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30)
결국 듀는 유리 황녀에게 보고를, 체드 자신은 클레어 헤더의 곁에 남아 호위를 맡기로 하고 두 사람은 나뉘어 움직였다.
하지만 수도 밖이라면 모를까, 외곽이라고는 해도 결국은 수도 안. 얌전히 본가의 저택 안에 들어가 있는 귀족 아가씨에게 별일이야 있으랴.
실제로 황성에서 헤더 자작가까지 오는 데도 아무 문제 없었지 않나. 클레어 헤더 본인 역시 자신들을 오히려 불편해하고 거치적거리는 방해물 정도로 여기는 듯했고.
돌아가라는 말까지 들은 판국에 헤더 자작가 안 그녀의 방 앞에 서서 호위를 하겠다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체드는 헤더 자작저 입구에 말을 세워둔 채로 동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꾸르륵.
거의 하루의 대부분을 황성 안에서만 머무는 유리 황녀의 호위를 맡았을 때와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교대해줄 인력이 있는 것도 아니니 따로 점심이나 저녁을 챙겨 먹을 여유 같은 건 없었다.
그러니 지금쯤 배가 고프다고 아우성을 치는 자신의 생체 시계는 잘못이 없다.
배도 고프고, 날이 저물어 춥고, 외롭고, 심심하고. 여러모로 서글퍼졌다.
어디선가 농땡이를 피우고 있을 제 동료 녀석은 뜨뜻한 고기 수프라도 먹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더니 가슴 속에서 뭔가 울컥하고 치밀어올랐다. 이 자식 옆에 와서 속 편하게 꺼억 트림이라도 했다간 용서치 않겠다며 체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두두두두!
오우거도 제 말 하면 온다 했던가. 멀리서 아련하게 말발굽이 땅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체드는 반가움 반, 불만 반인 표정으로 고개를 틀었다. 예상대로 저 멀리서 동료인 듀가 미친 듯이 말을 몰아 달려오고 있었다.
자식, 그래도 미안하긴 한가 보군.
동료가 늦게 온 게 미안해 저렇게 위험할 정도로 급히 말을 달려오고 있다 생각한 체드는 손을 번쩍 들어 흔들며 외쳤다.
“어이, 괜찮으니까 천천히 와!”
“체드!”
동료는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듯 달려온 그는 위험하게 말을 멈춰 세우고는 제 앞에 섰다. 말의 몸체가 뒤로 넘어갈 것처럼 앞발을 높이 치켜들어 멈추는 모습에 체드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어이, 왜 그래? 무슨 일…….”
“클레어 헤더는?”
“어, 어? 뭐, 왜 그래?”
“클레어 헤더는 어디 있어? 아직 저택 안에 있는 거겠지?”
말에서 뛰어내리자마자 다짜고짜 제게 클레어 헤더의 행방을 묻는 듀의 초조한 모습에 체드는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그는 표정을 굳히며 제 동료의 팔을 붙들었다.
“어이, 무슨 일이냐니까.”
“당장 저 영애를 데리고 돌아가야 해. 황녀 전하께서 우리 둘 다 가만두지 않겠다고 날뛰고 계셔.”
“뭐? 왜? 우리가 뭘 잘못했는데?”
“황녀 전하는 클레어 헤더 영애를 황성 밖으로 내보내도 된다고 허락한 적이 없어. 그때 그 영애가 우리한테 했던 말은 거짓말이야.”
듀가 안절부절못하며 외친 말에 체드가 당혹스러운 기색을 드러냈다.
“우리는 헤더 영애가 말한 대로 했을 뿐인데?”
“나도 몰라, 인마! 어쨌든 클레어 헤더를 무사히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고 황성으로 다시 데려오면 용서해 준다고 하셨어. 한시라도 빨리!”
자신들은 죄다 없다는 듯 억울한 얼굴을 하는 그에게 듀가 재차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앞을 막고 선 체드를 밀어내고 성큼성큼 헤더 자작저의 정문으로 다가갔다.
어찌할 바를 몰라하던 체드도 얼른 그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어떡해, 설마 우리 이번 일로 좌천되는 건 아니겠지? 난 지금 황녀 전하의 곁에 있는 거 엄청 편하고 좋은데…….”
“황녀 전하께서 저 영애를 무척 아끼시는 듯하니, 말 좀 잘해달라고 부탁이라도 해보든가.”
“우릴 되게 싫어하는 느낌이던데 우리 말을 들어줄까?”
쾅쾅쾅!
듀는 체드의 말을 무시하고 굳게 닫힌 정문을 세게 두드렸다. 때마침 근처를 지나던 하인 하나가 그들을 발견하고는 저택 안으로 쫓아가 집사로 보이는 노인을 불렀다.
“실례하지, 황실 제 3기사단에 소속된 듀 클러그라고 한다.”
예상대로 자신을 이 저택의 집사라고 소개하는 남자에게 듀는 황실의 문양이 새겨진 자신의 검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유리 크리스틴 카지스 황녀 전하로부터 클레어 헤더 영애를 데리고 오라는 명을 받았다. 지금 당장 이곳으로 모셔와 주겠나.”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듀의 말에 집사는 아주 잠깐 놀란 기색을 보였으나, 이내 침착한 태도로 대답하고는 하녀 하나를 불러 조용히 지시를 내렸다. 그러고는 자신 또한 저택 안으로 황급히 걸어 들어갔다.
금세 클레어 헤더를 데려올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하인도, 집사도 금세 돌아오지 않았다.
듀와 체드는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아무래도 귀족 영애다 보니 준비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거겠지. 두 사람은 직접 저택 안으로 뛰쳐들어가 클레어 헤더를 데려 나오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으며 얌전히 저택 입구에서 기다렸다.
하지만 꽤 시간이 흐르고도 클레어 헤더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 대신 아까 보았던 늙은 집사만이 굳은 얼굴로 두 사람에게 달려왔다.
보이지 않는 클레어 헤더, 늙은 집사의 굳은 표정. 듀와 체드의 얼굴도 자연히 굳어졌다.
“무슨 일이지? 헤더 영애는?”
“방에 계시지 않습니다.”
가까이 다가온 집사의 얼굴엔 식은땀까지 맺혀있었다.
“방에 없다니? 그럼 어디로 가신 건가?”
“모르겠습니다. 일단 저택 안, 다른 곳에 계신 지 찾아보고 있습니다.”
집사의 표정은 지나치게 불안해 보였다. 그는 자신들이 갑자기 찾아와 헤더 영애를 모셔오라 일렀을 때도, 금세 평정을 되찾고 침착하게 대응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저렇게까지 불안해 하는 데는 단순히 그녀가 방 안에 없다는 사실이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방문이 열려있었대.”
“누가 열어준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소란을 듣고 다가온 다른 하녀들이 속닥거리는 목소리가 듀의 귓가에 닿았다. 남들보다 배는 귀가 밝은 그는 하녀들이 자기들끼리 나누는 대화를 들었으나 잠깐 의아하게 생각했을 뿐, 그들의 대화를 깊이 생각하진 않았다.
“아가씨께서 어, 어디에도 계시지 않습니다!”
그때 집사의 명령으로 달려갔던 하인들도 뒤늦게 다가와 말을 전해왔다. 듀와 체드는 재빨리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정문 쪽의 현관 외에도 다른 출구가 있나?”
“아니요, 없습니다. 하인들이 출입하는 곳이 있긴 하나, 계속 그 주변에 있던 하인 말로는 아가씨가 지나가시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헤더 영애의 방을 살펴볼 수 있게 해주겠나.”
“따라오십시오.”
두 사람은 집사를 따라 저택 안으로 발을 들였다. 2층의 제일 구석진 방으로 안내된 듀와 체드는 빠르게 방 안을 눈으로 확인했다. 방 안은 특별한 게 없었다. 귀족 영애의 방치고는 좁고 낡았지만, 깔끔하게 정리된 여성의 방이라는 느낌이었다.
듀는 방 안을 한 번 휙 둘러보고는 그대로 창가 쪽으로 다가섰다. 활짝 열린 창 가까이 다가간 그는 창틀에 미세하게 남아있는 흙먼지를 발견했다.
그건 분명 신발 자국이었다. 누군가 창틀을 밟고 지나간 흔적이었다.
클레어 헤더는 낮은 굽의 구두를 신고 있었다. 얼핏 봐도 창틀에 남아있는 건 여성의 구두보다 훨씬 넓고 큰 신발 자국이었다.
‘설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듀의 눈동자가 재빠르게 창 아래를 훑어내렸다.
2층이긴 하지만 그리 높지 않아 웬만큼 단련을 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뛰어내릴 수 있는 높이였다.
“꺄악!”
갑자기 창밖으로 뛰어내리는 그를 보며 놀란 하녀들이 비명을 질렀다.
듀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바닥에 착지했다. 실제로 그가 뛰어내려도 별 무리가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누군가 화초들을 짓밟고 지나간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그 흔적은 저택의 담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일이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다.
제일 먼저 그의 머릿속을 스치는 건 펄펄 뛰며 불같이 화를 내는 유리 황녀의 얼굴이었다.이번 일은 자신들의 좌천으로 끝날 문제가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벌써 목 부근이 서늘했다. 머리끝에서부터 식은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자신이 황실 기사단에 들어오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줄곧 필사적으로 스스로를 갈고 닦으며 노력해왔던 기억들이 하나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뭐야, 설마 이거 주마등 뭐 그런 건가.
“어이, 듀! 괜찮냐?”
망할, 빌어먹을, 제기랄.
등 뒤에서 들려오는 동료의 외침을 무시한 채, 듀는 제가 아는 한의 온갖 욕설을 중얼거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건 진짜 비상사태다.
* * *
카롤리나 황후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그녀의 고운 미간은 구겨진 채 펴질 줄을 몰랐다.
카롤리나 황후가 괜히 철혈의 황후라 불리는 게 아닌지라,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여장부인 그녀가 이토록 제 감정을 알기 쉽게 드러내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 흔치 않은 상황에 뒤따르는 시녀장과 시녀들 또한 그런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종종걸음을 옮겼다.
“사라진 지 얼마나 됐다고 했나.”
불쾌하게 구겨진 표정과 달리 흔들림 없이 냉철한 음성이 떨어졌다. 카롤리나 황후가 뒤를 돌아본 것도 아닌데 시녀장과 하녀들은 반사적으로 몸을 낮췄다.
“마지막으로 본 게 헤더 자작저로 들어가는 모습이었다고 하니 벌써 2시간 정도가 지났습니다.”
“납치가 확실하다고 했던가.”
“헤더 영애의 방에 들어가 확인했던 기사들이 자작저 안과 밖을 활보한 낯선 발자국을 다수 발견했다고 들었습니다.”
“몸값에 대한 요구는.”
“아직까진 없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돌아오는 시녀장의 대답들을 곰곰이 생각해보던 카롤리나 황후가 걸음을 멈췄다. 아름다운 금색의 눈동자가 불쾌한 빛을 띠며 일그러졌다.
아주 겁이 많아 보이는 토끼였다. 척 보기에도 순해 빠진데다 제 분수를 알고 주제 파악도 잘 하고 있는 토끼라 이용해 먹기에 딱 알맞다고 여겼었다. 그래서 살짝 위협을 한 후 당근을 던져준 뒤로는 사실 크게 신경도 쓰지 않았던 토끼였다.
그런데 고작 얼마나 지났다고, 감히 제 명령을 어기고 사라진 토끼에게 카롤리나 황후는 분노하고 있었다.
납치가 사실이든 아니든, 애초에 황성을 빠져나간 건 토끼 본인의 의지였다고 했으니. 토끼가 자신의 명령을 무시하고 멋대로 행동한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