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3. 운명이 이끄는 곳으로 (8) (58/152)

03. 운명이 이끄는 곳으로 (8)

* * *

타닥!

혼자 힘으로는 일어서지도 못할 것 같던 여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맹수에게 쫓기는 소동물처럼 달려가기 시작했다.

놀란 리하르트는 반사적으로 클레어의 팔을 붙잡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다급히 몸을 일으키며 돌아보자, 그의 손을 피해 달아난 클레어가 비틀거리다 넘어질 뻔하고, 다리가 아픈 듯 절뚝거리면서도 열심히 뛰어가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

황당하고 허탈했다. 리하르트는 내내 참고 있던 헛웃음을 흘리며, 결국 한 번은 넘어져 주저앉았다가 다시 벌떡 일어나 달려가는 클레어를 바라보았다.

수많은 군중 사이에 섞여 있던 그녀를 우연히 발견했다. 그 많은 사람들 틈에서 겨우 눈만 내어놓고 있던 그녀를 어떻게 발견할 수 있었는지는 그도 의문이었다. 어쨌든 리하르트는 지금 황실에서 눈이 빠지게 찾고 있던 클레어 헤더를 운 좋게 발견했고, 그 즉시 말에서 뛰어내려 순식간에 사라진 그녀의 행방을 쫓아 내달렸다.

그는 지금 자신이 제 심장을 바치겠다 맹세할 만큼 사랑하는 여인을 팽개친 채 달리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였다. 자신이 어째서 이렇게까지 필사적으로 그녀를 쫓고 있는지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몰려든 사람들 틈을 헤집고 들어가 그녀의 흔적을 찾았다.

정신없이 주위를 돌아보는 그의 시선 끝에 후드를 깊게 눌러쓴 남자가 뒷골목으로 슥 몸을 감추는 모습이 잡혔다. 긴 시간 사선을 넘나드는 전쟁터를 누비고 다녔던 그의 육감과 본능이 저 남자를 쫓으라 말했다.

그는 방해가 되는 영지민들을 밀치고 파고들며 숨차게 내달렸다.

그리고 더럽고 어두컴컴한 뒷골목에서 그녀를 발견했다. 처음 만났을 때를 똑같이 연상시키는 듯한 그녀의 처참한 모습에 순간 멋대로 몸이 움직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손이 잘려나간 남자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고, 제 손에는 피가 뚝뚝 흐르는 검이 들려 있었다.

유령이라도 본 듯 저를 응시하는 연갈색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녀 역시 저와 같이 과거의 어딘가를 헤매고 있다는 걸 알았다.

“괜찮아?”

그래서 다가가 묻고 말았다. 수년 전, 제가 그랬던 것처럼.

아마 이 여자라면, 그때와 똑같이 백마 탄 왕자처럼 저를 구해준 제게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거나 또다시 제게 매달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다시 눈앞의 여자가 무척 성가시고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왜 왔어요?”

실제로 여자는 제 마음을 떠보듯 질문을 던졌다. 순간 짜증이 확 치밀었다. 제게 마음이 남았느냐 묻는 미련스러운 질문이 지긋지긋했다. 그냥 못 본 척할 걸 그랬다 생각하며 리하르트의 눈동자가 차게 식어 내렸다.

“이제 나 같은 건 신경 쓸 가치도 없잖아요.”

하지만 어딘가 이상했다. 클레어 헤더는 저를 구해준 자신을 향해 감격하거나 다시 사랑을 애원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리하르트가 그대로 등을 돌려 제 부하를 불러 그녀를 데려가라 이르려던 마음을 바꿔 다시 발을 붙이고 선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래서 버렸잖아요.”

바보 같을 정도로 선하고, 언제나 저를 향해 사랑을 갈구하고, 그래서 답답하고, 때로는 아주 조금 예쁘다고 생각했던 그 눈동자에 비친 건, 명백한 적의였다.

신기했다. 이 여자가 이런 얼굴도 할 줄 알았던가.

호기심이 생겼다.

“나도 몰라.”

그래서 저도 모르게 무심코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신경이 쓰이는 걸 어떡하라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제 말에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이번에야말로 그때처럼 눈물을 글썽이며 다시 저를 지독히도 원하는 눈을 할 것인가, 혹은 그 반대일까.

하지만 막상 그렇게 말을 내뱉고 나니 지금 자신의 언행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호한 말로 상대의 마음을 떠보려 하는, 그토록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던 타인의 태도들을 지금 자신이 똑같이 답습하고 있었으니까.

“내버려 두지 그랬어요.”

평온한 목소리였다.

말투나 표정만 보면 화를 내는 것 같지도 않았고, 평범하게 아침 인사라도 건네는 듯한 목소리였다.

“지금도, 그때도.”

그래서 헷갈렸다.

“그냥 내버려 뒀으면, 그 개새끼들에게 윤간을 당하든, 어디 끌려가서 노예로 팔려가든, 그러다 어디선가 개죽음을 당하든 말든, 내버려 뒀으면 됐잖아.”

리하르트는 클레어가 평온한 어조로 내뱉는 말들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러다 한 박자 늦게 그녀가 한 말들이 푹 날아와 꽂히는 듯한 느낌에 그는 미간을 더 모았다.

“너-.”

“클레어.”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걸까.

불쑥 들려온 낯설지 않은 음성에 리하르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느 순간 그녀와 둘만이 존재하는 듯했던 공간이 깨어지고, 현실로 끌려 나온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달려오는 내내 누군가 뒤에서 쫓아오는 기척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분명 제 안위를 걱정한 부하들 중 누군가일 거라고 생각했지, 지금 제 눈앞에 서 있는 남자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은 부하들에게조차 클레어 헤더를 발견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대열을 이탈한 것이었다. 그런데 저 남자가, 레이몬드 2황자가 어째서 여기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높은 마력을 소유한 자일수록 뛰어난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긴 하나, 지금의 상황에서까지 통용될 사실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데. 아무 말도 없이 뛰쳐나온 저를 본 것만으로도 클레어 헤더의 꼬리를 잡았다고 여기며 쫓아오기엔 생략된 부분이 너무 많았다.

서늘하게 미소 짓고 있는 레이몬드 2황자의 황금색 눈동자가 어두컴컴한 골목 아래에서도 형형이 빛나는 것 같았다. 태양을 닮은 그 눈동자가 돌아보지 않는 클레어 헤더의 뒷모습에서 제게로 옮겨는 것을 리하르트는 보았다. 희미하게 걸려있던 미소마저 사라진, 무감각한 눈동자 속에 제게 향했다.

클레어 헤더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리하르트에게는 이쪽이 더 익숙한 얼굴이었다. 속을 알 수 없고, 감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무기질의 황금색 눈동자가.

“클레어.”

클레어가 저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입가의 미소를 지웠지만, 목소리만은 더없이 다정해서 오히려 더 소름이 끼쳤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레이몬드 2황자의 손이 이제 막 클레어의 어깨에 닿으려는 찰나였다.

마치 그 사실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클레어가 튕겨 나가듯 반대편 골목으로 달려가 버렸다. 상상도 못 한 갑작스러운 클레어의 행동에 놀란 리하르트가 반사적으로 뻗은 손이 허공을 휘젓고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황당하고 당황스러운 감정을 담아 클레어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타악!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자세 그대로 굳어버린 그의 옆을 또 한 사람이 스쳐 지나갔다. 클레어보다 몇 배는 더 빠른 속도로 달려나가는 레이몬드 2황자의 옆얼굴을 스치듯 본 것 같았다. 무표정하던 눈동자가 일그러진 채, 똑바로 클레어 헤더만을 응시하며 달려나가고 있었다.

리하르트는 이미 저만큼 달려가 버린 레이몬드 2황자를 기계적으로 돌아보았다.

대체, 왜.

머릿속에 떠오른 건 하나의 물음이었다. 두 사람에게 동시에 묻고 싶은.

너는 왜.

그리고 당신은 어째서.

* * *

다시는 다가가지 않겠다고 했었다. 유리 황녀에게.

그 말은 다시 말해 앞으로 유리 황녀와 관련된 모든 것에 접근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건 황실과 관련된 모든 것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나 또한 황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와 같았다. 지금까지의 일은 전부 잊고 숨죽인 채 살아가야 했다.

그래서, 나는 그날 아침 유리 황녀에게 인사조차 전하지 못한 채 황성을 떠났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서 나는 그곳을 떠났고, 앞으로는 평생 황실과 연관되는 일이 없어야 했다.

그래도 언젠가,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것까진 나도 어쩔 수 없지 않겠는가. 그때는 최소한 지금보다는 나은 모습으로 만나게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눈에 띄고 말았다. 그 사람에게. 그 어느 때보다 한심하고 구차한 모습으로.

내가 얼마나 바보 같아 보일까. 얼마나 우스울까. 어쩌다 여기까지 굴러와선 정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가축 취급당하며 끌려가고, 나를 버렸던 남자에게 도움을 받아 겨우 제자리에 주저 앉아있는 내가.

정말이지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었고, 땅이든 하늘이든 내 몸이 어디론가 꺼져버렸으면 싶었다.

타다닥.

나는 턱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쉬며 계속 내달렸다. 어디서 구두가 벗겨진 건지 흙바닥이며 작은 돌들에 쓸리고 상처 난 발이 통증을 호소해왔다.

나는 그 통증을 무시한 채 달리기만 했다. 자꾸만 다리에 힘이 풀려 여섯 번째쯤 몸이 휘청할 때였다. 이번엔 정말 제대로 넘어지겠구나 예상하며 포기한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순간 뒤에서 뻗어온 손이 내 오른쪽 팔목을 잡고 붙들고는 자기 쪽으로 힘주어 당겼다. 반동 때문에 나는 그대로 누군가의 가슴팍에 풀썩 안기듯 거칠게 부딪쳤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란 나는 그 상태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미안해요, 멋대로 손대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는데.”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쿵쿵 뛰는 심장 소리가 내 것인지, 아니면 상대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마음이 좀 급해서요.”

뭐지, 왜 이렇게 된 거지.

내가 도망치는 것만 생각했지. 설마 상대가 쫓아올 줄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숨을 죽였다.

대답 없이 얌전해진 나를 보며 레이몬드 2황자가 길게 숨을 내쉬는 게 느껴졌다.

그는 내 어깨와 팔을 붙든 채 살짝 뒤로 몸을 물리고는 부드럽게 나를 돌려세웠다. 그가 하는 대로 돌아선 나는 차마 레이몬드 2황자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사락.

커튼처럼 늘어져 얼굴을 가려주는 역할을 하던 머리카락이 갑자기 슥 사라졌다. 양손으로 내 머리칼을 잡고 치워낸 그의 손가락이 피부에 스치듯 닿았다.

“여기 상처.”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내 목 부근을 유심히 바라보던 레이몬드 2황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에 더 놀라 다시 고개를 푹 숙이는데, 긴 손가락이 다가와 내 턱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어디 봐요.”

고개를 숙이지도 못하고 억지로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니, 레이몬드 2황자는 내 얼굴 여기저기를 눈으로 훑어내리고 있었다.

“여긴 벌써 피멍이 들기 시작했네요. 여기도 쓸려서 빨개졌고.”

레이몬드 2황자의 엄지손가락이 내 왼쪽 뺨에 닿았다. 아니, 닿았다고 생각했는데 미세한 차이로 닿지 않고 살며시 쓸어보듯 흉내만 내는 모양새였다. 이 이상은 정말로 허락 없이 손대지 않겠다는 듯이.

“여기도, 또 여기도.”

손이 아닌 눈짓으로 얼굴과 목, 드러난 팔과 손등의 상처를 가리키며 그가 말했다. 나직이 이어지는 목소리가 왠지 점점 싸늘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