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운명이 이끄는 곳으로 (10)
신비롭기까지한 청은발의 머리칼과 눈동자, 여신의 현신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는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에 황실의 기사들은 물론 영주와 그의 시종들까지 죄다 정신을 못 차리는 얼굴이었다.
그 속에서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건 리하르트 아델과 레이몬드 2황자 둘뿐이었다.
리하르트 아델은 말없이 그녀를 에스코트하고 있었고, 레이몬드 2황자는…….
“구두가 없다는 걸 깜빡했네요.”
“네? 앗!”
자기 등 뒤에서 움츠러들어 있는 나를 가만히 지켜보다 예고도 없이 다시 내 몸을 번쩍 안아 들었다. 몸이 붕 떠오르는 느낌에 놀란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고, 묘하게 만족한 듯 웃던 레이몬드 2황자가 영주를 향해 외쳤다.
“내 손님이다. 당분간 머물 방을 준비해줬으면 좋겠군.”
“예? 아, 예!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레이몬드 2황자의 외침에 성녀에게로 향했던 시선이 다시 우리 쪽으로 옮겨왔다.
놀라기도 했고, 부끄럽기도 하고, 나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다른 이들에게 들킬까 레이몬드 2황자의 어깨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그런 내 행동에 레이몬드 2황자의 몸이 살짝 굳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다행히 나를 밀쳐내진 않았다.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영주의 명령에 조금 앳된 외모의 남자가 달려와 허리를 꾸벅 숙여 보이며 말했다.
레이몬드 2황자는 나를 안아 든 채로 남자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성안으로 들어와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따라 걸어 도착한 곳은 꽤 넓은 크기의 손님용 방이었다. 유리 황녀의 방만큼은 아니지만 넓은 방을 가득 채운 고급스러운 가구들과 천개형 레이스 커튼이 드리워진 침대가 시선을 끌었다.
레이몬드 2황자는 성큼 성큼 방에 들어서서는 침대 위에 나를 내려놓았다. 그가 하는 대로 얌전히 침대 위에 앉자, 레이몬드 2황자가 다시 방을 안내해준 시종에게 뭔가를 지시했다.
화려한 방안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는데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레이몬드 2황자가 의자를 끌어와 내 앞에 앉았다.
“따뜻한 물을 가져오라 했으니 잠깐 기다려요.”
그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훨씬 기분이 나아진 듯 다정하게 말했다. 나는 어느새 미소짓고 있는 레이몬드 2황자의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보다 아차 하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나는 무릎 위에 올려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왠지 지금 그는 처음보다는 훨씬 기분이 좋아 보였고, 둘밖에 남지 않은 지금이 질문을 던질 제일 좋은 타이밍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나를 두고, 유리 황녀가 찾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던 게 무슨 뜻인지.
“전하.”
“헤더 영애.”
아마 서로 동시에 입을 열지 않았다면 말이다.
레이몬드 2황자와 나는 비슷한 표정으로 서로를 응시하다 또 동시에 말했다.
“먼저 말씀하세요.”
“먼저 말해요.”
좁은 골목에서 낯선 상대와 맞닥뜨리고 서로 먼저 피해주려다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며 계속 서로의 앞길을 가로막을 때의 기분이 이런 느낌이지 싶었다.
나는 말 대신 공손한 손짓으로 레이몬드 2황자에게 먼저 말하라는 의미를 전했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크흠 작게 헛기침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하지만 말문을 열고도 쉽게 꺼내기 힘든 말인지 꽤 뜸을 들였다.
“갑자기 왜…… 아니.”
적당한 말을 고르는 듯 한참 생각에 잠겼던 레이몬드 2황자가 겨우 문장을 완성해 내뱉었다.
“왜 수도에서 사라졌던 사람이 여기 듀란 영지까지 와 있는 겁니까?”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질문이라 나도 머릿속으로 어디서부터 대답해야 할지 한 번 더 점검하는데, 레이몬드 2황자의 표정이 차갑게 얼어붙는 게 보였다.
“그 남자를 따라온 겁니까?”
그 남자라니.
설마.
“아니에요!”
그가 말하는 「그 남자」가 누구인지 눈치껏 알아들은 내가 펄쩍 뛰며 말했다. 순간 언성을 너무 높인 것 같아 부끄러웠다.
나는 발의 통증도 잊은 채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침대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으며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이에 레이몬드 2황자의 얼굴은 더 구겨져 있었다.
“절대 아니에요.”
“그럼 뭡니까.”
무덤덤하게 날아든 재촉에 나는 망설였다. 이 사람에게 다 말해도 되는 걸까.
나를 여기까지 데려와 준 그녀에게 털어놓을 때와는 또 상황이 달랐다. 레이몬드 2황자는 내게든, 그 여자에게든, 어떤 식으로도 강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니까.
결국 나는 전부를 얘기하는 대신, 극히 일부만을 그에게 말하기로 했다.
길을 걷던 도중 갑자기 괴한들에게 납치를 당했고, 정신을 차려보니 짐짝처럼 마차에 실려있었고, 마차는 수도 밖을 달리고 있었으며, 운 좋게 좋은 사람을 만나 구출되어 듀란 영지로 오게 되었다고. 날 구해준 은인에게 도움을 받아 우선 근처의 여관에서 머물려던 차에 다시 그 괴한들을 만나 끌려가고 있었다고.
그리고 우연히 나를 발견한 듯한 리하르트 아델이 자신을 구해준 거라고.
내가 들어도 고작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극적인 상황들에 레이몬드 2황자도 살짝 믿기지 않는 듯한 얼굴을 했다. 그러다 리하르트 아델의 이름이 나왔을 때는 또다시 무감각한 눈동자에 서릿발 같은 찬 기운이 돌았다.
얘기가 대충 마무리가 되었을 즈음, 때마침 문을 똑똑 두드린 하녀들이 우르르 들어섰다. 하녀들은 레이몬드 2황자가 부탁한 따뜻한 물과 천, 각종 약과 붕대까지 들고 와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내 쪽으로 다가오는데 그보다 앞서서 레이몬드 2황자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여기도 아프죠?”
피할 새도 없이 그가 내 왼쪽 발목을 붙잡고서 복숭아뼈 위쪽을 살짝 누르며 물었다. 욱신거리던 통증이 한순간 커지면서 나는 윽, 신음을 흘리며 몸을 굽혔다.
그제야 퉁퉁 부어서 발갛게 변해있는 왼쪽 발목이 눈에 들어왔다. 워낙 정신이 없어서 인식할 틈도 없었는데, 왼쪽 발목을 제법 크게 접질린 것 같았다.
레이몬드 2황자의 질문에 한껏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입술을 타고 짧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한숨을 내쉬는 입술마저 지나치게 아름다워서 잠시 넋을 잃었다.
하지만 그가 마른 천을 하녀들에게 건네받아 따뜻한 물에 적시는 모습을 보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가 뭘 하려는지 눈치챈 나는 다급히 그의 손에서 내 발을 빼내어 뒤로 물렸다.
그러고는 천을 건네받으려 손을 내밀었다. 레이몬드 2황자의 미간이 좁아졌다.
“제, 제가 할게요.”
“이리 줘요. 신성력으로 치료하더라도 일단 상처 주변을 깨끗하게 해야 해요.”
“제가 하게 해주세요.”
잠시 실랑이와 함께 그와 나 사이에 눈싸움이 벌어졌다. 정확히는 레이몬드 2황자만 나를 노려보고 있었고,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하면서 겨우 시선을 맞추고 있었을 뿐이지만.
아직 다른 하녀들도 방안에 남아있는 상태에서 레이몬드 2황자가 계속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게 신경 쓰였다.
“제, 제 허락 없이 손대지 않기로 하셨잖아요.”
그래서 생각난 대로 다급히 말해버렸다. 제발, 얼른 일어나시라는 의미였다. 그 말에 그가 고개를 푹 떨어뜨리더니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누가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싫어할 건 없지 않나.”
한숨 같은 중얼거림이 들렸으나 워낙 작은 목소리라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잔뜩 경계 어린 눈으로 레이몬드 2황자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보고 있으니, 그가 다시 고개를 들며 물었다.
“다른 사람이면 돼요?”
그리고 뒤에 시립해있던 다른 하녀들에게 천을 건네주고는 한 걸음 물러났다. 하녀들은 별도의 명령 없이도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얼른 내 앞에 다가와 몸을 낮췄다. 나는 그녀들에게도 내가 하게 해달라며 애원 어린 눈길을 보냈지만 어쩐지 저쪽이 더 간절한 눈빛이라 결국 포기하고 발을 내어주고 말았다.
레이몬드 2황자는 그 모습을 보고나서야 완전히 물러나 벽에 삐딱하게 기대 서서 하녀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나도 딱히 시선을 둘 곳이 없어 내 얼굴이며 발과 다리를 닦고 소독해주는 하녀들의 매끄러운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녀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레이몬드 2황자를 힐끔거리고 있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몇몇은 그의 수려한 외모에 뺨을 붉히기도 했다.
이제 막 성인식을 치른 듯 어려 보이는 하녀들이라 그런지 아직 철이 덜 든 느낌도 나서 조금 걱정이 되었다. 저러다 들키면 허락도 없이 황족의 얼굴을 쳐다봤다는 이유로 목이 날아갈 수도 있는 심각한 문제니까. 그렇다고 레이몬드 2황자가 겨우 자기 얼굴을 쳐다봤다고 어린 하녀들을 처벌할 사람이란 건 아니지만.
다행히 레이몬드 2황자는 하녀들이 내 얼굴과 팔, 몸 여기저기를 닦고 소독을 끝낼 때까지 그녀들의 시선을 크게 책잡지 않고 못 본 척해주었다. 그저 깨끗하게 닦인 피부 위로 새겨진 상처들을 못마땅한 눈길로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무엄하게도 황족 얼굴을 힐끔거리긴 했어도 무사히 일을 끝난 하녀들은 가져왔던 물건들을 다시 챙긴 후, 레이몬드 2황자와 내게 허리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우르르 방을 빠져나갔다.
이후 곧바로 신관이 들어와 상처들을 신성력으로 치료해주었다. 환한 빛 아래 순식간에 상처가 사라지고 깨끗한 피부가 드러나는 게 몇 번으로 보아도 신기하기만 했다.
홀린 듯 신관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바라보다 살짝 회의감이 들었다. 제국의 고위귀족들조차 쉽게 만날 수 없는 신관의 신성력으로 치료를 받는 호사를 최근 자주 누리고 있는 걸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그래, 여기까지 오게 된 경위는 대충 알겠어요.”
신관마저 치료를 끝내고 나가고, 다시 둘만 남게 되자 레이몬드 2황자가 아예 의자 하나를 끌고 와 내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편히 등을 기댄 채 한쪽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삐딱한 그의 모습에 나는 긴장하여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럼……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무표정한 얼굴로 똑바로 눈을 마주해오는 시선에 나는 혹시 몰라 붕대까지 칭칭 감아놓은 발목을 내려다보는 척 눈을 피했다.
“왜 갑자기 말도 없이 우리를 떠난 건지 물어봐도 되나요?”
하지만 이어진 질문에는 고개를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레이몬드 2황자의 무표정하던 눈동자가 못마땅한 빛을 띠며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계약을 멋대로 끝내도 된다고 말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요.”
왜 이걸 나한테 묻는 거지? 아니, 애초에 왜 이런 질문이 나오지? 이쪽이 오히려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그에게 답했다.
“떠나라고 하셨잖아요.”
“누가요?”
“전하께서요.”
“내가요?”
놀랍게도 상대도 어이가 없다는 반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