴졌다.

나도 순간 내가 왜 이러지 싶었지만, 지금은 레이몬드 2황자가 내게 다정하게 대해주는 게 싫었다. 나는 레이몬드 2황자의 시선을 피한 채 이불을 눈 밑까지 끌어당겼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굳이 그러실 필요 없잖아요.”

그러고는 웅얼웅얼, 나조차도 내가 뭐라는 건지 알아듣기 힘든 말을 중얼거렸다.

“앞으로는 저한테까지 그렇게 다정하게 대해주지 않으셔도 돼요.”

어차피 진짜 사랑하는 분은 따로 있잖아요. 계약도 곧 끝내실 거잖아요. 나는 차마 덧붙이지 못한 말을 입 안으로 삼켰다.

눈을 내리깔고 있어 그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모른다. 다만, 이어지는 침묵으로, 레이몬드 2황자 역시 기분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당연하겠지. 기껏 자원봉사를 하듯 친절을 베풀어주었더니 돌아오는 게 고맙다는 인사도 아닌, 이런 식의 무례한 언행이라니. 누구라도 불쾌해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순간 이 상황이 그리 낯설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리하르트 아델이 나를 구해줬을 때도 이런 식으로 말했던 것 같다. 나 같은 건 죽든 말든 내버려 두지 그랬느냐고, 따지듯 물었던 게 기억이 났다. 그때 그토록 황당해하는 그 남자의 표정을 봤을 때는 솔직히 조금 통쾌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지금은…… 가슴이 더 답답해져 왔다.

“그 말은.”

한참 만에야 레이몬드 2황자가 입을 열었다.

“보는 눈이 없을 때는 괜히 지분거리지 마라, 이 뜻인가요?”

차분한 목소리로 묻는 그 말에 나는 당황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네? 아,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닌데……!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다시 잽싸게 시선을 피한 내가 허둥대며 말을 꺼내려는 찰나였다.

“싫은데요.”

또다시 지나치게 침착한 목소리가 나를 당황케 했다. 나는 바보처럼 눈을 끔뻑이며 레이몬드 2황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한 얼굴이었다.

“……네?”

“싫다고 했어요.”

그가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 채 의자 등받이에 삐딱하게 몸을 기댔다.

“헤더 영애도 이번에 나와의 약속을 어기고 멋대로 행동했잖습니까.”

“그, 그건 오해가 있어서 그랬던…….”

“어쨌든 계약 내용에 위배되는 행동을 한 건 맞죠.”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는 몰라도 묘하게 궁지에 몰리는 것 같았다. 위기감을 느끼고 무슨 말이든 반박을 해보려는 시도는 곧장 막혀버렸다.

“이번에 갑자기 사라진 헤더 영애를 찾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요. 알렌과 유리 녀석은 울고 불며 영애를 찾아내라고 저를 들들 볶아 대지, 수도 전 지역에 사람을 풀어서 찾고, 또 찾아도 헤더 영애의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지.”

할 말이 없어 입만 벙긋거리는 나를 가만히 응시하던 레이몬드 2황자가 손을 들어 자기 이마를 짚었다. 마치 연극의 한 장면처럼 과장된 몸짓이었다.

“정말 힘들었어요.”

그는 무척이나 지친 얼굴로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눈동자만 굴려 나를 바라보았다.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것 같았거든요.”

피하지도 못하고 그와 눈이 딱 마주친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식은땀만 줄줄 흘렸다.

나 하나를 찾자고 그 많은 시간이며, 인력이며, 비용이 낭비되었다고 생각하니 죄송하다는 말조차 쉬이 나오질 않았다. 죄송하다는 사죄의 말조차 민망할 정도였으니까.

어떻게 바닥에 납작 엎드려 빌기라고 해야 하나 눈치를 살피는데, 눈이 마주친 레이몬드 2황자가 돌연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환하게 미소 짓는 얼굴이 너무 예뻐서 순간 상황도 잊고 넋이 나가 그의 얼굴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나도 이제부터 내 마음대로 할게요.”

그래서 레이몬드 2황자가 웃으며 던진 말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아니, 그 말에 내포된 무시무시한 진짜 의미를 내가 정확히 깨닫는 데는 며칠이 더 걸렸다고 봐야 했다.

* * *

다음 날부터 일주일 정도는 별일 없이 평온한 시간이 흘렀다.

일주일 동안 나는 얌전히 방 안에만 머물렀고, 시간마다 하녀들이 가져다주는 식사와 약을 챙겨먹으며 감기 몸살을 앓았던 몸을 천천히 회복해나갔다.

나는 언제까지 여기 머무르게 되는 걸까. 언제쯤 수도로 돌아갈 수 있는 걸까. 그리고 수도로 돌아가면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다시 황성으로 돌아가게 될까. 아니면, 헤더 자작가의 빛도 잘 들지 않는 구석진 내 방으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

앞으로의 내 미래를 걱정하며,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기도 했다.

유리 황녀가 나를 내친 건 아니라고 했지만, 그 외에 레이몬드 2황자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내 쪽에서 먼저 유리 황녀에 대해 묻기도 어려웠다.

그러니 앞으로의 일을 내 나름대로 생각하고 미리 살길을 도모해놔야 할 것 같았다. 지금은 레이몬드 2황자의 호의로 이곳에서 머물며 호화롭게 생활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그동안 레이몬드 2황자와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는 무척 바쁜 사람이니 영주의 성에서 머무르는 시간 자체가 적은 것 같았다. 시온으로부터 전해 듣기로 그는 계속 문과 가까운 바다를 오가는데 하루의 대부분을 허비하는 듯했다.

어째서 시온으로부터 그 사실을 전해 듣게 됐냐면, 그녀가 당분간은 제 볼 일을 다 마칠 수가 없을 것 같다며 부지런히 내 방을 들락거렸기 때문이다. 나와는 달리 듀란 영지의 사정에 밝은 눈과 귀가 많은 그녀는 내게 이런저런 얘기들을 들려주곤 했다.

최근 상급 개체 하나가 해변 근처까지 접근해온 사건이라든가, 그로 인해 당황한 영주의 사병들과 마법사들 중 일부가 크게 다치는 일이 있었다든가, 실드가 불안정해져 마탑주를 포함한 고위 마법사들이 마법진에 계속 마력을 불어넣고 있다는 소식이라든가, 그래서 자신도 듀란 영지까지 온 목적을 계속 뒤로 미뤄야 한다든가, 하는 이야기들을 내게 들려주었다.

묵묵히 제 할 일만 하는 영주성의 하녀들로부터는 전혀 듣지 못했던 이야기들이었기에 은근히 시온이 오는 시간을 기다리기도 했다.

그녀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대신, 항상 양손 가득 양피지나 캔버스 따위를 가져와 내게 그림을 그려 달라 요구했다. 그럼 나는 또 어버버 바보 같이 굴다가 그녀의 요구대로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하루는 창밖에 보이는 영주성의 풍경을 간단히 스케치하기도 했고, 또 하루는 그녀가 가져온 작은 화병과 꽃을 그리기도 했고, 다음 날은 캔버스에 저 멀리 보이는 데르카샤 해를 본격적으로 그려보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에 커다란 창 너머로, 성기사들과 황실 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영주성 밖으로 나가는 성녀 아리아를 몇 번 보았다. 당연하다는 듯이 그 옆을 지키고 있는 리하르트 아델도 보았다. 두 사람이 내가 있는 곳을 알 리도 없는데 그때마다 괜히 움츠러들어선 커튼 뒤로 숨는 한심한 나도 있었고.

“너 저 공작인지 뭔지랑 무슨 사이야?”

그 한심한 꼴을 들켜서 시온이 묘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묻는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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