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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운명이 이끄는 곳으로 (9) (59/152)

03. 운명이 이끄는 곳으로 (9)

어찌할 바를 몰라 시선을 내리깐 채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고 있는데, 한참 만에야 레이몬드 2황자의 손이 내 턱에서 떨어졌다. 보이는 곳의 상처는 그가 대부분 확인한 뒤였다. 나는 욱신거리는 다리와 아마도 상처투성이일 게 분명한 발이 치마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걸 다행으로 여겼다.

“구두는 어디 갔어요?”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신지 않은 발의 상태마저 들키고 말았다.

레이몬드 2황자가 망설임 없이 한쪽 무릎을 꿇는 모습에 나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못마땅해하는 시선이 곧장 따라붙었다.

“이래선 걷기도 힘들겠네요.”

다시 눈이 마주쳤다. 웃지 않는 레이몬드 2황자의 얼굴은 조금…… 무서웠다. 나는 움찔 어깨를 움츠리며 한 걸음 더 물러났다.

그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더니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또 한 걸음 뒷걸음질을 쳤다.

“내가 영애를 억지로 안고 가는 쪽과 영애가 나한테 순순히 안겨 가는 쪽, 어느 쪽이 나아요?”

선택지가 뭔가 이상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결론은 둘 다 같은 게 아닌가? 그런 표정으로 레이몬드 2황자를 보고 있으니, 그가 다시 몸을 일으켜 다가왔다.

그가 다가온 만큼 더 물러나려 했으나 등 뒤로 벽이 닿았다. 더는 도망칠 구석이 없었다. 다급히 눈을 굴려 좌우로 빠져나갈 구석을 살피는데, 긴 팔이 뻗어와 왼쪽 길을 힐끔거리던 내 시야를 가렸다.

“또 도망치려고요?”

그제야 다시 정면을 돌아보자, 무척 화가 난 듯한 표정의 레이몬드 2황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애초에 대체 왜 갑자기-.”

여느 때와 달리 거친 말투며 표정에 움찔하니 그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그러고는 답답한 듯 머리를 쓸어넘기며 다시 내게 팔을 뻗어왔다.

“아니, 일단 돌아가서 상처부터 치료하고 얘기하죠.”

“돌아가다니, 어디로요?”

나는 그대로 나를 안으려는 듯한 그의 팔을 힘주어 밀어냈다. 레이몬드 2황자의 수려한 얼굴이 또 한 번 구겨졌다.

나는 그 눈을 피해 상처와 흙먼지로 뒤덮인 내 발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돌아가다니. 어디로 돌아간다는 말일까. 나는 떠나라고 해서 떠났을 뿐인데.

어쩌다 보니 다시 마주치긴 했지만, 그냥 모른 척하고 가면 됐지 않나. 이 사람은 뭐하러 이렇게 나를 쫓아와서 나를 위하는 척하는 걸까.

동정, 위선, 혹은 약간의 죄책감.

아마 그 정도의 감정이겠지.

나는 엉망이 된 발보다, 그가 나를 동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비참하고 부끄러웠다. 내 주제에, 이렇게까지 된 상황에 무슨 자존심을 내세우냐 싶겠지만 나는 그랬다.

나는 이제 정말 황실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처럼 지내고 싶었다. 설령 아까처럼 괴한을 만나 어디론가 끌려가게 되더라도, 평생을 노예처럼 살게 된다 하더라도. 이 사람에게 동정을 받고 싶진 않았다.

“약속 못 지킨 것.”

거부당한 팔을 순순히 내리고 물러났던 그가 뭔가를 나직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내가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귀를 기울였을 때였다.

“나중에 배로 벌충하겠습니다.”

“꺄악!”

내가 어떻게 피하거나 막을 새도 없이 그가 단숨에 내 몸을 안아 올렸다. 순간 놀라기도 했고, 당황스럽기도 하고, 이 사람에게 안긴 자세가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이, 이거 놔주세요. 내려주세요!”

나는 애원하듯 외치며 발버둥을 쳤으나 레이몬드 2황자는 아주 조금 미간을 찡그렸을 뿐, 힘든 기색 하나 없이 발버둥 치는 내 몸을 단단히 안아 들고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러다 내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둘 다 다쳐요.”

그러고는 포기를 모르는 내게 경고하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흠칫한 나는 결국 질린 얼굴로 발버둥을 멈췄다. 나 혼자라면 모를까, 자칫 그까지 다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어쩔 수 없이 얌전해져야 했다.

나는 창피함에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가리려 애쓰며 힐끔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나치게 가까이 있는 아름다운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다시 얼굴에 열이 올랐다.

하지만 아름다운 얼굴에 비해 그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잔뜩 화가 난 사람처럼 굳은 눈동자에 나는 점점 더 움츠러들었다.

아마 내게 화가 난 거겠지 생각하면서도, 의아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걸까.

나는 리하르트 아델에게, 그리고 이 사람의 눈에 일부러 띄고자 한 게 아니다. 도와달라 청한 적도 없다. 그저 우연히 눈에 띄었고, 도움을 받았고, 그 외엔 아무것도 더 바란 게 없다. 내 주제를 알고 얼른 그 자리를 떠났을 뿐.

그런데 나의 어떤 행동이 이 사람을 화나게 한 걸까.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걸까.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면서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레이몬드 2황자가 나를 안아 든 채로 빠른 걸음으로 어두운 골목을 벗어나고 있었다. 점점 주변이 밝아지며 성녀의 행렬을 따라 모여 들어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인지 행렬은 누군가를 기다리듯 멈춰 서 있었다. 몰려든 사람들 탓에 성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타고 있던 마차와 그 주위를 감싸듯 둘러선 기사들이 잔뜩 경계하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새 제자리도 돌아온 건지, 리하르트 아델의 뒷모습도 얼핏 보인 것 같았다.

“2황자 전하!”

그 중 누군가가 레이몬드 2황자를 알아본 듯 큰소리로 외쳤다. 기사들 서넛이 말에서 뛰어 내려 사람들을 해치고 그에게 다가왔다.

당연하게도 순식간에 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예상했지만 상황은 생각보다 더 끔찍했다. 나는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서 내게로 쏠리는 시선들을 피했다.

“전하, 이분은?”

다급히 다가와 레이몬드 2황자 주위로 몰려든 사람들을 밀어내며 길을 트던 기사들 중 하나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질문을 던져왔다. 레이몬드 2황자의 무표정한 눈동자가 잠깐 내게 향하더니, 다시 정면을 응시하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유리 녀석이 밤낮으로 울고 불며 찾고 있는 사람.”

……?

나는 순간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우선 성으로 돌아가시죠. 일정이 너무 지체되었습니다.”

당황하여 입을 여는 찰나, 무척 예민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가 다가와 그를 재촉했다. 복장을 봐선 황실의 기사는 아닌 듯했고, 성국 쪽의 사람이 아닌가 싶었다. 그의 뒤로 보이는 성기사들 또한 무척 불만 어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성녀를 내버려 두고 사라졌던 그의 행동에 성국 전체가 모욕을 당한 것처럼 불쾌해하는 얼굴이었다.

“아아, 그러지.”

레이몬드 2황자는 그런 성기사들의 태도에도 별다른 기색없이 짧게 대답하고는 부하가 끌고 온 자신의 말에 시선을 주었다.

그는 자세를 바꿔 양손으로 내 허리를 잡고서 들어 올려 말에 올려 태웠다. 힘을 들이는 기색도 없이 너무도 쉽게 나를 들어 올리는 그로 인해 나는 당황했다. 순간 내가 헝겊으로 만든 인형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레이몬드 2황자는 무덤덤하게 나를 먼저 말에 태우고는 자기도 가볍게 뛰어올라 훌쩍 말에 올랐다.

“곧장 영주성으로 간다.”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나는 말에 태워진 채 영주성으로 향했다. 나는 몇 번인가 입을 뻐끔거리며 뭔가를 물어보려다 딱딱하게 굳은 레이몬드 2황자는 표정을 보고는 이내 입을 다무는 행동을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행렬은 영주성에 도착했고, 생각보다 더 크고 화려한 성의 자태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타국과의 활발한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영지의 주인답게 영주의 성은 사치스럽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휘황찬란하기 그지없었다.

성의 입구를 지나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거대한 조각상들과 이국적인 꽃들에 둘러싸인 인공연못, 금칠이라도 된 듯 번쩍거리는 건물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헤더 영애.”

황성과는 또 전혀 다른 느낌의 영주성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응시하는데,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흠칫한 나는 그제야 지금 내 상황을 다시 인지했다. 레이몬드 2황자의 품에 반쯤 안긴 모양새도, 익숙하지 않은 말을 타면서 나도 모르게 그의 팔과 고삐를 생명줄처럼 붙들고 있는 것도. 이런 와중에 어린애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던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나는 그에게 기대고 있던 몸을 슬쩍 떼어내며 고개를 푹 숙였다.

“팔 이리 줘요.”

그때 말을 멈춰 세운 레이몬드 2황자가 먼저 훌쩍 뛰어내리더니 내 쪽으로 팔을 뻗으며 말했다. 나는 머뭇거리다 주변의 다른 기사들도 말에서 내려선 채 나를 기다리듯 응시하고 있는 걸 보고 어쩔 수 없이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레이몬드 2황자에게 팔을 뻗자, 그가 그대로 자기 어깨를 붙잡게 하고는 아까처럼 내 허리를 잡아 땅에 무사히 내려설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한참 말을 타고 온 터라 갑자기 바닥을 디디고 서자 한순간 땅이 울렁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애써 몸을 꼿꼿하게 세운 채 어지럼증이 가시길 기다렸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비틀거리면 그가 부축을 해주겠다며 친절을 베풀 것 같아서였다.

“전하, 오셨습니까.”

살집이 있어 두툼한 얼굴과 풍만한 몸매를 가진 남자가 성 안에서 허둥지둥 달려 나와 우리를 맞이했다. 값비싸 보이는 옷이며 장신구를 잔뜩 걸친 남자의 모양새나 시종들을 잔뜩 이끌고 오는 모습으로 봐선 아마도 그가 이 듀란 영지의 영주인 모양이었다.

남자는 레이몬드 2황자에게 굽실거리며 한참 인사를 하더니, 바로 옆에 선 나를 향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져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뒤쪽에 선 성기사들과 성녀의 마차를 보더니 금세 그쪽으로 헐레벌떡 달려갔다.

“저희 듀란 영지는 성녀 아리아님을 환영합니다. 이렇게 누추한 곳에 귀한 발걸음을 해주셔서 어찌나 영광인지 모릅니다. 지내시는 동안 어떠한 불편함도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남자는 뱃살 때문에 잘 접히지도 않는 허리를 연신 숙여댔다. 나는 아직도 마차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성녀의 흔적을 좇으며 슬쩍 레이몬드 2황자의 뒤로 몸을 감췄다.

“헤더 영애?”

갑자기 제 뒤로 걸어가 숨는 듯한 행동을 하는 내게 레이몬드 2황자의 의아한 시선이 닿았다.

달칵.

모두의 시선이 모여든 가운데, 드디어 마차의 문이 열렸다. 성녀가 스스로 문을 열자, 주위를 감싸고 있던 성기사들이 뒤로 몸을 물렸다. 그리고 그동안 모습이 보이지 않던 리하르트 아델이 어디선가 걸어 나와 손을 내밀었다.

기분 탓인지, 그의 시선이 잠시 내 쪽을 돌아본 것 같았다. 레이몬드 2황자를 신경 쓰느라 까맣게 잊고 있던 그의 존재를 이제야 떠올린 나는 움찔하며 시선을 피했다.

리하르트 아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려선 그녀의 등장에 주위가 잠시 소란스러워졌다. 한 박자 늦게 시선을 가져가니,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자 가뜩이나 화려한 영주성 안이 마치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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