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3. 운명이 이끄는 곳으로 (11) (61/152)

03. 운명이 이끄는 곳으로 (11)

“내가 언제요?”

“그날 밤에요.”

“그날 밤?”

“그러니까 밤늦게 저를 찾아오신 날이요.”

“내가 그날 영애에게 떠나라고 했다고요?”

우리는 서로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을 했다.

“우리가 그날 나눴던 대화 어디에서 그런 뉘앙스가 풍겼습니까?”

레이몬드 2황자가 아주 살짝 짜증 섞인 어조로 물었다. 그에 나도 미간을 찡그렸다. 왜 내가 이런 질문을 받아야 하며, 왜 비참하게 그런 것까지 설명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는 제국의 황자고 마탑의 주인이며, 나는 그의 말 한마디 손짓 한 번에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파리 목숨인데.

그날의 대화를, 유리 황녀에게 거부당했던 순간을, 일일이 다시 떠올리자니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다. 내가 먼저 유리 황녀에게 두 번 다시 접근하지 않겠다고 말했었다.

그러자 그렇게 해주면 고맙겠다, 귀찮게 설명할 필요 없이 정리를 해줘서 다행이라고 말하며 웃던 그의 얼굴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는데.

“제가 황녀 전하를 떠나겠다는 말에 고맙다고 하셨었잖아요. 먼저 정리를 해줘서 다행이라고, 그렇게…… 말하셨잖아요.”

담담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고 싶었는데 자꾸만 목소리가 떨렸다. 말끝에는 목이 잠겨 꼭 울음을 억지로 참는 것 같은 목소리가 나왔다.

“잠깐, 그건……!”

가만히 내 말을 듣고 있던 레이몬드 2황자가 점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표정을 굳히다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단정하게 정돈된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기며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근사한 얼굴을 구긴 채 뭔가를 더 생각하는 것 같더니 재차 한숨을 길게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도대체 어떻게 들으면 그 말을 그렇게 해석했어요? 아니, 애초에 나는…….”

발끝에 시선을 둔 채 그의 말을 기다리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고, 레이몬드 2황자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답답함을 호소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때 헤더 영애가 그랬었죠. 조용히 물러나겠다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두 번 다시 그 사람에게 접근하지 않겠다고.”

“……네.”

“그 전에 우리가 무슨 대화를 나눴었는지는 기억해요?”

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조금 전보다 낮아진 음성으로 물었다. 음성이 낮아진 만큼 자연스레 더 레이몬드 2황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됐고.

나는 똑바로 시선을 마주해오는 금색 눈동자를 무심코 멍하니 바라보며 그날의 기억을 한 번 더 되돌렸다.

“전하께서…… 연회장에서의 일들을 제게 사과하셨었죠. 제가 그러실 필요가 없다 대답했었고.”

“맞아요, 그래서 이후에 나눴던 대화도 저는 당연히 그 연장선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연장선? 무엇에 대한? 그때는 레이몬드 2황자가 사과를 하고, 내가 괜찮다고 대답하고, 그걸로 끝이었던 게 아닌가?

내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을 보내자 그가 약간 난처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그때 나는…… 유리 녀석이 아니라, 리하르트 아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였습니다.”

처음에는 그 대답조차 이해가 되질 않았다. 거기서 또 왜 그 남자의 이름이 나오는 걸까. 의아해하던 나는 그날의 대화들을 다시 떠올리다 표정을 굳혔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변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는 있지만.

―나도 이제는 왠지 조금 화가 나서요.

그게…… 전부 리하르트 아델에 대한 이야기였다고? 유리 황녀가 아니라.

전부 내가 멋대로 오해하고 혼자 폭주해선 울고 불고 했던 거라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어찌나 당황했던지 죄송하다는 사죄의 말조차 나오질 않았다.

“…….”

“…….”

레이몬드 2황자는 지금 어떤 마음인지 모르겠으나 최소한 나는 부끄러움과 민망함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잠시 이어지는 침묵에 아마 레이몬드 2황자도 기가 막혀 할 말을 잊은 게 아닌가 싶었다.

짧은 정적은 그가 옅게 내쉰 한숨 소리와 함께 깨졌다.

“결국 이 모든 게 다 나 때문인 거네요. 덕분에 계속 서로 오해를 하고 있었고.”

레이몬드 2황자가 책임을 자신에게 다 떠넘기듯 말했다. 나는 그런 그에게 나 또한 명확하지 않은 말로 오해를 하게 했다 대답하려 했다.

“딱히 내가 싫어서 떠나려고 했던 것도…… 아닌 거고.”

그런데 그가 또 뭔가를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기에 그냥 입을 다물어버렸다.

다시 침묵이 내려앉은 사이에 나는 그가 했던 말들을 다시 떠올렸다.

‘유리 황녀가 나를 내보내려고 한 건 아니었구나.’

일단은 그 사실만으로도 조금 안도했다. 그렇다고 성녀의 예지가 없던 얘기가 되는 것도 아닌데, 지금은…… 그래도 조금, 아주 조금만이라도 기뻐하고 싶었다.

그리고 레이몬드 2황자도…… 내가 필요 없어져서 그날 밤에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던 것도 아니었다는 걸 알았다.

그날 밤을 떠올리기만 해도 괴로웠던 가슴이 이제야 조금은 편해지는 것 같았다. 유리 황녀가 내 손을 거부했던 것만큼, 레이몬드 2황자가 웃으며 내게 이제 그만 떠나 달라 말했던 그 날 밤의 기억들이 생각보다 더 나를 괴롭게 했다는 걸 지금 막 깨달았다.

‘왜?’

그러다 갑자기 「어째서?」라는 의문이 반짝하고 떠올랐다.

‘그러게, 왜……?’

나도 모르게 그 질문에 질문으로 되돌렸다.

‘왜 레이몬드 2황자가 네게 떠나달라고 웃으며 말했던 게 유리 황녀에게 거부당한 것만큼 괴로웠는데?’

왠지 심장 부근이 조금 불편한 느낌이 들어 손으로 가슴께를 꾹 눌렀다.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좁히는데, 끼익-하고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머릿속을 환기시켰다.

“그래,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레이몬드 2황자가 자세를 바꿨다. 그는 팔짱을 끼고 있던 팔을 풀고 제 무릎 근처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여상스러운 투로 말했다.

“그런데 아까는 왜 도망친 거죠?”

딱히 궁금한 건 아니지만 왠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는 듯이.

“내 목소리를 듣고 돌아보지도 않고 달려가던데.”

그런데 왠지 그 무심한 어조에서 묘하게 불쾌해하는 기색이 느껴져 나는 움찔 몸을 떨었다.

하긴, 당연한가. 나라도 누군가 내가 나타난 걸 알자마자 전염병 환자 취급하며 꽁지가 빠지라 도망치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나쁠 것 같았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진짜 단순히 오해해서 황성을 떠난 거 맞아요? 내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아, 저, 저기. 그건.”

나는 식은땀이 배어나는 손을 치마에 문질러 닦으며 겨우 입을 열었다. 뭐든 변명을 해야 하는데, 당황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내가 몇 번 말을 꺼내려는 시도만 하다 입을 다물어버리자 그가 제 무릎에 팔을 괴고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슬쩍 시선을 돌리며 뚱한 얼굴을 하는 모습이 토라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토라지다니. 세상에. 레이몬드 2황자와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말이지 않은가.

“역시 내가 싫어서 떠난 거 맞군요.”

“아니에요!”

나는 반사적으로 빽 소리를 지르고는 창피함에 입을 턱 막았다가, 다시 또 허둥지둥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다.

“저, 정말 그런 게 아니라.”

“정말요?”

“네.”

“진짜요?”

“네.”

“그럼 이제 말도 없이 모습을 감추거나 하지 않을 건가요?”

“네……, 네? 아, 네…….”

레이몬드 2황자가 하는 말에 무조건 네, 네, 그렇다 대답하던 나는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머뭇거리는 사이 대답을 강요하는 듯한 시선이 날아들어 마지못해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제야 굳어있던 표정을 살짝 풀더니 평소의 다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이후에는 레이몬드 2황자가 혹 나를 납치했던 괴한들에 대해 아는 게 있느냐 짧게 물어왔지만, 잠시 고민하던 나는 단순한 인신매매단인 것 같다 대답해버렸다. 그가 묘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는 게 느껴졌으나 최대한 담담한 얼굴로 그 시선을 받아내기만 했다.

똑똑.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는 중에 구원의 손길 같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레이몬드 2황자는 나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문가로 걸어가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문 너머에는 처음 우리를 이곳까지 안내해 준 앳된 얼굴의 남자가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서 있었다.

“전하, 만찬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영주께서 괜찮으시면 전하께서도 참석해주십사 말씀을 올리라 하셨습니다.”

남자는 자신이 태어나 이렇게까지 높으신 분을 모시게 된 것 자체가 황송하고 두려운 듯 시종일관 안절부절못했다. 그 모습이 꼭 남 일 같지 않게 느껴져 나는 그를 안쓰러운 눈길로 지켜보았다.

“아니, 나는…….”

레이몬드 2황자는 피곤한 얼굴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아마 영주의 제안을 거절하려는 것 같았다.

만찬이라, 황자와 성녀를 대접하는 만찬일 테니 분명 나는 본 적도 없는 휘황찬란한 산해진미가 가득할 테지. 긴 식탁 위에 따뜻한 수프와 부드러운 빵, 각종 샐러드와 두꺼운 스테이크 고기,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고급스러운 음식들이 펼쳐져 있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을 때였다.

꼬르르르르륵.

방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에 영주의 제안을 들고 온 남자와 레이몬드 2황자가 나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왜 둘 다 나를 쳐다보는 거지. 아직 상황 판단이 안 된 내가 그 시선을 어리둥절하게 받아치는 순간.

꼬르르르르륵.

낯익은 소리가 한 번 더 방 안을 울렸다.

나는 그제야 당황해 내 배를 내려다보았다. 설마 이거, 지금, 내 배에서 난 소린가?

도저히 믿기질 않아서 멍하니 내 배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레이몬드 2황자의 애써 웃음을 참는 소리가 귓가를 후려쳤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반대쪽으로 틀고서 힘겹게 웃음을 참고 있었다.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나는 당장이라도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을 힘겹게 눌러 참았다.

“영주의 호의는 고맙지만, 나는 불참하겠다고 전해주겠나. 그리고.”

아직도 웃음기가 남은 목소리로 그가 남자에게 말했다.

“이쪽에 따로 저녁 식사를 준비해줬으면 한다고.”

* * *

우웅, 우웅.

상의 안쪽에 넣어둔 호출용 마력구가 시끄럽게 울려대고 있었다.

레이몬드는 클레어만 혼자 남겨둔 채 등 뒤로 문을 닫고도 자꾸만 미련이 남는 발길을 떼어 걸음을 옮겼다. 한 번도 자신이 해야할 일들을 짐처럼 여긴 적 없던 그였으나, 지금만큼은 저를 찾는 연락들이 무척 거슬리고 귀찮게 느껴졌다.

그는 복도로 나오자마자 마력구의 꺼내 연락을 한 번 끊고는 허공에 두둥실 띄웠다.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그를 따라 마력구가 움직이며 푸른빛에 감싸였다.

―둘째 오빠!

빛이 사라지고, 여동생의 다급한 눈동자가 작은 마력구를 가득 채웠다. 빨갛게 부어오른 눈가를 보아하니 오늘도 하루종일 펑펑 울어 젖힌 게 틀림없었다.

―언니, 언니는? 언니 찾은 거야? 찾았지?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몰아붙이듯 던져오는 질문에 레이몬드의 입술을 타고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일단 진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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