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운명이 이끄는 곳으로 (3)
“이런 시기를 틈타 인신매매를 하는 놈들이 많다고는 들었는데, 진짜일 줄이야.”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여유로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내가 진짜 감이 좋다니까?”
스르릉.
그리고 여기저기서 동시에 검이 검집에서 빠져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 아닙니다. 저, 저건 제 동생인데 피부병이 심한 탓에 저렇게…….”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건 아니지?”
남자가 변명 비슷한 걸 해보려 했으나, 상대는 전혀 믿지 않았다.
[어찌할까요, 시온님.]
[저거 풀어 줘봐.]
또다시 낯선 언어로 상대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더니, 커다란 손이 내 얼굴을 덮고 있던 천을 휙 벗겨내고 입에 물려 있던 재갈도 풀어주었다.
그제야 눈앞에 빛이 돌아오며 앞이 보였다.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빛에 시야가 한순간 보이지 않았다. 눈을 잔뜩 찌푸린 채 시야가 돌아오길 기다렸고, 이내 눈앞에는 낯설고 생경한 풍경들이 들어찼다.
제일 먼저, 무장한 남자들과 이국적인 외모의 여성이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마도 나를 납치한 게 분명한 남자 둘과 트뷔에 백작부인, 마차를 몰고 있던 마부까지 전부 무장한 남자들의 검에 목이 겨눠진 채 벌벌 떨고 있었다.
트뷔에 백작부인은 그사이에 어설프게 머리에 천을 뒤집어쓴 모양새였는데, 어떻게든 제 얼굴을 상대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느낌이었다.
사람 수가 더 많은 걸 제외하더라도 상대방은 척 보기에도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압도적인 전력 차에 싸울 의지도 잃은 듯, 트뷔에 백작부인을 포함해 날 납치한 일행은 전부 항복의 표시로 두 손을 들어 보일 뿐이었다.
“이봐, 거기 너.”
나는 갑자기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들이 시야에 들어오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멍청한 얼굴로 주변을 응시하고 있으니, 처음 이곳에서 마차를 멈춰 세울 때 들려왔던 목소리의 주인이 나를 불렀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그녀는 마차 안에서 창틀에 기댄 채 나를 향해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도와줄까?”
오만한 미소, 그보다 더 오만한 말투였다. 불쾌하리만치 나를 흥미로운 장난감 보듯 내려다보는 시선이었지만 나는 그녀의 도움이 필요했다.
“도와……주세요.”
나는 손발이 묶여 움직임조차 자유롭지 않은 상태에서 비굴할 정도로 여자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간절한 내 모습이 또 재미있었던 걸까. 그녀가 킥킥 웃으며 자신의 부하들로 보이는 남자들에게 명령했다.
“저 애 풀어주고, 내 마차에 태워.”
그러자 제일 가까이에 서 있던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다가와 내 손과 발을 묶은 줄을 풀어주었다. 그러고는 제 주인의 명령대로 말없이 나를 부축해 마차로 데려갔다.
마차 문이 덜컥 열렸다. 여자는 내가 마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가만히 보더니, 반대로 자신은 마차에서 휙 뛰어 내려섰다.
“이 자들은 어찌할까요?”
“흐음.”
마부에게 검을 겨누고 있던 남자의 담담한 질문에 그녀가 잠깐 생각하는 얼굴을 했다.
“잠깐 검 좀 빌려줘.”
여자가 다시 웃으며 손을 뻗자, 나를 마차 안에 태워준 남자가 다가가 그녀에게 제 검을 내밀었다.
그녀는 남자가 내민 검을 받아들고는 마부가 있는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고는 그대로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겁에 질린 마부가 살려달라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납작 엎드림과 동시에 여자의 검이 휘둘러졌다.
콰악!
그녀의 검은 마차와 두 마리의 말을 연결하고 있는 여러 개의 줄 중 하나를 잘랐다. 그녀는 즐거운 듯 마차와 말을 연결한 줄들을 하나씩 끊어냈다. 넋이 나가 있는 사람들 틈에서 마지막으로 그녀는 잔뜩 신이 난 얼굴로 말들의 엉덩이를 손으로 찰싹 때렸다.
“너넨 이제 자유다, 멀리 멀리 가버려!”
그녀는 말들을 멀리 쫓아내고 허허벌판에 남겨진 짐마차를 보고는 속이 시원하다는 듯 통쾌하게 웃었다.
“뭐, 이렇게 두면 알아서 죽든가 살든가 하겠지.”
그녀가 부하에게 검을 돌려준 뒤, 손을 탁탁 털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히 마차에 올라타며 말했다.
“우린 그만 갈까. 괜히 성가신 것들이라도 오면 일정이 늦어지니까.”
그녀의 명령에 남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나를 납치했던 이들을 내버려 둔 채 저마다 타고 온 말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자, 출발.”
그녀가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이랴! 마부의 외침에 마차가 부드럽게 달리기 시작했다. 마차를 따라 남자들을 태운 말들도 마차 옆에 바짝 붙어선 채 움직였다.
끔찍할 정도로 승차감이 나빴던 앞의 마차와 달리, 나는 덜컹거림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마차에 앉아 숨을 골랐다.
모든 게 전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단 몇 분 전만 해도 상상도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고, 아직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머리가 다 따라가진 못했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내 의지로 내가 원치 않는 일을 떨쳐내고 나왔다는 것. 물론 이번에도 타인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겠지만, 무력하게 끌려가기만 하던 인생이 조금은 달라진 것 같아 가슴이 벅찼다.
“물 마실래?”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어떻게 감사의 말을 전하는 게 좋을까, 고민하는 사이 그녀가 물이 든 수통을 내밀며 말했다. 무심코 그것을 거절하려던 나는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고는 얌전히 수통을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막상 받아들고서는 물을 마실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녀에게 고개를 깊이 숙여 감사의 인사부터 전했다. 이 사람이 아니었으면 어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저기, 넌 어쩌다 그렇게 된 거야? 집은 어디야?”
그런 나를 가만히 지켜보던 그녀가 물었다.
부모의 손을 놓치고 미아가 된 아이를 달래는 듯한 그녀의 말투에 서러움이 북받쳤다. 막을 새도 없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저는.”
왜 그랬을까. 나도 모르겠다.
지금껏 한 번도 다른 누군가에게 털어놓은 적 없던 이야기를 그녀에게 전부 털어놓고 말았다. 이름 없는 가문의 이름 없는 영애, 비굴하게 그림을 팔아 살아왔던 지난날들의 이야기들을 전부.
그건 아마 그녀가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어서가 아닐까 생각했다.
제국어를 능숙하게 쓰고는 있지만, 그녀는 딱 보아도 제국 사람도 아닌 타국의 귀족인 듯했고, 그녀에게 털어놓는다 해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오히려 그래서 더 마음이 편히 얘기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힘들었겠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도, 다정한 음성과 시선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그 단순한 한 마디에 텅 빈 방 안에 굶주린 배를 움켜쥔 채 몸을 웅크리고 있던 어린 시절의 나와, 모든 걸 잃고 여기 있는 스무 살의 내가 커다란 위안을 받은 느낌이었다.
이미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던 상태에서 나는 서럽게 일그러뜨린 얼굴을 두 손에 묻었다.
힘들었다. 너무 힘들어서 힘들다는 것조차 모른 채 살아왔었다.
한 번도 타인에게 털어놓은 적 없던 나의 이야기를 누군가가 들어주고, 힘들었겠다고 말해주는 게 이토록 위안이 될 줄은 몰랐다.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하고 싶어?”
한참이 지나 내가 겨우 진정하고 눈물을 그칠 무렵, 그녀가 담담히 물어왔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답했다.
“내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우습게도 나는 당장 발 뻗고 누울 집도, 먹을 것도, 갈아입을 옷가지 하나도 없는 주제에 그림부터 욕심을 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앞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당당하게 서고 싶어요.”
그런 한심한 대답에도 그녀는 나를 비웃지 않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비겁한 짓을 한 사람은 누구야? 대리 화가라니, 우리나라에선 절대 용서받지 못할 행동인데.”
덜컹.
큰 돌부리가 있었던 건지, 부드럽게 움직이던 마차가 한 번 크게 덜컹거렸다. 쿵. 묵직한 무언가가 내려앉으며 땅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말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내가 대답을 망설이는 걸 알고서 그녀는 쉽게 물러났다.
앞서서 내 과거사를 줄줄줄 털어놓던 것과 달리, 타인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려니 망설여졌다. 이건 그녀가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과는 조금 다른 문제였다.
하지만 어차피 이 사람에게 말해도,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텐데. 그리 생각하니 말하지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이미 내 대답 따윈 전혀 관심 없는 듯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마음을 더 가볍게 만들어주었다.
“트뷔에 백작부인, 제가 아는 건 그 이름뿐이에요.”
창밖을 내다보던 그녀의 눈동자가 한순간 변했다. 나른하고 느슨하게 풀려있는 듯하던 분위기가 잘 벼려진 검처럼 날카로워졌다.
“……뭐?”
콰앙!
벼락처럼 마차 벽을 내리치는 손길에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도, 그녀도 놀란 눈으로 창밖을 돌아보자, 마차 벽을 내리친 주먹을 느릿느릿 내리는 남자가 보였다. 그녀의 마차를 호위하던 남자들 중 하나였다.
“죄송합니다, 계속 제 목소리를 듣지 못하시는 것 같아서요.”
그는 어딘가 졸린 얼굴을 하고 있었고, 말투에서도 귀찮음이 한가득 묻어났다.
“저희가 있으니 별문제는 없겠지만, 일단은 알고 계십시오. 하급 개체들 몇이 나타나 주변이 조금 시끄러울 겁니다. 지금 렉스를 포함해 3명이 개체들이 나타난 쪽으로 갔습니다. 나머지는 여기서 마차를 호위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태도가 너무나 초연해서, 갑자기 하급 개체가 나타났다느니, 주변이 시끄러울 거라느니, 하는 말들이 쉽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어엉, 수고해줘.”
그녀는 남자가 하는 말들을 금세 이해한 듯 무표정하게 손을 휙휙 저어 보였다. 알겠으니 더 말 안 해도 된다는 의미 같았다.
끼에에엑!
소름 끼치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반사적으로 귀를 틀어막으며 창가를 돌아보았으나, 보이는 건 여전히 졸음기 가득한 남자의 옆얼굴뿐이었다.
남자의 말대로 바깥은 시끄러워졌다. 알 수 없는 꺼림칙한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걱정 마, 전부 쓸만한 사람들이니 괜찮을 거야. 게다가 고작 하급 개체인데 뭐. 그보다 너 여기 아무거나 그려줄 수 있어?”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창밖만 응시하고 있는 내게 시온이 태연한 어조로 말을 꺼내고는 갑자기 어디선가 꺼낸 양피지와 연필을 눈앞으로 들이밀었다.
나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끔찍한 소리를 전혀 설명해줄 의향이 없는 그녀의 태연자약한 태도를 이해할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밖에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예요? 하급 개체라뇨? 그게 대체 뭔가요?”
“어엉?”
그녀는 그런 질문을 하는 내가 오히려 이상하다는 눈치였다. 질문 자체를 이해 못 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기까지 했다.
“설마 요즘 수도 바깥 상황을 전혀 몰랐던 건 아니지?”
“…….”
“……진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