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3. 운명이 이끄는 곳으로 (7) (57/152)

03. 운명이 이끄는 곳으로 (7)

그래도 설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제가 죽고 못 사는 것 같던 성녀를 저렇게 내팽개친 채 어디론가 달려가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성녀 역시 그런 제 연인의 모습에 꽤나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이었다.

그 순간 왜 그녀에게서 클레어 헤더의 얼굴이 겹쳐지듯 보인 걸까.

울 것 같은 얼굴로 다른 여인의 옆에 서 있던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던 여자의 모습이 떠오른 순간, 레이몬드는 쥐고 있던 고삐에 힘을 주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래, 말도 안 된다.

머리로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는 걸 아는데,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가슴 속에서 퍼져나갔다.

‘말도 안 되지 그건.’

저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마저 나 몰라라 버려둔 채 달려간 이유가 지금 자신이 필사적으로 찾고 있는 여인이라는 것, 수도에서 사라졌던 그녀가 수도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곳에 있다는 것, 그리고 저 남자가 자신보다 먼저 그녀를 찾아냈다는 것.

어느 것 하나 현실성이 없었다. 맥락도, 개연성도 없는 망상에 불과했다.

그를 뒤따르던 황실의 기사들은 물론, 성녀를 호위하던 성기사들마저 당황하여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눈으로 레이몬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명령을 기다리는 그들의 시선을 알면서도 레이몬드는 꼼짝도 않고 멈춰 서서 점점 멀어져가는 남자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전하!”

그리고 기어이 그마저 고삐를 내던지듯 놓으며 말에서 뛰어내렸다. 리하르트 아델의 뒤를 따라 달려가는 그를 보며 경악한 부하들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레이몬드는 뒤를 돌아보지도 멈춰 서지도 않았다.

놀란 군중들 사이를 달려나가는 레이몬드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클레어 헤더가 행방불명된 날 수도의 성벽 바깥에서 서성거리던 수상한 짐마차 한 대를 발견했으며, 제 상사에게 보고하기 위해 잠시 눈을 뗀 사이에 마차가 사라졌다는 병사의 증언이었다.

그때는 설마 하며 넘겼던 병사의 증언이 떠오른 것과 동시에, 저 남자가 달려가는 끝에 분명 클레어 헤더가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더없이 불쾌하고, 달갑지 않은 확신이.

* * *

3년 전의 그날로, 되돌아간 것만 같았다.

누군가 시계의 태엽을 반대로 돌려 과거로 시간을 되돌려놓은 것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상황에서 그를 마주했다.

그날도 지금과 똑같았다.

빌어먹을 에이든 헤더가 제 친구들과 함께 내 입을 틀어막고 나를 어디론가 끌고 가고 있었고, 나는 발버둥을 쳤고, 도망치려 했지만 다시 붙잡혀 흙바닥에 억지로 주저앉혀져 있었다.

에이든 헤더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망을 보고 있었고, 그 친구 놈들은 낄낄대며 내 몸을 짓누른 채 옷을 벗기려 했다. 손발이 붙들리고 입을 틀어막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눈물만 쏟고 있을 때.

그가, 리하르트 아델이 내 앞에 나타났었다.

그는 그 개 같은 새끼들에게 뭐 하는 짓이냐 묻지도 않았다. 제일 먼저 내 위에 올라타 있던 남자의 뒷덜미를 낚아채 벽이 집어던지고는, 상대가 누군지도 모른 채 덤벼드는 놈들을 차례대로 쓰러뜨렸다.

넷이나 되는 건장한 체구의 남자들을 숨 한 번 흐트러지지 않고 바닥을 나뒹굴 게 만들고는, 찢어진 옷가지로 몸을 가리려 애쓰는 내 앞으로 다가왔었다.

―괜찮아?”

―…….

―괜찮을 리가 없나.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는 내 등 위로 묵직한 천이 내려앉았다. 크고 따뜻한 옷은 헐벗은 내 몸을 전부 덮고도 남아서, 벌벌 떨리는 등도, 멈추지 않는 눈물도 감추어주었다.

―이 새끼들 어떻게 해줄까?

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못하고 울기만 하는 내게 그가 물었었다. 벌레처럼 바닥을 기며 신음하고 있는 쓰레기들을 경멸 어린 눈으로 응시하면서.

그에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겨우 뻗어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그리고 나를 여기서 데리고 나가 달라 애원했다.

그는 귀찮은 눈을 했다. 어쩌면 이대로 손을 내치고 나를 두고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두고 가지 않았다. 그는 걷지도 못하는 나를 자신의 옷으로 감싸들고 안은 채, 내가 바랐던 대로 그 끔찍한 장소에서 빠져 나와주었다.

더 이상 최악도 없을 거라 생각했던 내 인생에서 더 밑이 있다는 걸 알았던 날이었다. 그런 날에 유일하게 내 손을 잡아준 사람이었다. 유일하게 내 말을 들어준 사람이었다. 유일하게 나를 알아 채준 사람이었다.

어떻게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어떻게…….

“괜찮아?”

그날처럼 그가 말을 걸어왔다.

그날과 조금 다른 게 있다면, 아주 조금 숨이 차올라 있었고, 턱 끝에 땀이 맺혀있었고, 아주 조금은…… 나를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눈을 하고 있었다.

아마 내가 그렇게 보고 싶은 것뿐이겠지만. 그렇게 착각하고, 바보같이 기대하고 싶은 것뿐이겠지만. 지금까지 줄곧 그래왔던 것처럼.

“으, 으헉……, 아아악!”

멍하니 그를 바라보기만 하고 있던 나는 깜짝 놀라 옆을 돌아보았다.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던 남자가 손이 잘려 나간 제 손목을 붙든 채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다른 한 명은 보이지 않는 게 그새 어디론가 도망간 것 같았다.

“시끄럽잖아.”

리하르트 아델은 망설임 없이 남자의 얼굴을 걷어찼다. 그대로 벽으로 날아가 처박힌 남자의 몸이 의식을 잃은 듯 축 늘어졌다. 제 바람대로 조용해진 것이 마음에 드는지 한껏 찌푸려져 있던 그의 미간이 그제야 조금 풀어졌다.

또다시 이 사람이 내게 와줬다. 그 어느 때보다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할 때 또다시 이 사람만이 손을 내밀어줬다.

내가 바랐던, 바라지 않았던. 또다시.

“어이, 괜찮냐니까.”

몸을 일으킬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저를 쳐다보기만 하는 내 앞에 그가 느릿느릿 다가왔다. 어느새 그때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는 그가 보였다.

아름다운 남색 눈동자가 내 얼굴과 몸 여기저기를 확인하듯 바라보는 게 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여기 다쳤네. 돌아가서 치료를-.”

“왜 왔어요?”

나는 무표정한 얼굴, 무감각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흙바닥에 쓸려 피가 배어난 내 팔을 응시하던 리하르트 아델이 멈칫하는 게 보였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해오는 남색 눈동자를, 나는 피하지 않았다.

“이제 나 같은 건 신경 쓸 가치도 없잖아요.”

울며 소리를 지르는 것도, 원망의 눈길을 쏘아붙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나는 지금 당신이 여기 있는 이유가 궁금할 뿐이라는 마음을 담아 담담한 목소리를 내어 말했다.

“그래서 버렸잖아요.”

그래, 그렇게나 냉정히 내쳤으면서. 두 번 다시 꼴도 보고 싶지 않다는 듯 내 눈물을 외면했으면서. 빗속에서 몇 시간이고 당신을 기다렸던 나를 허공에 떠도는 먼지 취급했었으면서.

그런데 당신이 지금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주 잠깐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하긴 했었다. 나라는 걸 알아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게 뭐?

몰려든 군중 속에서 나를 발견했더라도, 이 사람이 여기 있을 이유는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난 이 사람에게 버려졌으니까. 그리고 이 사람의 곁에는 그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인이 있으니까.

“나도 몰라.”

리하르트 아델이 짧은 한숨과 함께 피하지 않고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신경이 쓰이는 걸 어떡하라고.”

그걸 묻는 것 자체가 성가시다는 듯 짜증이 섞인 목소리였다. 기껏 구해줬더니 고맙다고는 하지 못할망정 뭘 귀찮게 따져 묻느냐는 듯한 태도였다.

“내버려 두지 그랬어요.”

다 지난 일. 당시엔 그에게 원망의 말 한마디 내뱉지 못했던 지난 일일 뿐이다.

그런데 그 지난 일이, 이제와 뭐가 그렇게 화가 났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그때도.”

모르겠지만, 화가 났다.

신기하게도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지독히도 평온해서, 나조차도 놀랄 정도였다.

리하르트 아델의 잘난 눈썹이 찌푸려졌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걸 보듯 나를 보는 그에게 나는 담담히 말을 내뱉었다.

“그냥 내버려 뒀으면, 그 개새끼들에게 윤간을 당하든, 어디 끌려가서 노예로 팔려가든, 그러다 어디선가 개죽음을 당하든 말든, 내버려 뒀으면 됐잖아.”

그럼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됐잖아.

죽을 만큼 당신을 원하지 않아도 됐잖아.

낡고 헤진 장난감처럼 당신에게 버려지지 않아도 됐잖아.

차라리 죽는 게 더 낫겠다 싶을 만큼 고통받지 않아도 됐잖아.

차마 덧붙이지 못한 말을 삼키며 가만히 그의 남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가 눈을 한 번 깜빡이고는 미간을 더 모았다. 내뱉는 말을 보면 화를 내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내 표정이나 목소리가 너무 평온한 탓에 살짝 헷갈리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마 무척 황당하고 어이가 없지 않을까. 어디 끌려가서 죽을 뻔한 걸 구해줬더니 이제 와서 지난 일까지 꺼내 들며 이런 말을 하는 내가, 얼마나 황당할까 싶었다.

침묵 속에서 서로의 눈동자만 응시하는 동안, 나는 그저 이번에도 꼴사납게 눈물이 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만 했다.

“너-.”

“클레어.”

리하르트 아델이 드디어 입을 열어 뭔가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가 그의 말을 막고서 공간을 울렸다. 움찔, 놀란 듯 굳어진 남색 눈동자가 내 등 뒤로 향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하니 상대를 바라보는 그 눈동자를 보면서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내가 잘못 들은 것이길 바랐지만 리하르트 아델의 표정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지금 내 등 뒤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진짜 레이몬드 2황자가 맞다고.

저벅저벅. 천천히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나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왜, 왜, 어째서. 왜 지금 저 사람이 여기 있는 걸까.

리하르트 아델이 나타났을 때와는 또 전혀 다른 충격과 혼란이 내 몸을 감쌌다.

“클레어.”

여전히 고저가 없이 다정한 목소리가 한 번 더 내 이름을 불렀다. 왜 저를 돌아봐 주지 않냐는 듯이.

나는 성이 아닌 이름으로 나를 부르는 저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다.

‘안 돼.’

나는 흙바닥을 짚고 있는 손을 힘주어 움켜쥐었다. 등 뒤에서 들려오던 발소리가 멎고, 내게 가까워지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리하르트 아델의 표정이 조금 더 차갑게 굳어진 찰나였다.

나는 그대로 땅을 짚은 손에 힘을 주고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뭐, 무슨……!”

스치듯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보며 손을 뻗는 리하르트 아델을 본 것 같았지만, 무사히 붙들리지 않고 달아날 수 있었다. 후들거리는 다리 탓에 비틀거리고, 몇 번이나 넘어질 뻔 하기를 반복하면서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왜 도망치는 거지? 아마 뒤에 남겨진 두 사람의 머릿속에도 똑같이 질문이 떠올랐을 테지만,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을 무시한 채 나는 힘껏 내달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