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운명이 이끄는 곳으로 (1)
바닥이, 흔들렸다.
뭔가에 부딪힌 듯 거친 충격이 느껴지기도 하고, 덜걱거리며 계속 자잘한 흔들림이 느껴졌다. 그 탓인지 머리가 아프고 속이 울렁거렸다. 거기다 뭔가 단단한 천 같은 것이 입을 틀어막고 있는 느낌이 답답하고 불편했다.
이게 뭐지? 생경한 감각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팔을 움직여 딱딱한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몸이 뜻대로 움직여지질 않았다. 분명 눈을 떴는데도 앞이 보이지 않았고, 팔과 몸은 뭔가에 꽁꽁 묶인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눈이 보이지 않는 것,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 것. 그 두 가지 사실만으로도 나는 순식간에 공포에 사로잡혔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어떻게 된 거지,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겁에 질려 그 순간부터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졌다.
시각을 완전히 차단당한 상태에서 나는 최대한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덜컹거리는 소리나 움직임으로 봐선 아마 지금 나는 빠르게 달리는 마차 안에 있는 것 같았다.
대체 내가 왜 이런 상태로 달리는 마차 안에 있는 걸까. 혼란스러운 상태로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그래도 지금 그쪽으로 가는 건 너무 위험한데요.”
“그럼 달리 안전한 루트라도 있나?”
한숨 섞인 남자의 목소리에 이어 신경질적인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남자 쪽은 능숙하지만, 여자 쪽은 어딘가 어눌하고 어색한 제국어를 쓰고 있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음성에 다급히 기억을 더듬는 찰나였다.
“아무리 이름도 뭣도 없는 가문이라고는 해도 귀족가의 영애다. 귀족 영애를, 그것도 타국의 귀족을 납치했다는 사실을 들키면 나나 당신들이나 무사할 것 같아?”
사람이 너무 궁지에 몰리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고 했던가. 남자를 향해 애써 목소리를 낮춰 외치는 여자의 음성을, 그 낯익은 목소리의 주인을 나는 그 찰나에 알아차렸다.
트뷔에 백작부인, 그 사람이다. 헤더 자작가까지 직접 찾아와 내게 그림을 내어놓으라 외쳤던 사람. 지금까지 줄곧 내 그림을 사들여 자신의 것인 양 행세한 사람. 그리고 다시 나를 그 좁은 방 안에 가뒀던 사람.
“에이, 여기까지 왔는데 설마 들키겠어요?”
“속 편한 소리 지껄이지 마. 일이 어찌 될지 모르는 상황이니, 최대한 빨리 국경을 넘어야 해.”
그녀는 초조해 보였다.
드극드극, 손톱을 물어뜯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저걸 황금알을 낳는 오리쯤으로 여기고 있는 에젯트 헤더가 이대로 가만있을 리가 없어.”
“그래도 이건 진짜 아닌 것 같은데. 재수 없이 상급 개체라도 맞닥뜨리면 어쩌려고요?”
“듀란 영지만 무사히 지나면 괜찮아. 쓸데없는 걱정 말고 주변이나 잘 살펴.”
“쳇, 나중에 일이 잘못돼도 난 모릅니다.”
둘은 잠시 언쟁을 벌였으나, 결국은 남자가 마지못해 트뷔에 백작부인의 말을 따르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저건 언제 깨어나지?”
“시간상으론 벌써 깨어났어야 하는데, 이상하네. 조엔, 너 이 새끼 또 약 너무 많이 묻힌 거 아니냐?”
“아, 아니라고요! 정 깨우고 싶으면 흔들어서 깨워봐요.”
마차 안에 두 사람만 있는 게 아니었구나. 불쑥 들려오는 또 다른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조용히 상황을 주시했다.
“아냐, 괜히 시끄럽게 하는 것보다 계속 자게 두는 게 나아.”
보이진 않지만 느낌상 세 사람의 시선이 내 쪽을 돌아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최대한 내가 깨어났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자연스럽게 몸을 늘어뜨렸다.
덜컹. 마차가 한 번 더 크게 덜컹거리며 몸이 출렁거렸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짐 같은 상태인 나는 얼굴과 몸에 고스란히 느껴지는 충격에 이를 악물었다.
“진작 이렇게 해야 했어. 괜히 그 여자를 중간에 껴서 돈만 몇 배로 더 들었잖아.”
여자가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남자가 낄낄 웃음을 흘렸다.
“하여간 진짜 있는 사람들이 더 하다더니.”
“그런데 저 아가씨가 안 그리겠다고 하면 어쩌려고요?”
또 다른 남자의 질문에 이번엔 여자가 짧게 픽, 웃었다.
“말했잖아, 어떻게든 그리게 하겠다고. 지하에 가둬놓고 며칠만 굶기면 울면서 애원해올걸.”
보이지 않아도 여자의 시선이 내게 닿는 게 느껴졌다. 마치 손에 잘 맞는 도구를 들인 사람처럼 만족감 가득한 목소리가 소름 끼쳤다.
“어차피 저 애도 나한테 오는 게 훨씬 나을 거야. 말만 잘 들으면 원하는 건 뭐든 안겨줄 테니까. 넓고 쾌적한 방, 좋은 옷, 따뜻한 식사, 뭐든지.”
“그럼 뭐합니까. 평생 집에서 기르는 가축처럼 묶어둘 거면서.”
“그야 어쩔 수 없지. 오리가 도망이라도 치면 곤란하니.”
드문드문 들려오는 대화만으로, 나는 대부분의 상황을 파악했다. 세 사람 모두 내가 잠들어있다 여긴 채 조심성 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기 때문이었다. 혹은 내가 깨어있어도 상관이 없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