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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2) (65/152)

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2)

“얘기 끝났으면 그만 갈까요?”

나는 성녀가 내게도 다가와 말을 걸어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황성에서 그렇게 헤어진 이후, 처음으로 마주하는 거니까. 갑자기 듀란 영지에서 마주하게 된 나를 보며 깜짝 놀라며 어떻게 된 거냐 물어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녀는 마치 나란 존재 자체가 아예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황성에서 만나 내게 다정하게 말을 걸어오고, 자신이 머무는 궁에서 비를 피하게 해주고, 나를 위해 진지하게 충고해줬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한순간 그날의 모든 기억들이 내가 헛것을 봤거나 꿈을 꿨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오른쪽 팔을 붙들고 있던 힘이 훅 사라졌다.

성녀의 나직한 물음에 리하르트 아델은 고집스럽게 붙들고 있던 내 팔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단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성녀에게로 돌아갔다. 분명 내 시선을 느꼈을 텐데도 내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가 나타났으니, 그 외엔 어떤 것도 관심이 없다는 듯이.

그 뒷모습에서, 잊고 있던 상처가 다시 들쑤셔서 통증을 호소하는 기분 나쁜 감각이 가슴을 스쳤다.

성녀는 그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사랑하는 이를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리하르트 아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내게 등을 돌린 채 성녀만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두 사람은 연인들이 그러하듯 다정하게 손을 잡은 채 걸어갔다.

보고 싶지 않은데, 더는 상처 받고 싶지 않은데. 멍청한 나는 멀어져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진짜 가기 싫었어?”

아마 시온이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면, 나는 두 사람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을지도 몰랐다. 꼴사납게도.

그녀가 머뭇거리며 던진 질문에 나는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오늘따라 유독 아무렇지 않은 듯 웃는 게 힘이 들었다.

“네, 그리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이만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미안, 몰랐어. 내가 좀 성격이…… 그렇거든. 이래서 내가 친구가 없나 봐.”

답지 않게 풀이 죽은 그녀에게 나는 괜찮다며 다시 웃었다.

“혼자 아까 그 방으로 돌아갈 수 있지?”

“네.”

“그래, 그럼 나중에 놀러 갈게.”

시온은 약간 걱정이 되는 듯했지만 설마 영주성 안에서도 무슨 일이 있진 않겠지, 하는 얼굴로 돌아섰다. 나는 그녀가 저만큼 걸어갈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몸을 돌려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어서 돌아가야 해, 레이몬드 2황자가 돌아와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그를 기다리게 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빨리하는데, 이상하게 점점 다리가 느려졌다. 뛰듯이 걸어가던 발이 점점 느려지더니 결국엔 제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낯설지 않은 통증과 익숙한 감정들이 넘실거리며 내 안을 좀먹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쓸모없는 상념과 부질없는 기대, 실망과 후회, 역겹고 미련스러운 감정들에 나는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흘렸다.

아직도 뭘 기대하고, 실망할 게 남아있었나. 단순한 변덕에 휘둘려 울고불고할 만큼 스스로가 멍청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생각할 가치도 없는 것.

나는 찰나일지라도 그 순간 내가 느꼈던 모든 어리석고 비참한 감정들을 털어내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리고 멈췄던 발을 다시 움직여 원래 목적지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 *

“……아리아.”

먼저 걸음을 멈춰선 쪽은 리하르트였다.

클레어 헤더를 못 본 척 두고 만찬장을 향해 걸어가던 도중이었다. 영주의 시끄러운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는 만찬장까지 얼마 되지 않는 거리를 남겨둔 채 그가 아리아를 불러세웠다.

제 이름을 부르는 연인의 목소리에 아리아가 그를 돌아보았다. 웃고 있는 것도, 화를 내는 것도 아닌, 쉽게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청은색의 눈동자가 똑바로 그를 응시해오고 있었다.

리하르트는 저도 모르게 그 투명한 눈동자를 피해 시선을 떨어뜨리며 말했다.

“어째서 아무것도 묻지 않습니까?”

“제가 묻게 되면.”

곧바로 대답이 나온 것과 달리 아리아는 뒷말을 삼키듯 잠시 텀을 두었다. 여전히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 눈동자를 하고서, 그녀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솔직한 답을 주실 건가요?”

비난이나 원망보다는 슬픔이 짙게 묻어나는 음성이었다.

“내가 보는 앞에서, 다른 여인에게 달려가는 당신을 보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리하르트는 겨우 고개를 들어 제 연인을 바라보았다. 희미한 미소마저 사라진 눈동자가 물기를 머금은 채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청은색의 눈동자 속에 일렁거리는 감정의 정체를 알아본 그의 가슴 속에서 죄책감이라는 감정이 고개를 삐죽 들었다.

“당신은 알까?”

리하르트는 다시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아리아를 두고 클레어 헤더에게 다가갔던 자신의 행동에 대한 자책이나 그녀에 대한 미안함에 따르는 죄책감이 아니었다.

한순간이었지만 눈앞에 있는 그녀가 그동안 자신이 소모품 취급하며 내쳤던 여인들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자신과 똑같은, 혹은 그 이상의 무게로 제게 사랑을 요구하던 그녀들과.

찰나였지만 그때의 기억들이 겹쳐지며 저도 모르게 살짝 짜증이 치밀었다. 눈앞의, 제가 유일하게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여인을 앞에 두고서 말이다. 처음으로 평생을 지켜주고 싶다고 생각했고, 처음으로 온 마음을 바쳐 사랑하겠노라고 신께 맹세한 여인을.

“아리아.”

리하르트는 잠시라도 아리아를 두고 그따위 감정을 느낀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다 여겼다. 그는 금세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안타까웠다. 아니, 안타깝다고 여기려 했다.

그래서 다급히 손을 뻗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벌써 내게 질렸나요?”

아리아가 커다란 눈동자 가득 눈물을 매단 채로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직시해왔다.

“다시 그녀에게 돌아가고 싶은 건가요?”

그녀를 끌어안으려 뻗었던 팔이 허공에서 멈췄다.

리하르트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리아가 말한 그녀가, 클레어 헤더임은 굳이 이름을 정확하게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문제는 아리아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느냐는 거였다.

누구지. 대체 어떤 빌어먹을 새끼가 그녀에게 클레어 헤더와의 지난 관계에 대해 말해준 걸까.

그가 당황하고, 화가 난 기색을 숨기지 못하자 아리아의 아름다운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리아는 더는 그의 얼굴도 보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리아.”

리하르트의 눈동자도 일그러졌다.

그는 다시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하지만 그가 다가온 만큼 아리아가 뒤로 물러났다. 명백한 그녀의 거부에, 리하르트의 움직임이 멎었다.

“미안해요, 돌아가서 쉬고 싶어요.”

아리아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숙인 채 그에게 말했다.

“혼자…… 돌아가게 해줘요.”

그러고는 그가 붙잡을 틈도 주지 않고 돌아서서 혼자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두 사람의 분위기에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눈치를 보던 성기사들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뒤를 따랐다.

리하르트는 점점 멀어지는 아리아의 작은 뒷모습을 응시하다 그녀에게 차마 뻗지 못했던 손을 힘주어 움켜쥐었다.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는 느낌이었다.

이제는 그 자신도 스스로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내버려 두지 그랬어요.

그는 무의식중에 아리아가 아닌, 클레어가 사라진 방향을 돌아보았다.

클레어 헤더와 재회한 이후 줄곧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건 새파란 불꽃이 이는 듯했던 눈동자였다. 그 눈동자가 뇌리에 박힌 채 사라지질 않았다.

―지금도, 그때도.

처음 보는 얼굴, 처음 듣는 목소리, 모든 게 낯설기만 했다. 마치 아예 다른 사람을 보는 듯했다.

―그냥 내버려 뒀으면, 그 개새끼들에게 윤간을 당하든, 어디 끌려가서 노예로 팔려가든, 그러다 어디선가 개죽음을 당하든 말든, 내버려 뒀으면 됐잖아.

리하르트 아델이라는 남자의 존재가, 그와 마주하고 있는 것부터가 끔찍하다는 듯 증오와 혐오가 뒤섞인 눈동자였다. 소리를 지르며 악다구니를 쓰는 것도 아닌데, 차분하게 이어지는 목소리가 더 격한 증오를 드러내는 것 같았다.

이렇게 화를 낼 줄도 아는 여자였나.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 이 여자가 내가 알고 있던 그 여자가 맞는지.

늘 바보같이 제가 하자는 대로만 하고, 제 말 한 마디에 울고 웃고, 한심할 정도로 제게 휘둘리기만 하던 여자.

리하르트는 처음 클레어를 만났던 날의 기억을 되돌렸다. 오늘처럼 웬 개새끼들에게 끌려가던 그녀를 제가 구해주었고, 구원자나 다름없는 제게 그녀는 눈에 훤히 보일 정도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처음엔 리하르트도 그녀의 그 아름다운 외모나 어딘가 처연하고 안쓰러운 분위기에 이끌리기도 했었다. 오직 저만을 보며 해사하게 웃고 순종적으로 구는 그녀가 가끔은 사랑스럽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니 그동안 자신이 만났던 여자들 중 가장 긴 시간을 만나왔던 것일 터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깊어지고 무거워지는 그녀의 마음은 그에게 불편한 불쾌함만을 안겨주었다. 그를 위해서라면 목숨마저 바칠 기세의 무거운 마음은, 결코 그가 바란 것이 아니었다.

리하르트는 그녀가 귀찮아졌다. 무겁고, 성가셨고, 진력이 났다.

이 바보 같을 정도로 순종적인 여자에게 질려가던 중에 아리아를 만났다.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하게 된 여인, 평생을 걸고 지켜주고 싶은 여인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는 곧바로 클레어 헤더와의 관계를 정리했다. 그리고 제 몸과 마음을 전부 아리아에게 바치기로 신께 맹세했다. 그리고 클레어 헤더라는 이름 자체를 깨끗이 잊어버렸다.

레이몬드 2황자와 함께 얽혀 다시 그 이름이 들려오기 전까지는.

솔직히 이런 생각이 드는 자신이 얼마나 치졸하고 우스운지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럼에도 리하르트는 묻고 싶었다.

레이몬드 2황자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저를 향해 증오로 새파랗게 타오르던 눈동자가 그토록 슬픈 빛을 띠었는지. 저를 두고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으면서, 어째서 그토록 서러운 얼굴로 그 남자를 피해 달아났는지. 레이몬드 2황자는 어째서 그토록 필사적으로 너를 쫓아 달려간 건지.

그리고 제게 자신 외엔 평생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거라고 했던 말들은 전부 거짓이었는지.

리하르트는 피식, 스스로를 향해 조소했다. 지금 자신은 뭘하는 걸까 싶으면서도, 묘하게 이 상황이 낯설지 않았다.

잘 생각해보니 자신은 어릴 때부터 그랬다. 갖고 있던 장난감에 쉽게 질리고, 늘 새로운 장난감을 원했다. 새로운 장난감이 생기면 기존에 갖고 있던 장난감은 상자 구석에 처박아 둔 채 눈길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제 사촌이나 친구들이 제가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장난감에 관심을 가지거나 다가가 손에 쥐는 순간 괜한 독점욕이 솟아났다. 그는 먼지가 쌓인 장난감을 도로 빼앗아 와 아무도 보지 못하게 옷장이나 침대 밑에 감춰두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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