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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3) (66/152)

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3)

철없는 어린애나 가질 법한 유치한 독점욕이고 심술이었다. 지금 자신은 어린 시절의 그런 질 나쁜 감정에 휘둘리고 있는 것일 테고.

그래서 리하르트는 불안했다.

자신은 그 장난감이 다시 제 손에 들어올 때까지 포기하지 못할 테니까. 옷장이나 침대 대신 아예 누구도 갖지 못하게 쓰레기통에 처박는 한이 있어도.

―그냥.

그리고.

―무시해.

제가 버린 장난감을 이미 제 것인 양 품 안에 끌어안고서 자신을 향해 이를 드러내는 맹수가 있더라도.

* * *

‘이게 아니야.’

까득, 손톱이 짓씹히는 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울렸다.

까드득, 초조하게 방안을 서성이던 발이 멈추며, 붉은 입술을 타고 섬뜩한 소리가 연이어 흘러나왔다.

창가로 다가가 어느새 새까맣게 물든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청은색 눈동자가 밤하늘과 똑같은 빛으로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래선 안 돼.’

까드득. 이미 엉망이 된 지 오래인 손톱을 물어뜯으며 아리아는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면 전부 엉망이 될 거라고.’

겨우 이야기 밖으로 밀어냈다 여기고 안심하고 있었건만, 클레어 헤더가 다시 메인 스토리 중심에 들어와 있었다.

몇 가지 예정이 틀어져 버린 터라, 일부러 유리 황녀에게 제 실체를 드러내고 예지의 힘까지 보여줬음에도 메인 스토리가 궤도를 잃고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 이미 거의 다 뒤틀려 엉망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네가 사랑하는 이가 너로 인해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클레어 헤더에게 직접 알렸다. 그렇게 겨우 클레어 헤더를 무대에서 끌어내렸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이야기가 본 궤도를 되찾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전히 본 궤도를 찾지 못한 채 제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유리 황녀와 클레어 헤더, 저 빌어먹을 두 명의 조연들 때문에.

‘저 여자가 대체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지금쯤 얌전히 제 본가로 되돌아가 죽을 때까지 무대로 되돌아오지 못해야 할 클레어 헤더가 두 번째 메인 스토리가 이어질 무대에 떡하니 서 있는 걸 보았을 때, 아리아는 당장이라도 클레어 헤더를 차가운 물 속에 처박고 싶은 살의마저 느꼈다.

저를 두고 클레어 헤더에게 달려가 버린 리하르트 아델. 그리고 클레어 헤더를 직접 제 품에 안고서 이곳으로 되돌아온 레이몬드 알렉 카지스. 원래라면 지금 제게 온 마음을 빼앗겨 오로지 제게만 미쳐있어야 할 두 남자가 제가 아닌 다른 여인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원작대로라면 이제 곧 죽음을 맞이해 완전히 이야기 속에서 말소되어버릴 조연 따위에게.

고작해야 이름만 몇 번 나올 뿐인 조연인 주제에 원작을 비틀고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두 사람 탓에 아리아는 들끓는 분노를 겨우 삼켰다.

‘정말 되돌아갈 수 없게 돼.’

제가 무엇 때문에 이딴 역겨운 연극을 이어가고 있는 것인데. 무엇을 위해 이토록 절박하게 매달리고 있는 것인데.

그걸 아무것도 모르는 것들이 망쳐놓는 꼴을 보고 있자니 속이 뒤틀리는 것만 같았다.

아리아의 가냘픈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를 부드득 갈며, 창밖을 응시하는 눈동자가 분노로 붉게 변했다.

“절대…… 절대 용서해 주지 않을 거라고!”

더는 참을 수가 없어 아리아는 움켜쥔 주먹으로 벽을 힘껏 내리쳤다. 연약한 피부가 거칠게 부딪치며 통증을 낳고, 금세 빨갛게 부어오르기 시작했지만 아리아는 그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화를 가라앉히지 못해 거친 숨을 몰아쉬는 몸이 크게 들썩였다.

‘애초에 그 망할 애새끼가 문제였어.’

아리아는 거칠어진 숨결을 가다듬으며 금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아이를 떠올렸다. 유리 크리스틴 카지스. 저와 똑같이 이 빌어먹을 이야기 속으로 흡수된 17살의 여자애.

저 혼자만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야기를 또 다른 누군가가 알고 있고, 제멋대로 이야기를 바꾸려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원작을 지키려 하는 이와 고의적으로 원작을 망치려 드는 이가 있다면, 사실 승부는 뻔한 거였다. 대부분 원래의 형태를 지키는 쪽보다는 무너뜨리고 망치는 쪽이 훨씬 쉬우니까.

아리아는 이제 자신이 직접 나서서라도 클레어 헤더를 제거해버리고 싶다는 끔찍한 생각마저 들었다. 이제는 유리 황녀가 아니라도, 이미 클레어 헤더는 이 이야기의 메인 무대에 서서 자신과 여주인공 자리를 겨루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거기에 그녀 본인의 의지가 섞여 있지 않더라도, 이미 이 이야기는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 흐름을 끊어내기 위해 지금으로선 클레어 헤더의 죽음 밖에 답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리아를 더 불안하게, 한편으론 안도하게 했다.

아리아는 곧 흘러넘칠 것 같은 분노를 애써 삭였다.

‘……레이몬드 알렉 카지스.’

뒤늦게 엉망이 된 손톱에 시선이 간 아리아가 손톱을 정리할 만한 걸 찾고 있을 때였다. 창밖으로 스치듯 보인 낯선 인영을 돌아본 아리아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레이몬드 2황자가 이제 막 영주성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고민은 짧았다. 아리아는 그대로 몸을 돌려 문가로 걸어갔다. 초조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 억지로 여유로운 미소를 그려냈다.

시작부터 방해를 받아 뒤틀린 이야기를 바로잡기 위해선, 그 시작점을 다시 되돌리는 수밖에 없지 않나.

* * *

그날 레이몬드 2황자는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보좌관이라 밝힌 남자가 찾아와 레이몬드 2황자가 급한 일이 생겨 오늘은 밤늦게야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을 전해주었었다. 혼자 그 많은 음식들을 앞에 두고 저녁 식사를 마치고, 하녀들이 테이블을 전부 치우고 나간 뒤에도 얌전히 앉아 그를 기다리던 나는 그 소식을 전해 듣고 나서야 씻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하지만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어도 쉽게 잠이 들지 않았다. 잠은 오지 않고,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캄캄한 방안에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던 나는 결국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잠은 오지 않고, 목이 말라 물이라도 마시려 바닥에 발을 디디고 섰다. 날이 제법 차가워져 이제는 얇은 잠옷 차림으로 이불 밖에 나오니 몸이 으실으실 떨렸다.

나는 추위에 움츠러든 채 테이블로 다가가 물병을 집었다. 유리컵에 물을 따라 마시고 어느 정도 갈증이 가시자 나는 어두운 방 안을 한 번 슥 둘러보았다. 유리 황녀의 방만큼은 아니라도 쓸데없이 크기만 큰 방 안에 혼자 있자니 괜히 조금 무서워졌다. 춥기도 하고, 얼른 침대로 가 이불을 뒤집어써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발을 움직였다.

‘……?’

그런데 순간 지나치던 커다란 창 너머로 사람 그림자가 비친 것 같았다. 이렇게 늦은 시각에 밖을 돌아다니는 사람이라면, 영주성의 사병이거나 사람이 아닌 존재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딱히 유령의 존재를 믿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괜히 어두컴컴한 낯선 장소에서 혼자 있다 보면 없던 공포심도 생겨나는 것 같았다.

차라리 못 본 척 지나치자 생각하며 애써 창가를 외면하고 침대로 걸어가려던 나는 멈칫했다. 유령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그림자가, 묘하게 낯설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침을 한 번 꼴깍 삼키고 겨우 겨우 시선을 굴려 다시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처음엔 워낙 거리가 멀어 쉽게 상대를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구름에 가려져 있던 달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빛이 두 사람에게 닿는 순간 나는 무의식중에 창으로부터 뒷걸음질을 쳤다. 어느새 등 뒤로 벽이 닿았다.

달빛에 비친 화려한 청은색의 머리칼이 먼저였고, 뒤이어 달빛을 꼭 닮은 황금색 머리칼을 지닌 이의 뒷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확실하진 않지만 한순간 내가 본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휙, 나도 모르게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외면했다. 정말 유령이라도 본 사람처럼 창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나는 쿵쿵 뛰는 가슴에 손을 올렸다. 온몸이 울리는 것처럼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나는 의식적으로 창가를 쳐다보지 않으려 애쓰며 벽에 기댄 채 주르륵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왠지 몸에서 기운이 쭉 빠졌다. 침대로 가야 하는데,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몸이 다시 떨려왔다. 나는 조금이라도 체온을 보호하고자 다리를 당겨 팔로 꼬옥 끌어안고서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째서 그 두 사람이…….’

어째서…….

눈을 감고 있는데도 계속 두 사람이 서로를 끌어안고 있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지질 않는 듯했다. 머릿속을 맴돌며 계속해서 같은 장면만을 반복했다.

성녀 아리아에겐 리하르트 아델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레이몬드 2황자는…….

가슴 속에서 작은 벌레가 꾸물거리며 기어 나오듯 불쾌한 감각이 들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니,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무척 나빴다.

‘네가 기분이 나쁠 건 뭔데?’

순간 그런 나를 꾸짖듯 질문 하나가 날아들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내가 기분이 나쁠 게 뭐가 있다고.

겨우 정신이 들면서 헛웃음이 나왔다. 성녀에게 리하르트 아델이라는 연인이 있든 말든, 레이몬드 2황자가 그녀를 끌어안고 있든 말든. 그게 다 내가 무슨 상관이라고. 내가 무슨 자격으로 불쾌해하는 거냐고.

‘주제 파악 좀 해, 클레어 헤더.’

넌 그냥 유리 황녀의 변덕을 달래기 위한 소모품에 불과하니까.

스스로에게 쏘아붙이듯 한 충고에 가슴 부근이 따끔거렸다. 나는 그 통증을 잊고자 다리를 끌어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레이몬드 2황자도 그녀를 좋아하게 되는 걸까. 성녀 아리아는 같은 여자가 봐도 너무나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사람이니까, 레이몬드 2황자도 그녀를 좋아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나와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얘기지만.’

나는 차츰 정상 속도로 돌아오는 심장을 느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유리 황녀가 나를 버리려 했던 게 아니라 안심했었지만, 어쩌면 이번엔 레이몬드 2황자가 먼저 이 계약을 끝내자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생각했다.

일단 웃어야겠다, 전하께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 잘 됐다고, 진심을 담아 축하하며 그렇게 웃어야지.

나는 벽에 기대어 있던 등을 떼고 무릎에 얼굴을 깊이 묻었다. 혼자 그렇게 별 의미도 없는 생각들을 하던 도중 피곤한 나머지 그대로 사르르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똑똑.

꽤 깊이 잠들었다 살풋 잠에서 깼을 즈음이었다.

똑똑똑.

아직 남은 수마에 몸을 맡긴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선가 자꾸만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와 나의 달콤한 수면을 방해했다.

똑똑, 하고 들려오던 소리는 점점 거칠어지더니 이내 쿵쿵! 하는 굉음으로 변했다.

나는 그 소리에 놀라 움찔 몸을 떨면서도 쉽게 눈을 뜨지 못했다. 왠지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눈꺼풀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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