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운명이 이끄는 곳으로 (5)
그녀 본인은 제 품에 안겨있었던 탓에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레이몬드 자신은 분명히 보았다. 제가 흥미를 잃고 버린 장난감이 다른 이의 옆자리에 더없이 소중하게 모셔져 있는 걸 본 남자의 눈동자가 불쾌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하아아.
클레어 헤더가 사라진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에 대해 변명을 하고, 그러길 반복하던 레이몬드는 긴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렇다고 그렇게 사라질 건 없잖아.’
‘최소한 떠난다는 말이라도 해줬으면 됐지 않나.’
불안한 건, 그래서다.
그 다정한 사람이, 유리와 알렌이라면 껌뻑 넘어갈 정도로 그 아이들을 아끼던 사람이, 이렇게 한순간에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진다니. 최소한의 인사도 없이.
자연히 실종과 납치, 좋지 않은 방향으로 생각이 기우는 건 당연했다.
함께 있었던 기사들은 분명히 그녀가 스스로의 의지로 황성을 나간 것이라 했지만, 레이몬드는 그 두 사람도 믿지 않고 있었다.
유리와 알렌이 그녀를 아낀다는 사실은 이미 황성 내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었고, 머지않아 그녀가 자신의 약혼녀가 될 거라는 말도 거의 공공연히 퍼져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는 황실에 반감을 품고 있거나, 그녀를 통해 거액의 돈을 노리고 있는 조직에겐 더할 나위 없이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었다.
지금의 황실을 적으로 돌릴 만큼 정신 나간 인간은 없을 거라 방심하고 있다 당한 거라면…….
달이 구름에 가려져 어두워진 방 안에서, 레이몬드의 금색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만약 정말 그녀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 거라면.’
그때부턴 정말 조용히 지나갈 수 없게 된다.
황실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든가, 제가 사랑하는 동생들을 위해서라든가, 이유는 많다. 그리고 아마 개인적으로도 그녀에게 연민을 느끼는 마음도 없지 않아 있을 터.
어떤 목적에서든, 그게 무엇이든, 제가 보호하고 있던 것이 타인의 손을 타는 것은 불쾌한 법이다. 답지 않게 사람 좋은 척 웃고, 다정하게 대하며 곁에 붙들어둔 노력이 허투루 돌아가는 건 더더욱.
반대로 수십수백 번을 겪어도, 단죄를 위해 타인의 피를 보는 것 또한 그리 내키진 않는다.
‘그러니 어서.’
그는 부디 제게 그런 불행한 미래가 오지 않기를 바라며 제 눈동자에 떠오른 살기를 가만히 억눌렀다.
‘내 시야 안으로 돌아와, 클레어 헤더.’
* * *
“의외로 좋은 경험이 될 수도 있어.”
바다와 가까워질수록 점점 그 숫자와 나타나는 빈도가 늘어나는 몬스터들을 가리키며 나를 구해준 은인인 그녀가 말했다.
난 그 의견에 회의적이었다. 점점 심해지는 악취. 멀리 보이는 실드 바깥에 진드기처럼 덕지덕지 들러붙어 있는 몬스터들을 보고 있자니 두려움에 앞서 구역질이 먼저 치밀었다. 아무리 봐도 좋은 경험으로 치부될 수 있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살면서 한 번쯤은 경험해봐도 좋잖아.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는 땅을 무력으로 뚫고 지나간다든가 하는 건 평범한 사람들에겐 경험하기 힘든 일이니까 말이야.”
그녀는 여전히 겁에 질려있는 나를 제 나름대로 위로해주려 노력하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는 그녀의 말을 흘려들으며 겁에 질린 눈을 창밖으로 돌렸다.
쉴새 없이 나타나는 하급 개체들을 그녀가 고용했다는 용병들이 손쉽게 처리하며 마차는 막힘없이 목적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고용된 용병은 겨우 열 명 남짓이었지만 그녀의 말대로 그들 모두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상당한 실력자들이었다. 고작 하급 개체들을 상대로는 전력이 충분한 탓인지 전체적으로 여유로운 분위기가 흘렀다. 그 속에서 여전히 겁에 질려 벌벌 떠는 건 나뿐이었다.
“이렇게 위험한 상황이라는 걸 알았으면서, 왜 가는 건가요?”
나는 나와는 달리 이런 상황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던 그녀가 어째서 이 마차에 몸을 실었는지가 궁금해졌다.
“나? 그야 당연히 상급 개체들을 직접 보고 싶으니까지.”
내 질문에 그녀가 무척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설명을 덧붙이며 웃었다.
상급 개체라는 건 「문」으로부터 기어 나오는 몬스터들 중 상급에 해당하는 마물들을 가리킨다. 상급, 중급, 하급으로 계급을 나누어 구분 짓는 것인데, 하급 개체들과 달리 상급, 중급 개체들은 「문」에서 멀리 떨어지질 않는다는 소리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족쇄에 묶인 것처럼 어느 정도 「문」과 멀어지면 더이상 이동하지 않고 그 주변만을 맴도는 기질이 있다고 한다.
그게 다행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로 인해 사람이 「문」에 접근하기도 어려워진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가 「문」에 대해 알아낸 정보가 거의 전무하다시피한 것도 그 탓이라고. 유인해내는 것이 불가능한 상급 개체들을 끊임없이 베어내며 문에 접근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그런데 그 상급개체를 보러 간다고?
“운이 좋으면 바다에서 기어 올라오는 레비아탄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고. 그래서 거금을 주고 저 용병들도 고용한 거야.”
그러고는 창문 너머로 하급 개체 중 하나인 블랙 슬라임을 태연히 베어 넘기는 남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한 명은 3년 전까지 용병왕으로 이름을 알렸던 사람이고, 그 사람이 만든 용병 길드에 소속된 정예들에, 또 한 명은 한때 성국에 속해있던 성기사였다고 했나. 덕분에 거의 내 1년치 월급을 털었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러다 정말…….”
“죽기라도 하면 어떡하냐고?”
차마 끝맺지도 못한 물음에 그녀가 다시 픽 웃었다.
“뭐, 목숨을 걸만한 이유가 있긴 해.”
그렇게 말하고는 더는 묻지 말라는 듯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버리는 그녀를 나는 황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뭔가 그녀에게도 그녀 나름의 사연이 있어 보이긴 한데, 그녀가 먼저 말해주지 않는 이상 내 쪽에선 먼저 묻기가 좀 어려웠다.
무척 귀엽고 어려 보이는 외모와 달리 산전수전을 다 겪은 듯 항상 초연한 태도라든가, 어지간해선 무표정이 깨지지 않는 덤덤한 성격이라든가, 남들은 그저 두려워만 하는 마물을 직접 보고 싶어하는 독특한 취향이라든가, 그래서 마물의 소굴에 직접 걸어 들어가는 대담한 모험심이라든가.
어쩌다 보니 함께 달리는 마차 위에서 지내게 된 지 2일째, 나는 아직 이름도 듣지 못한 은인에 대해 대충은 파악하게 되었다.
“다음엔 뭘 그려달라고 하지. 으음.”
진지하게 새 양피지를 꺼내 내밀며 그녀가 고민하는 얼굴을 했다. 나는 살짝 질렸다는 표정으로 그녀가 내민 양피지를 받아들며 옆자리에 놓고 펼쳤다.
그녀는 내가 그림을 그릴 줄 안다는 걸 안 이후, 마차를 타고 오는 내내 계속 가방에서 양피지를 꺼내어 내게 그림을 요구했다. 간단한 스케치도 좋고, 뭐든 좋으니 그려 달라 반짝이는 눈을 하고서 요청해왔다.
목숨을 구해준 은인에게 고작 이런 걸로 보답을 할 수만 있다면 싸게 먹히는 게 아닐까, 하고 쉽게 생각하며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인 걸 지금은 미치도록 후회하고 있었다.
2일 동안 먹고 자는 시간을 빼고는 그녀가 끊임없이 꺼내는 양피지에 질릴 정도로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 이제는 양피지와 목탄만 봐도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서로 이름도 모른 채로 내가 그림을 그리고, 그녀는 그 그림을 보며 눈을 반짝이고, 지난 2일간 마차 안에서 한 것이라곤 그것뿐이었다.
나는 대체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그녀가 내미는 새 양피지를 받아들었다.
“이제 곧 듀란 영지에 도착합니다.”
이번엔 아까 봤던 오우거를 그려달라는 그녀의 요구에 지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창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용병 중 하나가 다가와 말을 전해왔다.
나와 그녀는 그제야 양피지에서 시선을 떼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아득하게 멀게만 느껴지는 거대한 실드가 이제는 손에 닿을 듯 가까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실드 너머로 높은 성벽에 둘러싸여 있는 듀란 영지가 보였다. 동시에 실드 바깥에 우글우글 모여있던 하급 개체들이 일제히 이쪽을 향해 달려드는 공포스러운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지만, 역시나 그녀를 포함해 누구도 멈칫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선두에서 달리던 용병들이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하급 개체들을 너무도 쉽게 베어내는 동안 마차는 막힘없이 계속 내달렸다.
“오, 거의 다왔네.”
여러 의미에서 걱정과 두려움이 뒤섞인 복잡한 얼굴을 하는 나와 달리, 그녀는 무척이나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점점 가까워지는 듀란 영지와 거대한 실드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무한한 호기심과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여전히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다 이런 시선 자체가 너무 큰 실례라는 생각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넌 어떡할래?”
그녀를 따라 듀란 영지를 둘러싸고 있는 실드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는데, 그녀가 덤덤하게 질문을 던져왔다.
“난 일단 우리나라와 성국을 통해 영지 출입을 허락받은 거라 아마 영주의 성에서 머물게 될 것 같거든. 너도 딱히 갈 곳 없으면 나랑 같이 있을래? 우선은 나랑 같이 지내다가, 내 볼일이 끝나면 수도까지 데려다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아도 고민하던 문제를 그녀가 먼저 말을 꺼내주자, 나는 염치없게도 다행이라며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너, 굳이 돌아갈 필요가 있어?”
동정이나 연민이 아니라, 그저 순수하게 의아함이 깃든 질문이었다.
“들어보니까 좋은 취급도 못 받고 살았던 것 같은데. 아예 이대로 내 나라로 같이 가지 않을래? 나라면 네 재능을 썩히지 않을 텐데.”
그녀의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어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생각해보니 내가 굳이 돌아갈 필요가 있을까. 에젯트 헤더는 트뷔에 백작부인이 아니라도 또 어디선가 그런 사람을 찾아와 내 그림을 팔아넘길 게 분명하다. 그녀의 말대로 돌아가봤자 나는 똑같이 불행해질 뿐인데.
나는 가만히 시선을 들어 눈앞의 낯선 은인을 바라보았다.
내 재능을 썩히지 않는다라, 그럼 결국 이 사람도 날 이용하려는 건 아닐까. 장소와 사람만 바뀔 뿐, 또 같은 일이 반복되는 건 아닐까.
그런 내 불안을 읽은 듯 그녀가 제 뺨을 긁적이더니 말을 바꿨다.
“아니면 지금 제국 황실 기사단이나 마탑 소속 마법사들도 대부분 영지 안에 있다고 들었으니 거기에 도움을 청해보면 어떨까.”
하지만 이어진 그녀의 말에는 순간 뒷덜미가 선득해졌다.
제국 황실 기사단, 마탑 소속 마법사들. 두 집단을 떠올리면 자연히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리하르트 아델 공작과 레이몬드 2황자.
이런 상황에서조차도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은, 마주쳐선 안 되는 두 사람이 떠오르자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시는 느낌마저 들었다.
둘 다 절대 우연이라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특히나 지금 이런 꼴로는, 절대로.
앞으로 두 사람에게 절대 접근하지 않겠다고 당당하게 외쳐놓고는 나타나서 도와달라 손을 내밀면 그 꼬락서니가 얼마나 우습겠는가.
그렇다고 이 사람에게 계속 폐를 끼칠 수도 없는 노릇.
나는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시선을 떨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