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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운명이 이끄는 곳으로 (2) (52/152)

03. 운명이 이끄는 곳으로 (2)

트뷔에 백작부인. 아는 것이라곤 그 이름뿐인 저 사람은 이제 에젯트 헤더를 통해 내 그림을 사들이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게 된 것이겠지. 저 사람에겐 어디든 자신의 시야가 닿는 곳에서, 언제든 자신이 원할 때 기계처럼 그림을 찍어내는 도구가 필요한 것이다.

귀족이라고 해봤자 타국의, 권력도 명예도 없는 가문의, 이름 없는 귀족 영애.

흔적을 남기지 않고 조용히 납치해 제 저택의 지하실 어딘가에 가둬놓으면 누군가 찾지도 않을, 찾을 가치도 없는 나라는 존재가 그녀에겐 더없이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었으리라.

그녀의 말대로 이곳에서도 제대로 된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고 자란 나이니 그녀를 따라가건 가지 않건 지금과 별 다를 바 없는 인생일 것이라는 건 나도 안다. 어디서든 나는 지금과 비슷한 삶을 살아가게 될 테니까. 평생을 내 이름 따윈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누군가의 그림자 속에서 기생하며 살아갈 뿐인 그런 하찮은 존재니까.

어쩌면 그녀의 말대로 그녀를 따라가는 게 지금보다는 더 나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난 결국 빛 아래 설 수 없는 사람이니까. 차라리 그녀의 이름으로 세상에 드러날 그림이라도 그리며 살아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언젠가 또…… 트뷔에 백작부인의 이름으로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의 앞에 내 그림이 내걸리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림으로나마 두 사람과의 접점이 생기는 게, 그나마 내 인생이 조금은 덜 하찮게 느껴질지도 모르니까.

눈가를 덮은 천이 축축하게 젖는 게 느껴졌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조용히 상황을 판단하고, 순식간에 모든 걸 포기해버리는 내가 있다. 한심하고, 불쌍하고, 환멸이 났다.

어릴 때부터 포기하는 게 익숙했었다. 아무리 울어도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아이는 더 이상 울지 않게 되는 것처럼.

나도 그랬다.

배가 고파서 죽을 것 같은 때에도, 몸이 펄펄 끓어오르는 것처럼 열이 올라 쓰러져도, 넘어져서 상처를 입어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으니까. 시간이 지나길 기다리며 고통을 참고 견뎌내거나, 그냥 포기해버리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합리화하며 겁쟁이인 나를 두둔하고, 끌어안은 채 살아왔다.

“여기서부터 남서부 지역입니다. 이제 곧 듀란 영지를 지나칠 겁니다.”

“조심해, 주위를 잘 살펴. 하급 개체 하나라도 비치면 죽자 살자 피해서 가야 해.”

길이 점점 더 거칠어져, 신음을 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있을 즈음 잔뜩 긴장한 듯한 사람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하급 개체가 뭐지?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였다. 대화를 나눈 두 사람은 뭔가를 두려워하고 있었고, 그에 덩달아 나까지 불안해져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신경을 잔뜩 곤두세웠다.

“어, 저기!”

그 순간 남자 하나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너무 놀라 움찔 몸을 움츠리고 말았다.

“왜, 뭔데! 어디?”

“뭐야?”

“저기 저거요, 마차인 것 같은데?”

“망할, 놀랐잖아! 이 자식아!”

퍼억!

다른 이들도 남자로 인해 무척 놀란 듯, 누군가 남자의 머리를 세게 후려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 그렇다고 왜 때려요!”

“내가 이래서 애초부터 이 새낀 데려오지 말자고 한 거야.”

“나 말고 이런 위험한 걸 한다는 놈이 있긴 하고요?”

“시끄러워, 둘 다 이제 입 좀 닥치고 있어.”

다행인 건 자기들끼리 옥신각신하느라 아무도 내가 깨어난 건 모르는 기색이었다. 나는 천 안쪽에서 숨죽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쪽으로 오는 것 같은데요?”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을 텐데 숨는 게 낫지 않겠어요?”

남자들이 말을 꺼내자마자 누군가 내 쪽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말을 꺼낸 건 남자들이니 아마 지금 곁으로 다가온 건 트뷔에 백작부인 쪽인 듯했다. 혹시라도 가까이 다가온 트뷔에 백작부인이 내가 깨어난 걸 알아챌까 몸이 절로 긴장되었다.

펄럭, 가까이에서 무거운 천을 덮어쓰는 듯한 소리가 들렸고, 동시에 우리 외에 또 다른 마차와 말발굽 소리가 땅을 울렸다.

그리고.

“오, 나 말고도 이런 시기에 여길 지나는 사람이 있네?”

* * *

마차 밖에서 또 하나의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이런 꼴로 만든 트뷔에 백작부인과 비슷한 정도로, 어딘가 조금 어색한 제국어였다. 말을 전달하는 데는 아무런 무리가 없지만, 발음이 완벽하지 않고 살짝 어눌한 감이 있었다.

저 사람도 제국민이 아닌 걸까, 생각하는 찰나 내 옆에 바짝 붙어 앉은 듯한 트뷔에 백작부인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왜 저 여자가 여길…….]

경악하고, 불안해하는 감정이 또렷이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지만 그 감정만은 손에 잡힐 듯 선명히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를 두려워하듯이.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을 들켜선 안 되는 누군가를 만난 것처럼.

[안 돼. 절대 들키면 안 돼.]

트뷔에 백작부인은 이상하다 싶을 만큼 극심하게 떨고 있었다. 상대가 대체 누구이기에 저렇게까지 두려워하는 걸까 궁금해질 정도였다.

“피해, 피해야 해. 빨리 어떻게든 저 여자를 돌려보내.”

그녀의 입에서 다급히 제국어와 알 수 없는 언어가 뒤섞여 튀어나왔다. 그녀가 남자의 등을 떠민 탓인지 마차가 한순간 기우는 느낌도 났다. 남자가 왜 밀고 난리냐며 투덜거리면서도 움직이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덩달아 긴장했는지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절대, 절대 이걸 들키면 안 돼.”

남자를 등 떠민 후, 트뷔에 백작부인은 꼭 스스로에게 세뇌라도 걸듯 같은 말을 반복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녀가 지칭하는 「이것」이 나라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왜? 라는 의문은 떠올릴 가치도 없었다. 답은 간단한 거였으니까.

나를 이런 식으로 납치했다는 사실을 들키면 곤란한 상대가 나타난 것이다.

그 사실을 자각한 순간 나는 망설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대로 트뷔에 백작부인에게 끌려가도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포기했으면서, 어디를 가도 내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자조했으면서. 예상치 못한 희망의 빛이 보이자 지금은 또 다른 감정이 가슴을 치고 흘러나왔다.

정말 이대로 끌려가 또다시 가축처럼 어두운 방 안에 갇혀 그림만 그려야 하는 인생으로 괜찮은 걸까. 평생 내 이름 한 번 알리지 못하고, 내 그림들을 다른 이의 이름으로 세상에 내보이기만 하는 그런 인생으로 만족할 수 있는 걸까.

죽을 때까지 그런 인생에 후회하지 않을 거라 자신할 수 있을까.

그리고 트뷔에 백작부인이 두려워하는 상대가 나를 도와줄 거라는 확신도 없건만, 멋대로 희망을 가져도 되는 걸까. 여기서 빠져나간다고 해도 정말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아무것도 확신할 수 있는 게 없어 망설여졌다. 두렵고, 겁이 나기도 했다.

―언니는 어때요? 이 그림 멋지지 않아요?

숨을 죽인 채 벌벌 떨기만 하던 나는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기억들에 멈칫했다.

카롤리나 황후궁에 있던 아르가디아를 마주했던 순간, 내가 느꼈던 감정들을 떠올렸다. 서럽고, 억울하고, 분했던 감정들을 토해내지 못하고 홀로 삼켜야 했던 때를 떠올렸다.

―언니 대단해요. 완전 멋있어. 더 좋아하게 될 것 같아요.

그리고 태어나 처음으로 내가 그린 그림을 좋아하는 이에게 보여주고, 그 사람이 기뻐해 주었던 기억들도. 눈물이 날 것처럼 기쁘고, 행복했던 그 순간들이 전부.

앞으로는 두 번 다시 다가가지도 못할 상대였지만, 언젠가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가 보게 될 그림들에 내가 아닌 다른 이의 이름이 섞여드는 건 싫었다. 나를 더는 좋아해 주지 않더라도, 당당하게 내 그림을 보여주고 싶었다. 최소한 내 그림을 보는 순간만큼은 나를 기억해주길 바랐다.

나는 더 이상 지금과 같은 인생은 죽어도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더는 절대로.

“저희에게 뭔가 볼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어느새 마차에서 내린 남자가 상대를 향해 여유로운 척 질문을 되돌렸다. 그러면서도 마차의 문을 다시 굳게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응? 아니, 그…….”

쿠웅!

상대쪽 여자가 무언가 말을 하려는 찰나였다. 나는 마차 안의 사람들이 내가 잠들어있다 여기며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 몸을 힘껏 굴렸다. 그리고 묶여있는 다리를 들어 마차 벽을 힘껏 걷어찼다. 한순간 마차가 기우뚱할 만큼 큰 충격이었다.

[이 망할 계집이.]

주변이 잠깐 조용해졌다 싶더니, 트뷔에 백작부인의 손이 내 몸을 짓누르는 게 느껴졌다.

“어이구, 쌓아뒀던 짐이 쓰러졌네. 내가 정리할게.”

그녀가 작게 욕설을 내뱉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한 사람 더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가만있어. 어디 하나 못 쓰게 되기 싫으면.”

남자는 여자보다 더 강한 힘으로 내 몸을 제압하며 낮게 속삭였다.

숨이 막혔다. 등을 짓누르는 힘에 이대로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럼 저흰 바빠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있잖아, 그쪽은 여기 무슨 일로 온 거야? 나처럼 관광? ……은 아닌 것 같은데.”

“왜 저렇게 관심이 많아.”

낯선 여자가 자꾸 자기들에게 관심을 가지자, 내 등을 짓누르고 있는 남자가 작게 혀를 차며 말했다.

쉿! 마찬가지로 내 팔을 부서지라 붙든 트뷔에 백작부인이 남자를 향해 조용히 하라는 태도를 보였다.

“듀란 영지에 운송할 게 있어서 가는 중입니다.”

“오, 뭔데?”

“그, 식료품 같은 겁니다.”

“헤에.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영지 밖으로 이동하는 거 금지되어 있지 않아?”

“아, 네. 뭐, 그렇긴 한데 워낙 급한 거라…….”

“흐음, 그래?”

[시온님, 그만 가시죠. 밤이 되기 전에는 멜린트 영지 안으로 들어가시는 게 좋습니다.]

이번엔 온전히 낯선 타국의 언어가 들려왔다. 낮고 묵직한 저음의 목소리가 뭐라고 말을 건네자, 여자도 내가 알아듣지 못할 언어로 대답하는 게 들렸다.

설마 이대로 가버리는 건가.

저 사람들까지 가버리면, 나는 이대로 이 마차에 짐처럼 실린 채 타국으로 넘어가겠지. 그리고 평생 이 나라로 되돌아오지도 못하겠지. 트뷔에 백작부인, 저 여자의 저택 어딘가에 갇힌 채로 평생-.

‘싫어!’

나는 남자가 방심하고 팔에 힘을 푼 때를 노려 이를 악물고서 발버둥을 쳤다.

“아악!”

발버둥 치면서 내 다리가 트뷔에 백작부인을 걷어찬 모양이었다. 트뷔에 백작부인이 비명을 내지르자, 당황한 남자가 욕설을 내뱉으며 다시 나를 힘주어 제압했다.

“빌어먹을.”

“뭐야?”

마차 밖의 상대도 다시 이쪽에 관심을 가졌다.

“수상하네, 가서 뒤에 열어봐.”

여자가 뭐라고 지시하자, 금속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면서 누군가 마차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뭐, 뭐, 뭐 하는 겁니까?”

콰앙!

남자가 제지할 새도 없이 거칠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로 봐선 문이 걸레짝 상태로 부서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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