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31) (50/152)

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31)

그녀는 황후궁의 입구를 지나치자마자 서늘한 얼굴로 시녀장을 돌아보았다.

“유리는 지금 어디 있나.”

“황녀 전하께서는…….”

“어디 있냐니까.”

유리 황녀가 어디 있냐는 질문에 시녀장이 창백해진 얼굴로 대답을 망설였다. 늦어지는 대답에 그녀가 서늘한 음성으로 다시 한번 묻자 시녀장이 머뭇머뭇 어렵게 입을 열었다.

“온실 뒤의 유리아님의 궁에 계십니다.”

클레어 헤더가 없어진 걸 알았으니 난리가 났을 거라 짐작은 했지만, 너무 의외의 장소가 튀어나와 카롤리나 황후도 놀랐다.

“그 애가 거길 지금 왜…….”

잠깐 혼란스러워하던 그녀는 일단 유리를 찾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는지, 그 즉시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제 막 온실이 보일 무렵 카롤리나 황후는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급히 멈춰 섰다.

“황후 폐하?”

따르던 시녀장이 갑작스럽게 멈춰 선 그녀를 조심스레 불렀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카롤리나 황후는 그녀답지 않게 망설이는 눈으로 눈앞의 온실과 그 뒤로 보이는 궁을 바라보았다.

일부러 더 외면하고 발길을 끊었던 장소를, 그곳의 주인을 꼭 닮은 제 아이로 인해 찾아가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 순간 거부감이 들었다.

소중한 제 아이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도, 더없이 소중하지만 애써 잊고 있던 기억들로 가득한 장소에 이제 와서 다시 발을 디딘다는 사실도 내키지 않았다.

시간이 너무 흘러서 더는 과거의 모습이 하나도 남지 않는 제가 다시 그곳에 발을 들이는 게 싫었다. 잊으려 노력했지만 단 한 조각도 마모되지 않도록 보석함에 넣어두었던 그 애와의 추억들이 망가지고 희석되는 게 싫었다.

그런 마음을 자각하자마자 반사적으로 그녀가 뒷걸음질을 쳤을 때였다.

“황후 폐하!”

시녀장이 다시 한번 저를 부른 찰나 멀리서 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이 그 애의 궁이라, 순간 그 애가 울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카롤리나 황후는 더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서 뛰듯이 걸음을 옮겨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다가갔다. 궁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커지는 울음소리에 그녀의 마음도 점점 더 초조해졌다.

“유리……!”

드디어 궁의 모습이 드러나고 소중한 딸을 발견했을 때였다. 다급히 딸의 이름을 외침과 동시에 카롤리나 황후는 순간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 제 눈을 의심했다.

분명 땅도 하늘도 모조리 죽어버린 것처럼 회색으로 물들어 텅 비어있어야 할 그 애의 궁이 청은색의 꽃들로 뒤덮여있었다. 마치 그 애가 살아있었을 때처럼, 유리아와 함께 했던 추억 속 그 모습 그대로, 혹은 그보다 더 화사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이게 어떻게 된…….”

카롤리나 황후는 너무 놀라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며 아르가디아로 뒤덮인 유리아의 궁을 바라보았다.

유리 황녀는 궁 앞에 서서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엉엉 소리내어 울고 있었다. 유리의 옆에는 알렌 4황자가 누님의 옷깃을 꼬옥 붙잡은 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고.

그런데 제 소중한 아이들이 그리 울고 있는데도 카롤리나 황후는 멍하니 넋이 나간 눈으로 유리아의 궁만을 바라보았다.

한순간 정말 궁 주변으로 아르가디아가 잔뜩 피어난 것만 같았다. 청은색의 꽃들이 궁을 휘감듯 피어올라 유리아가 살아있었을 때처럼 아름답고 화사한 꽃들이 궁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지금이라도 당장 저 궁 안에서 유리아가 걸어 나올 것만 같았다. 제 목숨보다 아꼈을 만큼 소중했던 친우가 돌아올 것만 같았다.

카롤리나 황후는 홀린 듯이 그 앞으로 다가가 아르가디아가 그려진 벽에 손을 대었다. 당연한 거지만 부드러운 꽃잎이 아니라 딱딱한 벽이 만져졌다.

그제야 카롤리나 황후는 환상에서 깨어나 현실로 끌려 나왔다. 이건 진짜 꽃이 아니라 벽화일 뿐이며, 자신이 그토록 좋아했던 유리아는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거라는 현실로.

“이걸 누가 그린 건가.”

카롤리나 황후의 굳은 음성에 시녀장이 곧바로 몸을 낮추고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황녀 전하께서 워낙 간절히 부탁하셔서 제가 막질 못한 탓입니다. 전부 제 잘못이니 부디…….”

“누가 그린 거냐고 물었네.”

당황하여 횡설수설하는 시녀장의 말을 끊고 카롤리나 황후가 다시 차분하게 말을 내뱉었다.

시녀장은 멈칫하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수년간 그녀를 모셔온 감으로도 카롤리나 황후가 지금 어떤 감정이나 의도로 질문을 한 것인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던 탓이다.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딱히 누군가를 탓하고자 하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이걸 어찌해야 하나. 솔직히 클레어 헤더의 이름을 언급해야 하는 것인지 시녀장이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언니가.”

어느새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카롤리나 황후의 곁으로 다가온 유리가 입을 열었다.

“클레어 언니가, 궁이 너무 쓸쓸해 보인다고, 내가, 그 사람이 아르가디아를 좋아했다고 말해줘서, 그래서.”

울음에 목이 잠겨 끅끅 넘어가는 소리를 내면서도 유리는 힘겹게 말을 마치고는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 제 아이를 보면서도 손을 내밀 생각조차 못한 채 카롤리나 황후가 다시 아르가디아의 꽃밭이 펼쳐진 궁을 돌아보았다.

“클레어 헤더가 그린 건가?”

그러고는 여전히 감정을 알 수 없는 표정과 음성으로 나직이 물었다. 시녀장은 가만히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황후 폐하.”

카롤리나 황후의 손이 가장 가까이에 있던 아르가디아 꽃에 닿았다. 차갑고 딱딱한 벽에 그려진 아르가디아를 한참 동안 바라보기만 하던 그녀의 눈동자에서도 눈물 하나가 툭 흘러내렸다.

옆에서 그런 그녀를 지켜보던 시녀장도, 유리도, 모두가 그녀의 눈물에 놀라 굳어버렸다.

카롤리나 황후는 제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가만히 닦아내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시녀장에게 시선을 던졌다. 언제 제가 눈물을 보였냐는 듯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단호히 빛났다.

그리고 그녀가 명령했다.

“클레어 헤더를, 최대한 빨리, 머리끝 하나 상하지 않게, 내 앞에 데려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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