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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운명이 이끄는 곳으로 (12) (62/152)

03. 운명이 이끄는 곳으로 (12)

―아직도 못 찾았어? 오빠 뭐했어? 왜 못 찾는데! 오빠 먼치킨이잖아! 세계관 최강자라고 돼있었는데 그거 다 구라야 뭐야! 왜 아직도 못 찾는데! 왜!

―형슈니이이임…….

차분해진 상태로 대화를 나누려던 시도는 유리가 알 수 없는 단어들을 섞어가며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러대고 뒤이어 알렌이 엉엉 소리 내어 우는 바람에 도저히 불가능해졌다.

매번 이런 식이다 보니 클레어가 없는 곳에서 따로 연락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가뜩이나 지금 몸도 좋지 않은 그녀까지 펑펑 울어대서 한동안 눈물바다가 됐을 테니까.

레이몬드는 하늘이 무너진 듯 엉엉 울어대는 동생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두 아이가 가장 원하는 말부터 꺼내 들었다.

“찾았어.”

순간 거짓말처럼 울음소리가 뚝 그쳤다.

“헤더 영애 찾았으니까, 둘 다 진정 좀 해.”

마력구에 얼굴을 너무 가까이 들이댄 탓에 유리의 눈동자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커다랗게 뜨여진 눈동자에 기쁨과 안도감이 차오르는 것만은 확실히 보였다.

히끅, 콧물을 훌쩍이는 소리에 이어 알렌의 딸꾹질 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울렸다.

―지, 진짜?

놀란 눈을 끔뻑이던 유리는 마력구에 얼굴을 파묻을 것처럼 들이대며 물었다.

―어디 다친덴 없어? 괜찮아? 어디서 찾았어? 언니 지금 어디 있어?

그러고는 잠시 머뭇거리다 조그맣게 질문을 하나 더 덧붙였다.

―왜, 왜 우릴 떠났대?

그 말에 레이몬드가 멈칫하며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자, 유리의 얼굴이 다시 울상이 되었다.

―나 때문이래? 내가 싫어진 거래? 이제 내 얼굴도 보기 싫대?

“그건 약간의……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야.”

금세라도 다시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동생을 보며 그가 얼른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무슨 오해?

초조하게 계속 질문을 던져오는 여동생의 태도에 불안감이 한껏 묻어나고 있었다. 레이몬드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고는 담담히 말을 내뱉었다.

“유리 네가 아니라, 내가 문제였어.”

그렇게 대답하면 곧바로 우리 언니한테 뭔 짓을 한 거냐고 따져 물어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유리에게선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불안하게 떨리던 눈동자가 묘하게 안도하는 기색마저 보였다.

레이몬드의 시선이 마력구를 잠시 떠나 정면으로 향했다. 복도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하녀들이 그를 발견하고는 얼른 벽으로 붙어 머리가 땅에 닿을 듯 허리를 숙이고 섰다.

“일단 그건 나중에 천천히 얘기하기로 하고.”

지금 걷고 있는 장소가 그의 개인 집무실이 아니라 보는 눈이 많은 복도라는 걸 인지한 그가 더는 대화가 이어지지 않도록 말을 잘랐다.

“지금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곳이 듀란 영지야. 너도 들어서 알겠지만, 네 번째 문이 열린 남북부의 땅이기도 하고. 실드가 아직 불안정해서 당장은 내가 이 땅을 떠날 수가 없어. 그래서 지금은 그쪽으로 헤더 영애를 보내긴 힘들 것 같다.”

레이몬드는 조곤조곤 어르는 투로 말하고는 슬며시 제 여동생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 마음만 먹는다면야, 현재 영지에서 머무르고 있는 황실의 기사들과 마탑 소속 마법사들을 붙여 그녀를 돌려보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앞서 한 번 그녀를 놓치고 잃을 뻔한 경험이 있는 레이몬드로서는 어떠한 작은 위험 요소라도 무시하고 싶지 않았다. 레이몬드는 그녀를 가장 안전하게 수도로 돌려보낼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이 직접 호위를 맡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그런 자신의 생각을 과연 유리 쪽에서도 받아들여줄 것인가 하는 거였다. 유리의 성격상 웃기지 말고 당장 언니를 이쪽으로 돌려보내라고 난리를 칠 게 분명해 레이몬드는 제 여동생을 설득할 문장들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해 나가며 뒷말을 마저 이었다.

“당분간은 이쪽에 둬야 할 것 같으니 너무 재촉하지…….”

―언니가, 돌아오겠대?

그런데 돌아온 말은 그가 예상한 것과는 너무도 다른 질문이었다. 당황한 레이몬드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뭐?”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제 오라버니의 반응에 유리는 당황한 듯 슬쩍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그게 좋을 것 같아. 오빠가 같이 오면 훨씬 안심되니까.

의외로 유리는 별다른 반박 없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여 레이몬드를 놀라게 했다. 그는 내심 놀란 마음을 감춘 채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단 상황을 봐서 데려갈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시러, 알렌은 형슈님 빨리 보고 시포요웁! 우웁!

그때 옆에서 콧물을 훌쩍이며 얌전히 있던 알렌이 불만을 토로하며 마력구에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내 유리에게 제압당해 입을 막혔다. 알렌이 항의하듯 발버둥을 쳤으나, 저보다 훨씬 큰 누나에게 당하지 못하고 이내 다시 얌전해졌다.

―나는…….

유리는 얌전해진 제 동생을 곰인형처럼 품에 꼬옥 끌어안았다. 뭔가 생각이 많은 얼굴로 말끝을 흐리더니 또다시 레이몬드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내뱉었다.

―언니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해줬으면 해.

당장 수도로 데려오라고 난리를 치지 않는 것도 신기했는데 이 반응은 또 뭘까.

방금까지 눈물 콧물 흘리면서 클레어 찾았냐고 난리를 칠 땐 언제고, 지금은 또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였다.

제 여동생만큼 알기 쉬운 녀석도 없다고 생각했건만 이제는 그생각을 조금 바꿔야할지도 몰랐다. 제가 원하는 바가 있으면 앞뒤 안 가리고 엉덩이에 뿔난 망아지처럼 날뛰던 녀석이 무슨 일일까. 고민하던 레이몬드의 머릿속에 순간 스치고 지나가는 게 있었다.

「나 때문이래? 내가 싫어진 거래? 이제 내 얼굴도 보기 싫대?」

헤더 영애가 황성을 떠난 이유가 저 때문이냐고 묻던 초조한 눈동자와,

「유리 네가 아니라, 내가 문제였어.」

네가 아니라, 내 탓이라고 말했을 때 안도하던 여동생의 태도에서 느꼈던 위화감 같은 것들이.

멈칫. 걸음을 멈춘 레이몬드가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 헤더 영애와 무슨 일 있었어?”

―…….

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이몬드가 뭔가를 추측해낼 수 있을 만큼 표정을 드러내지도,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도 않았다.

―언니한테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도 꼭 알려줘.

그저 제 오라버니의 눈을 피한 채 묵묵히 침묵을 지키더니, 빠르게 말을 내뱉고는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어버렸다.

어느새 빛이 사라지고 까맣게 물든 마력구를 바라보는 레이몬드의 미간이 좁아졌다.

우웅, 우웅.

레이몬드는 유리로부터의 연락이 끊기기가 무섭게 울리기 시작하는 마력구를 무시한 채 손 안으로 회수했다.

아무래도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긴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아도 좀 이상하긴 했다. 아까는 당황한 상태라 캐물어보지 못했지만, 애초에 클레어 쪽에서 먼저 「떠나겠다」고 마음 먹고 있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을 오해 아니던가. 더구나 그렇게나 좋아해 마지않던 유리나 알렌에게 인사 한 마디도 없이 훌쩍 사라져버렸던 점도 계속 마음에 걸렸었는데, 이제야 조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서로 좋아죽던 두 사람이 저렇게 된지는 몰라도, 아마 그게 헤더 영애가 황성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계기가 된 것 같았다. 불행히도 거기에 불을 당긴 건 레이몬드 자신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우우웅.

레이몬드는 복도 한가운데 멈춰 서 있던 발을 움직여 다시 걷기 시작했다. 포기를 모르고 울려대는 마력구는 손안에서 한 번 굴린 후 적당히 상의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렇게 재촉하지 않아도 어련히 알아서 갈까. 그의 눈동자가 살짝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할 일은 많고, 생각할 것도 많았다.

우선순위로 두고 싶은 것보다, 그렇지 않은 쪽이 더 그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팽개치지 못하고 의무적으로 걸음을 옮기는 자신에게도 질리는 기분이었다.

시간을 들여 생각하고 마주하고 싶은 건 보강해야 할 실드의 수식이라든가, 지속적으로 문을 넘어오는 마물들의 처리 같은 것들 따위가 아니라.

‘예를 들면, 그래…….’

성큼 걸음을 옮기던 레이몬드의 발이 다시 멈췄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그의 금색 눈동자가 정면에 보이는 이를 바라보았다. 무심히 걸어오던 상대 역시 그를 발견하고는 멈칫하는 기색을 보였다.

레이몬드는 비릿한 조소를 삼키며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리하르트 아델이라든가.’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다가가자 리하르트가 그 자리에 선 채로 단정히 인사를 올렸다.

“전하를 뵙습니다.”

레이몬드는 두어 걸음 정도의 거리를 두고 리하르트의 앞에 섰다. 평소처럼 무미건조한 표정 대신 제법 친밀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건넸다.

“내 약혼녀를 구해줘서 고맙다는 인사가 늦었군.”

늘 그렇듯 적당히 인사만 받아주고 지나칠 거라 여겼던 레이몬드가 제 앞에 멈춰 서서 말을 걸어오자, 리하르트의 눈동자에 잠깐 이채가 떠올랐다 이내 사라졌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는 예의상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며 짧게 답했다.

무표정으로 감춘 눈동자에 설핏 불쾌한 기색이 스쳤다. 굳이, 내 약혼녀라는 호칭을 강조하며 저를 치하하는 레이몬드의 의도가 빤히 보이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선적으로 호위해야 할 대상을 두고 대열을 이탈한 건 문책 사유지만…… 개인적으로는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서.”

워낙 레이몬드의 목소리나 말투가 평이해서, 모르는 이가 듣기엔 정말 순수하게 감사의 말을 전하는 것으로 보일 터였다.

하지만 리하르트의 귀에 그건 아무리 들어도 「네 여자나 잘 챙길 것이지, 왜 거슬리게 내 약혼녀의 주위에 얼쩡거리느냐」고 빈정거리는 걸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잔잔한 미소 뒤로 저를 향한 적의와 견제도 노골적으로 내보이고 있었고.

“하지만.”

레이몬드가 한쪽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느릿느릿 말을 덧붙였다.

“앞으로는 내 약혼녀를 발견하면 혼자 달려 나가지 말고, 내게 먼저 알려줬으면 좋겠군.”

이제 그의 눈동자는 아예 웃지도 않고 있었다.

리하르트는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다 얌전히 시선을 내리깔며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비틀린 미소가 떠오르려는 입가를 억지로 아래로 당기고선 애써 순응하는 듯한 표정을 만들어냈다.

“전하께서 소신보다 먼저 약혼녀를 발견하실 수 있으면 좋겠군요.”

리하르트의 나직한 대답에 레이몬드의 눈동자가 한층 더 차가워졌다.

마치 진짜 운명이 이끄는 인연은 당신이 아니라 내 쪽이라고 말하는 듯한 어조였다. 당신은 진짜가 아니니, 그녀를 발견하지 못한 게 아니냐며 그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먼저 그녀를 발견한 것도, 먼저 그녀를 구한 것도 자신이 아닌 리하르트 아델이라는 사실이 못내 불쾌하여 속이 뒤틀렸던 레이몬드였다.

누군가의 피가 흩뿌려진 더러운 골목길 한가운데 주저앉아 서로를 마주보고 있던 두 사람이 다시 떠올랐다.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던 클레어 헤더는 어떤 표정으로 이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클레어 헤더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던 이 남자의 표정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놀라움과 연민이 뒤섞여, 뒤늦게 제가 놓친 것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한 남자의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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