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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운명이 이끄는 곳으로 (6) (56/152)

03. 운명이 이끄는 곳으로 (6)

“흐음.”

아무런 대답도 못 한 채 이미 새까매진 손으로 목탄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그녀도 생각이 많은 눈으로 나를 가만히 지켜보다 손을 뻗어왔다.

묵직한 뭔가가 머리 위로 내려앉는 느낌이 났다. 뭔가 하고 보니 방금까지 그녀가 걸치고 있던 겉옷이었다.

“잠깐 이거 쓰고 있어.”

그녀는 입고 있던 겉옷을 내 머리 위에 씌워주고는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겨와 앉았다.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는 내게 그리던 거나 마저 그려달라며 양피지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다시 양피지에 목탄을 내리는 순간, 기묘한 감각이 몸을 스쳤다.

터지지 않는 비눗방울 같은 막을 그대로 통과하는 듯한 생경한 느낌이 피부를 스쳤다. 동시에 줄곧 귀를 괴롭게 하던 마물들의 울음소리와 구역질 나는 악취도 사라졌다.

놀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들자, 어느새 마차가 듀란 영지로 들어가는 정문 입구까지 와있었다.

이게 실드의 힘인가. 나는 새삼스럽게 감탄과 존경심이 어린 눈으로 창을 통해 방금 지나쳐온 실드를 돌아보았다. 현 세대의 마법사들이 기이할 정도로 방대한 마력을 타고났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래도 이토록 큰 영지 전체를 감쌀 정도로 거대한 실드를 형성해낸 것은 보면 볼수록 신기하고 대단해 보였다.

“확인 감사합니다.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영지의 통행을 관리하는 관리자가 나와 통행증을 확인하고는 그녀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여 보였다. 그대로 성벽의 정문을 통과한 마차는 빠르게 영지 내로 진입했다.

“금세 해가 질 테니 오늘은 일단 영주의 저택에서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인파가 몰린 곳을 지나칠 즈음 마차의 속도가 느려진 틈을 타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얼굴의 남자가 다가와 말했다.

“그래, 할 수 없지 뭐. 도착하면 호위 둘만 남고 나머지는 돌아가면서 쉬어.”

조용히 창밖을 응시하고 있던 그녀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남자의 등 뒤를 가리켰다.

“그런데 여기 뭐가 이렇게 어수선해?”

“알아보겠습니다.”

그녀의 명령에 잠깐 시야에서 사라졌던 남자는 금세 원래 위치로 돌아왔다.

“오늘 성녀가 듀란 영지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다들 네 번째 문으로 인해 공포심이 극에 달해 지친 상태인지라 성녀의 방문을 무척 반기는 분위기인 것 같습니다.”

두근.

남자가 알아온 소식에서 예상 못 한 이름이 들려와 나는 흠칫 표정을 굳혔다.

“아아, 그래서 이런 거군.”

“그리고 여기서부턴 마차가 지나가기 힘들 것 같습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직접 걸어서 가셔야 할 듯합니다.”

“진짜 번거롭네. 알았어.”

성녀를 맞이하기 위함인지 원래 마차가 지나가던 길을 황실의 기사들이 통제하고 있었고, 양옆으로 족히 몇백 명은 될 것 같은 영지민들이 몰려 서 있었다. 사람도 지나가기 힘들어 보이는 길의 상태에 그녀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마차 문을 열었다.

나는 조금 불안한 눈으로 창밖을 응시하다 안 내리고 뭐 하냐는 핀잔에 얼른 그녀를 따라 마차에서 내려섰다.

“여기서부터 걸어서 영주성으로 가야 해. 가자.”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그녀가 내 손을 잡고는 자연스럽게 영주성 쪽으로 나를 이끌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발끝에 힘을 주며 그녀에게 끌려가지 않기 위해 버텼다.

그런 내 행동에 그녀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저, 저기. 저는.”

나는 당장이라도 어딘가에 있을 레이몬드 2황자나 리하르트 아델의 눈에 띌까 불안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너 왜 그래?”

누가 봐도 이상한 내 태도에 그녀는 물론 그녀의 호위들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았다.

“저는 영주성에는 갈 수 없어요.”

“영주성에? 왜?”

그녀가 곧바로 어이없다는 투로 물어왔다. 나는 그 질문에 답하는 대신 허리를 깊이 숙여보였다.

“여기까지 데리고 와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이후로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뭐?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너 지금 보니까 수중에 돈 한 푼 없는 것 같은데.”

“정말 감사했습니다. 이 은혜는 어떻게든 꼭 갚겠습니다.”

“아니, 아니. 잠깐만!”

그러고는 얼른 자리를 뜨려는 나를 그녀가 재빨리 붙들었다. 여전히 나를 향해 황당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그녀가 다급히 말을 이었다.

“아아, 알았어. 알았어. 이유는 말하기 싫은데 영주성에 갈 수 없는 이유가 있는 거겠지? 알았어, 알았다고.”

그녀는 두 손을 들어 보이며 한숨을 크게 한 번 내쉬고는 주머니를 뒤져 뭔가를 꺼내 내 손에 쥐여주었다.

“그럼 일단 근처에 빌룽헨겐이라는 여관이 있을 거야. 내 호위들도 거기서 머물고 있으니 다른 데 가지 말고 거기서 머물러. 시온이라는 이름을 대면 방을 빌려줄 거야. 그리고 이거. 급한 대로 써. 절대 다른데 새지 말고 곧장 빌룽헨겐이라는 여관으로 가. 거기가 여기선 제일 크고 안전한 여관이라고 했으니까. 나중에 내가 일 끝나면 찾아갈게. 얘기는 그때 가서 다시 하자고.”

손을 펴보니 금화 하나와 은화 몇 개가 쥐어져 있었다. 나는 그것도 거절하려다 문득 정말 수중에 아무것도 없이 빈털터리인 내 현실을 자각하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너무나 염치없고 민망하지만 지금은 일단 그녀의 말을 따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여기서 또 실랑이를 벌이는 일 대신 나는 얌전히 감사의 인사부터 전했다.

“……감사합니다.”

“그래, 그래. 일단 내 말대로 거기서 머무르고 있어. 대화는 나중에!”

그녀의 호위 중 하나가 시간이 촉박하다며 재촉하자 그녀도 조금 다급해진 모양이었다. 그녀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고는 허둥지둥 돌아섰다.

마지막까지 절대 다른데 새지 말고 곧장 빌룽헨겐으로 가라고 외치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금화와 은화를 꼭 쥔 채 조심스레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때 오오-하고 영지민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한순간 귀가 지잉 울릴 정도로 커다란 함성에 나는 급히 귀를 틀어막으며 사람들의 시선이 향한 곳을 돌아보았다.

기사들이 통제한 길 위, 무심한 얼굴로 선두에서 기사들과 함께 말을 타고 지나가는 레이몬드 2황자가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반듯하고 수려한 옆얼굴이 바로 눈앞을 스쳐 가고 있음에도, 까마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고작 며칠 전만 해도 저 사람과 마주 서서 대화까지 나눴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꿈처럼 아득했다.

그리고 바로 뒤로 황실의 마차를 타고 있는 성녀가 영지민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그 뒤를 바짝 붙어선 채 따라오는 기사들의 앞에는 리하르트 아델이 있었다.

경계 어린 눈으로 영지민들을 둘러보던 그의 남색 눈동자와 그 찰나에 눈이 마주쳤다.

‘이런.’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사람들 틈으로 숨었지만, 놀란 듯 커지던 눈동자로 봐선 분명 나를 알아본 것 같았다.

‘아니, 상관없나.’

잠깐 당황하긴 했으나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며 움츠러든 몸을 폈다. 저 사람이라면 나 같은 것과 조금도 얽히고 싶지 않을 테니, 저쪽에서 굳이 나를 알은체할 이유는 없으니까.

나는 움츠러들었던 몸을 조금 펴고 주위에 있던 상냥해 보이는 여성에게 말을 걸었다. 빌룽헨겐이라는 여관을 아느냐고 묻자 여성이 친절하게 여관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나는 대충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기억한 후 감사의 말을 전했다.

나는 여관이 있다는 쪽으로 인파를 헤치며 걸음을 옮겼다. 성녀를 보겠다고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모인 탓에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것도 노동에 가까웠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힘겹게 걸음을 옮길 때였다.

억센 손길이 내 왼손을 잡아채는가 싶더니, 동시에 내 입을 틀어막으며 내 몸을 뒤로 확 끌어당겼다.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끌려간 나는 이렇게 많은 인파 속에서 누구 하나 내게 관심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 끔찍했다.

“쉿.”

인파가 몰린 광장을 빠져나와 으슥한 골목까지 끌려 나왔다는 걸 알고 나서야 겁에 질려 발버둥을 치려 하자, 턱 밑에 서늘한 금속이 와 닿는 게 느껴졌다.

“다치기 싫으면 얌전히 따라와.”

그때 그 목소리다. 날 납치했던 남자 중 하나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어떻게 따라왔는지 궁금한 얼굴이네. 가르쳐줄까?”

남자는 내가 자기를 알아본 걸 알았는지, 낄낄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닥치고 이거나 물려.”

그때 그림자 속에서 남자 하나가 더 걸어 나왔다. 그는 지저분한 머리칼 아래 뱀 같은 눈으로 내 입을 틀어막은 남자를 노려보며 뭔가를 던졌다. 남자는 내 목에 겨누고 있던 칼을 든 손으로 상대가 던진 걸 받아냈다.

“귀찮은 건 꼭 날 시키지.”

남자는 투덜거리며 내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까지 내렸다.

남자의 손이 전부 떨어져 나가고, 잠깐 틈이 생긴 순간 나는 있는 힘껏 남자를 밀치고 내달렸다.

“윽, 이게 진짜……!”

“꺄악!”

하지만 채 몇 걸음 도망가기도 전에 뻗어온 손이 내 머리카락을 휘어잡고 뒤로 당겼다. 내달리던 오른쪽 발을 접질리며 나는 그대로 나동그라지듯 바닥에 쓰러졌다.

“아악!”

이대로면 손이나 발이 날아올 것 같아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고서 움츠러들 때였다.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섬뜩한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동시에 남자의 고통스러워하는 비명이 공간을 갈랐다.

손과 팔, 얼굴에 기분 나쁜 액체 같은 것이 튀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걸까. 예상과 전혀 다른 상황에 잔뜩 겁에 질린 채 손을 내려다보자 검붉은 피 같은 것이 피부에 달라붙어 있는 게 보였다.

“설마 했는데.”

그리고.

덜덜 떨리는 눈을 간신히 들어 바라본 곳에는 살짝 차오른 숨을 몰아쉬며 나를 내려다보는 리하르트 아델이 있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허공에 한 번 휘두르고는,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가 한숨처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였군.”

* * *

“총단장!”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을 시작으로 웅성거림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본 순간 레이몬드의 눈에 들어오는 건, 말에서 뛰어내려 대열을 이탈하고, 군중들 사이를 헤집으며 달려가는 리하르트 아델의 뒷모습이었다.

그의 뒤를 따르던 기사들도, 성녀를 보기 위해 모여든 영지민들도, 마차 안의 성녀도, 그리고 그 자신도, 이 자리의 모두가 갑작스러운 그의 이탈 행위에 놀라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뭘 하는 거지.

수많은 눈이 보는 앞에서 허락도 없이 대열을 이탈하고,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여인마저 내버려 둔 채, 뭘 위해서 저렇게 달려가는 걸까.

멀쩡하던 인간이 갑자기 미쳐버린 것도 아닐 테고.

레이몬드는 이해할 수 없는 리하르트 아델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듀란 영지에 오고부터 요 며칠 전혀 집중을 못 하고 생각에 잠긴 얼굴을 자주 하는 걸 보긴 했다. 성녀가 말을 걸어올 때면 봄꽃처럼 해사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것 같긴 했지만, 그 외엔 멍하니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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