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운명이 이끄는 곳으로 (4)
내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아무런 대답도 못 하자, 그녀가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지금 수도 밖은 온통 몬스터 천지야. 특히 남서부 지방은 데르카샤 해에 네 번째 「문」이 열려서, 듀란 영지 쪽으로 바닷속에서 끊임없이 마물들이 기어 올라오는 중이지. 그리고 우린 지금 그 듀란 영지로 가고 있는 중이고.”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도 나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로 멍청한 얼굴만 하고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지명이나 단어들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문제는 그것들이 지금 왜 내 주변에서 등장하는 것인지를 이해할 수 없는 거였다.
「문」이란 건, 제국 북부의 얼어붙은 바다, 타란 왕국의 마다라 산맥, 벨루시 소국과 인접한 제르바뉴 해에 존재하는 일그러진 공간을 말하는 거였다. 일그러진 차원의 틈을 통해 무저갱의 마물들이 끊임없이 새어 나오는, 저주받은 입구.
하지만 그건 옛날 이아기였다. 수백 년 전에 존재했고, 그동안 「문」이 열렸다는 이야기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더구나 데르카샤 해라면, 제국의 남서부에 위치한 바다였다. 듀란 영지는 데르카샤 해역을 통해 타국들과의 무역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무역도시였고.
거기에 「문」이 열렸다고? 더구나 네 번째라니. 새로운 「문」이 생겼다는 말인가?
그리고 내가 힘겹게 붙잡은 행운이, 지금 마물들이 득실대는 진창으로 향하고 있는 마차였다니.
“너, 정말 하나도 몰랐어?”
황당하는 듯 재차 묻는 그녀에게 나는 사색이 된 채 고개를 끄덕였다.
허어, 그녀가 본인이 더 당황스럽다는 듯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이 멍청하고 가여운 바보를 어쩌면 좋으냐는 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원치 않게 수도 밖으로 나오게 된 건 알겠는데, 여기서 수도까지 거리가 꽤 되는 건 알지? 게다가 우리 말고 지금 이 시국에 이렇게 영지 밖을 돌아다니는 미친 인간들은 없을 텐데.”
혼란스러워하며 아무 말도 못 하는 내게 그녀가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라는 투로 말했다. 나는 그녀가 하는 말에 무작정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어떡하지.
새하얗게 변한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그 말뿐이었다. 눈앞이 핑글핑글 돌았다. 밀려드는 어지럼증에 비틀거리자 다가온 손이 내 어깨를 붙들어 마차 벽에 기댈 수 있게 도와주었다.
“일단 진정하고, 듀란 영지로 들어가서 상황을 좀 지켜보다가 수도로 돌아갈 기회를 엿보는 게 어때? 이것도 인연이니까 나도 손 닿는 데까지 도와줄게.”
그녀는 절망 어린 얼굴로 말도 잇지 못하는 내가 퍽 안쓰러웠던지, 위로하듯 말을 건넸다.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마. 뭐, 영지에 들어가서 실드 밖으로 나가지만 않으면 크게 위험하진 않을 거야.”
내 얼굴이 당장 죽을 것처럼 창백한 탓이었을까, 그녀는 계속 그렇게까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대수롭지 않은 투로 나를 위로했다.
“그, 이름이 뭐였더라. 그 무슨 황자였는데, 그 왜 현 마탑주 있잖아? 아마 지금 그 사람이 듀란 영지에 머물면서 직접 실드를 관리하고 있다고 들었으니까.”
안타깝게도 그녀가 나를 위로하기 위해 꺼낸 말들은 내게 전혀 위로가 되지 못했지만.
“얌전히 영지 안에 있다가 돌아오면 될 거야.”
* * *
검푸른색의 마력구 위에 손을 얹고 마력을 불어넣자, 푸른빛으로 둘러싸인 마력구 속에 익숙한 얼굴이 비치기 시작했다. 흐릿하게 떠오른 인영은 이내 또렷해져 상대방의 표정과 눈빛까지 세세하게 비춰냈다.
“두 녀석은 어때.”
제이드 백작의 얼굴이 전부 떠오르기도 전에, 레이몬드는 피곤한 눈가를 문지르며 물었다. 스스로가 그리 예민한 성격은 아니라 여겼는데, 그래도 익숙하지 않은 장소에서는 쉬어도 쉬는 것 같지가 않았다.
마탑을 비운 동안 밀려든 서류를 보고 있는 지금도 사실상 쉬는 거라 보긴 어려웠지만.
질문을 받은 백작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그것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했지만, 고지식하다 싶을 만큼 성실한 보좌관은 성실하게 제 질문에 답해왔다.
“두 분 다 여전하십니다. 깨어계실 땐 계속 울며 클레어 헤더 영애를 찾으시고, 그러다 지쳐 잠드시는 패턴의 반복입니다. 황후 폐하께서도 크게 걱정하고 계십니다.”
“소식은 전혀 없나?”
“최선을 다해 찾는 중입니다만, 죄송합니다.”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는 제이드 백작을 외면하며 레이몬드는 의자에 몸을 깊이 묻었다.
그는 벌써 이틀째, 행방이 묘연한 클레어 헤더를 찾고 있었다.
두 번 다시는 리하르트 아델과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한 밤 이후, 다음 날 그녀는 말도 없이 황성을 떠났다. 호위를 맡았던 기사로부터 헤더 자작저로 돌아갔다는 말을 전해 받았으나, 그 직후 또다시 헤더 자작저에서도 모습을 감췄다.
그 사실을 안 유리가 클레어 헤더를 찾아내라 울고불고 난동을 부린 건 당연했고, 알렌까지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고 엉엉 울어대다 열이 올라 쓰러지는 바람에 황실에 비상이 걸렸다. 상황이 유리 녀석이 처음 클레어 헤더를 언급하고 그녀와의 결혼을 종용했을 때보다 몇 배는 더 심각했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이번엔 카롤리나 황후까지 더 필사적이 되어선, 당장 클레어 헤더를 찾아내라 명령을 내려왔다.
유리의 난동이며 카롤리나 황후의 명까지 더해져 황실의 모든 병력을 동원해 수도를 샅샅이 뒤졌지만 결국 클레어 헤더의 행방을 찾는 데는 실패했다.
지금은 그녀를 찾는 벽보를 붙이겠다며,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실력 있는 화가들까지 황실에 불러들인 상태였다.
“수색 범위를 더 넓혀. 수도 밖으로 나갔을 가능성도 놓치지 마.”
“예, 알겠습니다.”
“만약 수도 밖으로 나갔다면, 혼자 힘으로 나갔을 리는 없으니 중개상을 통해 움직였겠지. 최근에 수도 밖으로 나간 통행인들을 확인해봐.”
“최근 수도 밖으로 나가 이동한 건, 이틀 전 듀란 영지로 향한 황실의 기사단뿐입니다. 그 외엔 감시 아래 모든 수도 밖 이동이 금지되었습니다.”
백작의 대답에 레이몬드는 손등으로 턱 끝을 문지르며 답답한 숨을 삼켰다.
수도 안에서 찾질 못하니 수도 밖으로도 시선을 돌리라고는 했지만, 사실 그럴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다. 이런 상황에서 수도 밖으로 나가는 바보 같은 행동을 할 사람은 아닐 테니까. 단지 워낙 갈급하니 혹시 모를 가능성도 붙잡아보는 것뿐이었다.
스스로 모습을 감춘 건지, 납치 같은 불미스러운 일에 휩쓸린 건지, 순식간에 옷깃 하나 보이지 않게 숨어버린 그녀였다.
전자라면 차라리 다행이지만, 후자라면 최대한 빨리 그녀를 찾아내야 했다. 만에 하나 그녀의 신상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가는, 눈이 퉁퉁 붓도록 울어대는 두 동생이 자신을 피 말려 죽게 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괜찮으십니까?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잠시간의 침묵 후에 제이드 백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사무적이고 딱딱한 표정을 지우고는 어느새 제 주군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눈을 하고 있었다.
제 얼굴이 그렇게 좋지 않은가. 백작의 말에 레이몬드는 두 개의 영지 전체에 거대한 실드를 형성하느라 바빴던 지난 며칠간을 떠올렸다.
솔직히 그건 아무리 자신이라도 조금 버거운 일이긴 했다. 레스티아를 포함한 다른 고위 마법사들이 협조해주지 않았다면, 그렇게 단기간 내에 실드를 완성할 순 없었을 것이다.
저와 다른 마법사들이 고생한 덕분에 인명 피해는 예상했던 수치보다 훨씬 낮았고, 그 결과만 놓고 보면 그래도 꽤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영지민들이 저를 신처럼 떠받드는 부담스러운 환영도 황실에 대한 충성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고 여기면 나쁘지 않았다.
“혹시 새로운 소식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도록.”
타인에게 자신의 약해진 모습을 보이는 건 달갑지 않다. 레이몬드는 제이드 백작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남기고 미련 없이 마력구의 연결을 끊어버렸다.
타닥, 타닥.
문득 신경을 잡아채는 소음에 레이몬드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소리지, 하고 주위로 시선을 돌리던 그는 책상을 초조하게 두드리고 있는 제 손가락을 발견했다.
지나치게 피로가 쌓인 탓일까. 전혀 인지하지 못 하고 있던 낯선 제 행동에 당황한 그는 급히 움직임을 멈췄다.
뭐 하는 거야, 그는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구기며 손을 들어 제 머리를 쓸어넘겼다.
‘새로운 소식이라.’
대이변, 대륙 전체를 두려움에 떨게 하며 나타난 네 번째 「문」. 지금 그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움직여야 할 그는 정작 다른 문제에 더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가슴 속이 답답했다. 줄곧.
처음 그녀를 만난 날부터 지금까지도.
낡은 장난감 취급을 당하며 비참하게 버려졌으면서도, 그 상대를 원망하기는커녕 평생 잊지 못할 거라고 말하던 여자가. 그 사람 외에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거라고 단언하던 바보가.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대체 왜, 어디로 떠난 걸까.
그날 밤에 분명히 이제 그 남자는 포기할 거라고, 잊을 거라는 식으로 말했으면서. 그딴 남자는 이제 정말 깨끗이 정리할 것처럼 말했으면서. 그렇게 사람을 안심시키고는 갑자기 이렇게 사라져버리면, 뒤통수라도 맞은 듯한 기분이 드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아니, 안심할 건 또 뭐지.’
애초에 그녀의 마음이 누구를 향하고 있건, 그건 그녀가 알아서 할 문제가 아닌가. 그녀의 마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참견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무례한 행동일 터인데.
‘무례를 저지른 거라면 처음부터 그랬었지.’
지켜보기에 너무 위태로우니까, 내버려 두기엔 너무 답답하니까, 그리고 유리가 그녀를 걱정하고 있으니까. 온갖 핑계를 다 갖다 붙여봐도 제일 한심한 건 그 자신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설마 나 때문인가.’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로 고개를 뒤로 젖혔다.
‘억지로 잊으라고 해서? 계속 참견하는 게 성가셔서?’
그날, 연회장 안에서 죽을 것 같은 얼굴로 제 팔을 벗어나려 발버둥 치던 클레어 헤더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 남자에게 가지 못하게 막아서?’
그 남자가 아니라, 저를 원망하듯 올려다보던 눈동자를 본 순간, 참을 수 없이 화가 났었다.
이미 다른 여자에게 간 남자가 아닌가. 그런 남자에게 뭐하러, 왜. 어째서 아직도 잊지 못하고 그렇게 미련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로 그 남자에게 달려가려는 거냐고. 소리쳐 따져 묻고 싶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 남자가 다시 제게 돌아올 일이 없다는 것도. 그 남자에게 가봤자 상처받는 건 그녀 자신뿐이라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어째서.
실제로 눈앞에 나타난 두 사람을 보고는 울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로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얼굴을 했으면서.
보는 자신이 더 화가 나서 자기도 모르게 함부로 그녀에게 손을 대고 끌어안는 둥 제멋대로 행동하고 말았다. 보란 듯이 그녀는 이제 제 여인이라는 식의 행동을 보였다.
그로 인해 클레어 헤더에겐 관심도 없다는 듯 눈길도 주지 않던 남자의 무표정이 깨어졌을 땐, 그나마 속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상황도 잊고 통쾌하다는 듯 큰 소리로 웃어주고 싶을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