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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운명이 이끄는 곳으로 (13) (63/152)

03. 운명이 이끄는 곳으로 (13)

아직 본인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한 감정임에도, 눈앞의 여인을 갖고 싶어 견디지 못하겠다는 눈이었다.

제가 필요없다며 버렸으면서, 그 가여운 사람을 두고 매정하게 다른 여인에게로 가버렸으면서. 이제 와서 저따위 시선으로 클레어 헤더를 바라보는 남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레이몬드는 그런 두 사람을 멀찍이 떼어놓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저 남자를 그녀로부터 떼어내고, 두 번 다시 서로를 볼 수 없도록 거대한 벽을 세워버리고 싶었다.

평생 저 빌어먹을 남자 외에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거라 말하던 그녀의 모습이, 뒤늦게 그녀에게 흥미를 갖기 시작한 남자의 눈동자가, 거슬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거슬리고, 불쾌하고, 화가 났다. 제 안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를 구석으로 몰아붙였다.

답답했다.

화가 났다. 저 남자뿐만 아니라, 그녀에게도.

‘저딴 남자에게 마음을 내어줄 바에야 차라리 나를…….’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나가던 레이몬드는 멈칫했다. 어딘가 분노의 방향을 잘못 잡은 것 같았다. 그는 생각과 달리 이상하게 뻗어나가는 감정을 급히 잡아챘다.

아니, 그래선 곤란하지.

애초부터 유리로 인해서, 유리만을 위해서 형성된 관계가 아니던가. 유리가 원치 않는 순간이 오면 서로 미련 없이 돌아서기로 약속한 관계니까. 그런 약속이었고, 그런 계약이니까.

자신이든, 그녀든, 어느 한쪽이 계약된 내용 이상의 감정을 가지는 건 곤란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걸까.

그녀가 리하르트 아델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이 바보 같고 답답하다고 여기는 마음은 처음부터 있었다. 하지만 그건 이성으로서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서 그녀가 어리석은 사랑을 끝내고 자신의 행복을 찾아갔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연민에 가까운 그 마음과 리하르트 아델의 자리에 자신을 대신 끼워넣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처음 클레어 헤더를 봤을 때부터 그녀가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인식은 있었다.

유리 녀석이 지나치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 신기하여 그녀에게 필요 이상의 흥미와 관심을 두기도 했다. 제가 보여준 간단한 마법 하나에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는 모습이나 마차를 타고 가는 내내 바깥의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옆모습이 꽤 귀엽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유리 녀석의 생떼로 인해 연회에 참석하게 된 그녀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맞이하러 갔을 때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사랑스럽고 매혹적인 그녀의 모습에 잠시 넋을 잃기도 했었다. 한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는 듯한 그 감각이 불쾌하여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외면하기도 했다. 솔직하게 오늘 정말 예쁘네요, 하고 말하지 못한 걸 몇 번이고 후회한 기억이 있다.

제가 내민 손 위에 그녀의 손이 얹어지고, 그녀와 가까이 있는 내내 심장이 시끄럽게 울려대서 짜증이 치밀었다. 제 뜻대로 통제되지 않는 몸이 낯설고 불쾌했다.

그래서 잠시 거리를 두고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는 사이, 홀로 남겨져 있던 그녀는 그새 자신의 존재를 잊고 빌어먹을 리하르트 아델에게로 달려가고 있었다.

순간 눈이 돌았다고 하는 게 맞을 터다. 정신을 차려보니 달려가는 그녀를 붙들기 위해 저도 달리고 있었다. 그녀가 연회장을 빠져나가기 직전 간신히 그녀의 허리를 낚아챘을 때, 제 품을 빠져나가려 바르작거리는 그녀를 힘주어 제 곁에 붙들어두었을 때에야 겨우 숨이 쉬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성녀 아리아와 함께 리하르트 아델이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을 바라보며 깊은 상처를 입고 흐려지는 클레어 헤더의 눈동자를 본 순간 또다시 참을 수 없을 만큼 짜증이 치밀었다.

저를 버린 남자가 아닌가. 지금도 눈앞에 다른 여인을 끼고서 제 앞에 나타났지 않은가.

편할 대로 이용당하고 버려졌으면서, 그토록 상처 입은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왜 아직도 저런 남자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어서 화가 났고,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허락도 없이 제 것인양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 멋대로 말하고 행동했다. 그로인해 그녀가 더 큰 상처를 받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도 있었지만, 그때의 레이몬드는 침착해 보이는 겉과 달리 반쯤 이성을 잃고 판단력이 흐려져 있었다.

연회가 끝난 후, 또다시 긴 후회가 이어졌다. 그녀에게 함부로 손을 댄 것, 그녀의 의사는 아랑곳않고 제멋대로 군 것을 포함해 연회장에서의 기억은 전부 그의 인생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최악이었다.

이후 시간이 지나 겨우 그날의 일을 사과할 수 있게 되어 조금은 죄책감을 덜었다고 생각했으나, 그 직후 그녀가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스스로 황성을 떠나 숨어버린 것인지, 누군가에 의해 납치된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자신의 행동들을 되돌아봐야 했다.

그녀를 찾지 못하는 시간 동안 그는 줄곧 후회하고, 반성하고, 그런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나서 때때로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중요한 서류를 구겨버리질 않나, 멀쩡한 만년필을 부러뜨리고, 죄 없는 유리컵을 던져 깨뜨리는 등 스스로가 보기에도 문제가 있다 싶을 만큼 신경질적으로 변해갔다.

왜 나를 떠났느냐고, 묻고 싶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책임을 묻기 이전에, 처음부터 유리를 사이에 둔 계약이라는 것조차 잊고, 그저 어째서 나를 떠난 거냐고 묻고 싶었다.

그렇게나 내가 싫었던 거냐고, 그렇게나 내가 닿는 게 끔찍했던 거냐고. 그래서 당신이 그토록 좋아해 마지않던 유리와 알렌마저 외면한 채 떠난 거냐고. 묻고 싶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태연한 척했지만, 사실은 화가 나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에게 화가 났지만, 그녀에게 화를 낼 순 없었다. 제겐 그녀에게 화를 낼 자격이 없었으니까. 아무리 연인인 척 그녀의 곁에 있어도, 실상은 결국 하나의 목적을 위한 계약으로 얽혀있는 관계일 뿐이니까. 그들은 진짜 연인이 아니니까.

클레어 헤더는 레이몬드 알렉 카지스가 아니라 리하르트 아델을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더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그녀에게 이끌리고 있었으면서도, 그걸 인정하지 않았던 거다.

처음부터 그녀는 평생 단 한 사람만을 사랑할 것이라 말했었으니까. 제게 내어줄 마음 따윈 단 한 조각도 존재하지 않는다 선을 긋고 있었으니까. 그의 발 밑에 선을 긋고 여기서 더 넘어오지 말아 달라 요구하고 있었으니까.

그녀를 한 번 시야에서 놓치고, 다시 되찾았던 순간에도 클레어 헤더는 리하르트 아델의 곁에 있었다.

그때 사실 그는 그녀가 아주 작고 사랑스러운 새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랬다면 그 작은 새의 다리를 묶고, 날개를 부러뜨려 새장 속에 가둬둘 수 있을 텐데.

리하르트 아델도, 다른 누구도 보지 못하게 자신의 성안 깊숙이 가둬두고 평생 저만 바라보게 할 수 있을 텐데. 그렇게 할 수 없음에 짙은 아쉬움을 느꼈다.

억눌러 두었던 어둡고 짙은 독점욕이 고개를 들어 제 존재를 알려왔다.

‘하.’

레이몬드는 속으로 짧은 숨을 삼키며 저를 향한 비웃음을 흘렸다.

미숙해도 이렇게 미숙할 수가 있나. 어쩌면 자신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멍청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그때 깨달았어야 했는데.’

클레어 헤더를 리하르트 아델에게서 떼어놓고, 반강제로 그녀를 다시 제 품으로 되돌려놓고, 그녀로부터 자신이 끔찍하게 싫어서 떠난 게 아니라는 걸 알고 나서야 줄곧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던 어둡고 음습한 감정들이 가라앉는 걸 느꼈을 때 깨달았어야 했는데.

‘아둔하고 멍청하기 그지없는 레이몬드 알렉 카지스.’

레이몬드는 큰소리로 스스로를 비웃어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다시 눈앞에 선 리하르트 아델에게로 신경을 돌렸다.

더는 그녀에게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에 레이몬드가 원했던 건 「그리하겠다」는 짧고 간결한 대답이었다. 그런데 돌아온 것은 명확하지 않은 모호한 답으로, 그를 더욱 불쾌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쪽이 하고 싶은 말은 알겠지만 언제든 오늘과 같은 일이 있으면 똑같이 행동할 거라고 말하는 듯한 답변이었다.

“대답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데.”

레이몬드는 입가의 미소를 완전히 지우고서 서늘한 눈으로 리하르트를 노려보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그의 목소리에 리하르트도 내심 놀랐다.

‘이렇게 쉽게 감정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순간 리하르트의 머릿속도 혼란스러워졌다.

“위험에 처한 이를 보고도 그냥 무시할 순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내 표정을 감추고 무덤덤한 어조로 답했다.

“그 순간 전하께서 곁에 없으면, 어찌할까요.”

여전히 겉보기에만 순응하는 척하는 태도를 보이며 리하르트가 도전적으로 말을 던져왔다.

레이몬드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이것 봐라? 하는 마음에 그의 말투도 곱게 나가지 않았다.

“이제 두 번 다시 그럴 일 없을 테니 거기까진 공작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저는 만약의 경우를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평소와 다른 건 레이몬드 뿐만이 아니라 리하르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쉬이 물러나지 않고 말을 받아쳐 오는 그에게 레이몬드가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거의 차이가 나지 않을 만큼 비슷한 키의 두 사람은 눈높이가 똑같았다. 똑바로 리하르트의 눈을 직시하는 레이몬드의 눈동자가 한순간 원래의 빛을 잃고 어둡게 빛났다.

멍청한 자신이 계속 몰랐다면 모를까, 이미 제 감정을 깨닫고 인정하기 시작한 그는 더 이상 리하르트 아델을 향한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사냥을 시작하기 직전의 맹수처럼 고요히 가라앉아 섬뜩하게 빛나는 그 시선에 리하르트는 무심코 한 걸음 뒤로 물러설 뻔했다.

“그냥.”

“…….”

“무시해.”

겨우 발을 제자리에 붙들어놓은 리하르트의 귓가로, 차갑게 뇌까리는 음성이 경고해왔다. 이 이상 자신의 것에, 자신의 영역에 허락도 없이 멋대로 발을 들이지 않을 것을.

어떠한 대답도 없이 무표정한 눈으로 제 시선을 받아내는 리하르트를 보며, 레이몬드가 짧게 웃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몸을 틀어 리하르트의 옆을 스쳐 걸어갔다.

“그대는.”

완전히 몸을 틀기 직전 레이몬드의 손이 격려하듯 리하르트의 어깨를 툭 쳤다.

“그대의 연인에게나 신경 쓰도록.”

얼마 안 되는 대화를 나누는 동안 줄곧 잊고 있던 여인을 상기시키는 레이몬드의 말에 리하르트의 등이 딱딱하게 굳었다.

충격을 받은 듯 얼어붙은 리하르트의 옆얼굴을 시야에 담은 레이몬드의 미소가 짙어졌다. 이제야 조금 속이 풀리는 듯했다. 그는 그대로 더는 볼 일이 없다는 듯 리하르트를 내버려둔 채 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래, 몰랐으면 모를까. 알아버린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저딴 남자에게 마음을 내어줄 바에야 차라리 나를…….」

무의식중에 울컥 치밀어 올랐다 다급히 삼켰던 뒷말을, 레이몬드는 가만히 이어보았다.

‘나를 선택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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