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엇갈리는 마음의 행방 (1)
“……아.”
나는 깊이 탄식했다.
레이몬드 2황자가 이쪽으로 식사를 가져다 달라 요청하고는, 잠시 어딜 다녀오겠다며 방을 나선 사이 나 홀로 욕실의 거울 앞에 막 섰을 때였다.
거울 속에 비친 여자는 그야말로 만신창이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고, 옷은 흙먼지로 뒤덮여 지저분했고, 퉁퉁 부은 얼굴에, 목 부근에는 원래 상처가 있던 자리에 허여멀건한 연고까지 덕지덕지 발려져 있어 더 괴상해 보였다.
나는 이런 상태로 레이몬드 2황자의 앞에,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 앞에 태연히 서 있었던 건가. 나는 거울에 이마를 쿵 박으며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는 얼른 흙먼지로 엉망이 된 옷을 벗고 물이 담긴 통으로 다가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뽀득뽀득 소리가 날 정도로 문질러 깨끗이 씻었다.
씻는 도중 왼쪽 발목에 감긴 붕대가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레이몬드 2황자 덕분에 통증도 완벽히 가셨으니 붕대도 딱히 필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몸을 숙여 붕대를 풀어낸 뒤 욕실 구석에 내려놓았다.
‘그런데 어차피 마법으로 치료해줄 거였으면 약을 바르거나 붕대를 감기 전에 해주는 게 낫지 않았을까.’
붕대를 풀고 멀쩡해진 발을 움직여 걸으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녀들에 의해 내 발목에 붕대가 감길 때에는 분명 어지간히 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마법은 사용하지 않는 게 낫다고 했으면서, 뒤늦게 마법을 써서 나를 치료해준 레이몬드 2황자의 행동에 계속 의문이 남았다.
마법을 쓰지 않는 게 좋다고 말했으면 끝까지 도와주지 않는 게 맞고, 어차피 도와줄 거였으면 붕대를 감기 전에 도와주는 게 맞지 않나.
나야 뭐 이러나저러나 그에게 고마울 뿐이지만, 그래도 뭔가 조금 걸리는 기분이었다.
꼬르르륵.
그 순간 잊고 있던 배고픔이 밀려들었다. 나는 최대한 빨리 몸을 씻고 욕실에 비치된 커다란 수건으로 몸을 말린 후 드레스룸으로 걸어갔다. 드레스룸의 옷장 안에는 다행히 내 몸에 얼추 맞는 드레스들이 있었다. 그중 제일 무난한 디자인의 드레스를 입고 나오자 때맞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가로 걸어가 문을 여니, 아까 봤던 하녀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와 방 가운데 테이블을 놓고 그 위에 음식들을 차리기 시작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음식들이 눈 앞에 펼쳐지자 다시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하녀들은 소리를 듣고도 모른 척 조용히 제 할 일을 하는 느낌이었다. 그나마 이 자리에 레이몬드 2황자라도 없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창피함에 얼굴을 붉히며 양팔로 배를 감쌌다.
하녀들은 금세 제 할 일을 하고는 내게 공손히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나는 테이블이 무너지진 않을까 싶을 정도로 음식이 가득 차려진 눈앞의 절경을 응시하며 침을 꼴깍 삼켰다.
레이몬드 2황자가 잠시 다녀오겠다고 했으니 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굳이 나와 같이 식사를 할 이유가 있나 싶기도 해서 망설여졌다. 그 와중에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는 점점 더 우렁차게 울려 퍼져서 나를 곤혹스럽게 했다.
눈앞에 진수성찬을 두고 밀려드는 배고픔에 꼴깍꼴깍 넘어가는 침만 50번쯤 삼켰을 즈음이었다.
왠지 닫힌 문 너머가 조금 소란스러웠다. 복도에서 누군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레이몬드 2황자가 돌아온 걸까. 너무 배가 고파서 초조해진 나는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오길 기다리지 않고 다가가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전하, 저녁 식사가…….”
“어?”
그런데 막상 열린 문 너머로 마주하게 된 건 레이몬드 2황자가 아니라, 사막과 같은 황량한 땅에서 나를 구해줬던 은인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문을 열고 나오는 내게 무심한 시선을 가져오다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높이 틀어 올려 묶은 붉은 머리칼과 적갈색의 눈동자가 이제는 제법 익숙해져, 나도 살짝 반가운 빛을 띠며 그녀에게 다가섰다.
“너, 어떻게 된 거야? 여관에는 온 적도 없다 그러고, 갑자기 사라져서 얼마나 찾았다고! 지금 너 찾으려고 사방팔방에 사람을 보내놨어.”
그녀는 타박하듯 내게 말하고는 뒤에서 따라오던 남자들에게 뭔가를 지시했다. 대충 들어보니 아마 나를 찾으려고 보내둔 사람들에게 수색을 멈추고 쉬어도 좋다는 명령을 내리는 듯했다. 그녀의 명령에 남자 중 하나가 어디론가 급히 달려갔다.
“진짜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사라지더니 죽어도 오기 싫은 기색이던 영주성 안에 떡하니 있고.”
그녀는 날카로운 눈으로 내 몸 여기저기를 확인하더니 특별히 다친 곳은 없다는 걸 알고서 한결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말도 없이 사라진 나에 대한 불만은 사라지지 않는 듯 그녀가 미간을 모으며 물어왔다.
갑자기 너무 많은 일들이 휘몰아치는 바람에 그녀에 대한 생각은 전혀 못하고 있던 나는 미안함이 가득 담긴 얼굴로 그녀에게 그동안 내게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레이몬드 2황자나 리하르트 아델에 대해 언급하는 건 조금 조심스러워서, 그 부분은 그저 우연히 길을 지나던 높으신 분이 도와주신 것이라 뭉뚱그려 말했다.
“너 진짜 운이 좋구나. 그 허허벌판의 땅에서 날 만난 것부터가 기적이긴 했지.”
그녀는 자신 또한 나와 우연히 만나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준 것을 기억했는지 엉성하기 그지없는 내 설명도 믿어주는 눈치였다.
“이렇게 다시 만난 걸 보니 확실히 우린 운명이 틀림없어.”
낯선 곳에서 아는 얼굴을 만났다는 사실이 반가운 듯 그녀가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자, 자. 이리 와. 마침 영주의 만찬에 초대받았거든. 너도 같이 가자.”
“네? 아뇨, 잠깐만요!”
그러고는 내 의사를 묻지도 않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당황한 나는 팔을 당겨 멈춰 서려 했으나, 저 작은 몸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 건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보기보다 힘이 장사인 그녀에게 질질 끌려가다시피 하며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괜찮아, 괜찮아. 여기 영주가 날 엄청나게 좋아하거든. 너 하나 끼워달라고 하는 건 일도 아니야. 게다가 지금 여기 성녀며 현 마탑주며 유명인사들이 다 모여있다니까? 너 그 사람들을 한 자리에서 볼 이런 기회가 잘 없다?”
“저, 저기……!”
“맞다, 너 혹시 전과자야? 쫓기고 있고 그래서 영주성 안에 들어오는 걸 꺼려했던 건가?”
겨우 걸음을 멈추는가 싶더니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 날아들었다. 나는 여기서 그냥 사실 그렇다고 대답해서라도 그녀를 멈춰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또 대체 무슨 죄를 저지른거냐 어떻게 그런 짓을 하게 된 거냐는 질문까지 날아들 것 같아 포기했다.
“그런 건…… 아니지만.”
“아, 그럼 괜찮겠네. 가자, 가자. 맛있는 거 많아, 거기.”
“아뇨, 저는 배고프지도 않고 가고 싶지 않…….”
“그러고 보니 우리 아직 통성명도 제대로 안 했지?”
처음 만났을 땐 이 정도로 남의 말을 듣지 않는 느낌은 아니었는데, 그녀는 오늘따라 유독 더 심한 마이페이스 기질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름이 뭐야?”
“클레어…… 입니다.”
내 쪽을 돌아보지도 않고서 통성명을 원하는 그녀에게 나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성은 빼고 이름만 밝혔다.
“난 그냥 시온이라고 불러 줘.”
“저, 시온님. 저는…….”
“우웩, 시온님이 뭐야? 그냥 시온이라고 불러. 소름 끼쳐.”
나는 가고 싶지 않다고 명확하게 내 의사를 밝히려 했으나, 또다시 말이 막혔다.
그녀는 만찬이 기대된다며 걸음을 더 빨리했다. 이대로면 정말 성녀와 리하르트 아델이 한 자리에 있는 만찬장에서 숨이 턱턱 막히는 식사를 하게 될 것 같았다. 그것만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나는 다리에 힘을 주고서 버티려 애쓰며, 다시 한 번 그녀에게 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하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켰다.
“시온, 저는……!”
긴 팔이 등 뒤에서 뻗어와 내 손목을 강하게 붙들었다. 넓고 단단한 가슴이 등 뒤에 닿아왔다. 낯설지 않은 상황에 순간 레이몬드 2황자가 다시 돌아와 준 걸까 안도한 찰나, 그보다 더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뭐야, 이건 또.”
익숙하지만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나는 그대로 얼어붙은 듯 굳어버렸다.
어째서, 또, 이 사람이.
“당신이야말로 뭐야. 얘 알아?”
시온의 못마땅한 음성에 나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호위가 경계 어린 눈으로 그녀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시온은 붙잡은 내 손목을 놓지 않고 있어 모양새가 그리 좋진 않았다.
나는 다급히 두 사람의 손을 떼어내고 물러나려 했으나, 그런 내 노력을 무시하듯 둘 다 꿋꿋하게 내 팔을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살짝 울컥했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상태 그대로 상황 중재에 나섰다.
“두 분 다 진정하세요.”
그제야 묵묵히 서로를 노려보던 두 사람이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 계신 분은 시온님으로 사막에서 절 구해주신 분이고. 여기 계신 분은 리하르트 아델 공작 각하세요.”
“사막?”
“공작?”
내가 나서서 서로의 신분과 둘 다 내게 해를 끼칠 사람이 아니라는 걸 밝혔음에도 둘은 서로를 노려보는 시선을 쉽게 거두지 않았다. 서로가 영 마음에 안 드는 눈빛이었다. 혹은 전혀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시선 같기도 했다.
“난 이 애랑 만찬에 가던 중인데 왜 방해죠?”
“누가 봐도 가기 싫어하는데 억지로 끌려가는 것 같아서, 또 납치라도 당하는 중인가 했지.”
명백한 시비조인 시온의 질문에 그 또한 빈정거리는 투로 답했다.
나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리하르트 아델을 바라보았다. 시온의 태도는 이해가 가지만,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질 않았다. 행렬에서 뛰쳐나와 나를 쫓아왔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 이해하기 힘들었다.
기껏 구해주고도 내게 싫은 소리만 듣지 않았던가. 그런 소리를 듣고도 왜 또 지금 내 앞에 나타난 걸까. 마치 나를 걱정하기라도 한 것 같은 모습으로.
“지금 누굴 납치범 따위로 보는-.”
“리하르트.”
리하르트 아델의 삐딱한 태도에 시온이 험악한 분위기로 입을 열었을 때였다. 조용하고 나긋하지만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힘을 지닌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시온의 호위까지 포함해 네 사람이 동시에 돌아본 곳에는 성녀 아리아가 잔잔한 미소를 띤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언제부터 저기에 있었던 거지. 갑작스러운 그녀의 등장에 놀란 시선을 던지는데, 우습게도 리하르트 아델도 그제야 그녀의 존재를 기억해낸 듯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이었다.
설마 성녀와 같이 있던 중에 나한테 온 거였나.
나는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 사람이 미친 걸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