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29) (48/152)

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29)

“아니요.”

아마 이 정도로 겁을 주면 내가 순순히 나올 줄 알았을 것이다. 실제로 지금까지의 나는 그랬고.

하지만 이젠 그렇게 쉽게 굴복하고 살고 싶지 않았다.

카롤리나 황후궁에 있는 아르가디아처럼, 내가 그린 모든 것들을 내 것이라 당당히 말하고 싶었다.

“더는 내 그림을 당신에게 팔지 않을 거예요.”

나는 터진 입술과 입안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참으며 담담히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야지.”

또 손이 날아오지 않을까 하는 예상과 달리, 트뷔에 백작 부인은 더 이상 내게 손을 대지 않았다.

“에젯트.”

“예.”

대신 그녀는 전 에젯트 헤더 자작부인을 마치 자기 하녀처럼 불렀다.

“마지막 기회네. 6일을 주지. 뭐든 좋으니 저것이 그린 걸 가져와.”

냉랭한 시선이 내가 아닌 에젯트 헤더에게 떨어졌다.

움찔 몸을 떨며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이는 에젯트 헤더의 모습이 퍽 우스웠다.

저 여자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는 몰라도, 늘 당당하게 내게 명령만 하던 사람이 저러고 있으니 불쌍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니면 이 집안에 대한 원조를 전부 끊고, 다른 사람을 알아볼 테니 그리 알게.”

“그, 그것만은 부디…….”

“연락을 기다리지.”

트뷔에 백작 부인은 더는 이런 곳에 있고 싶지도 않다는 듯 찬바람을 일으키며 돌아섰다. 그녀가 후드를 깊이 눌러쓴 채 문밖에 대기하고 있던 호위들과 함께 사라질 때까지 에젯트 헤더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었다.

“네가 지금 제정신이냐!”

그리고 그녀가 마차를 타고 완전히 저택을 떠나자마자 에젯트 헤더가 얼굴을 감싸 쥔 채 빽 소리를 질렀다.

“저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는 하는 거냐? 지금 레지나 왕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카롤리나 황후마저도 인정하는 최고의 화가란 말이다! 잘 달래진 못할망정 저 여자를 화나게 만들면 어쩌자는 거냐!”

그 사람들이 인정하는 건 내 그림이지, 그 여자가 아니잖아.

“황녀 전하의 비호를 받더니 네가 진짜 뭐라도 된 줄 알아? 아델 공작 때처럼 총애도 그리 오래가지도 못한 주제에, 건방만 하늘을 찔러선.”

아까 그 여자처럼 당장이라도 내 머리채를 잡고 흔들 것 같은 기세임에도, 에젯트 헤더는 그것만은 제 신념을 어기고 싶지 않은 듯 나를 건드리진 않았다.

대신 있는 대로 폭언을 쏟아내며 내게 손가락질을 해댔다.

“6일이다. 그 안에 뭐든 그려내. 아니면 진짜 너도 죽고, 나도 죽는 거다.”

나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에젯트 헤더는 제 분에 못 이겨 머리를 짚고 비틀거리더니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

콰앙!

거칠게 닫은 문에 낡은 방이 통째로 흔들리는 듯했다.

“아.”

나는 지금껏 참고 있던 통증에 신음을 흘리며 벽에 기대 주르륵 주저앉았다.

입안이 얼마나 심하게 터진 건지 피 맛이 계속 진득하게 혀에 달라 붙어왔다.

‘아파라…….’

이제 대신 화를 내줄 사람도 없지.

아프진 않냐고 걱정해줄 사람도 없지.

픽, 웃음이 나왔다.

내가 언제부터 그런 걸 기대했다고.

아주 잠깐, 신기루와 다름없는 오아시스를 맛보고 오더니 이제 어느 쪽이 진짜 내가 있을 곳인지도 헷갈리는 모양이었다.

한심하긴.

나는 무의식중에 눈동자를 굴려 방의 한쪽 벽에 기대어 세워져 있는 캔버스에 시선을 주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거겠지.

저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을 값싸게 팔고, 어딘가에서 내 그림을 보게 된다 해도 내가 그린 것이라 말하지 못하는…… 그런 인생이 계속되는 거겠지.

아무것도 변하지 않겠지.

나는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게 되겠지.

‘억울해.’

아마 처음 이 감정을 느낀 건, 카롤리나 황후궁에서의 아르가디아를 발견했을 때였을 것이다. 카롤리나 황후에게 인정을 받고,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가 예쁘다 칭찬을 해주던 그림을 내 것이라 말하지 못했을 때였을 것이다.

그때부터 내내 내 안에 자리하고 있던 감정 하나가 꿈틀거리며 내 마음을 잡아끌었다.

억울하다고, 분하다고, 더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또렷이 외치고 있었다.

나는 그 감정에 몸을 맡기고 싶으면서도,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힌 이성이 다시 발길을 붙들어오는 걸 느꼈다.

네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으면 어쩔 거냐고, 네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게 뭐가 있느냐고.

넌 그냥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부당하게 뺨을 맞고, 원치 않는 착취를 당하면서도, 무력하게 방에 주저앉아 있을 뿐인 네가 무얼 할 수 있느냐고.

그 사람에게 버려졌을 때에도, 유리 황녀에게서도 내쳐졌을 때에도. 원망 한 번 하지 못하고 조용히 물러난 너니까.

그러니 계속 이렇게 살아가게 될 거라고. 무엇 하나 바꾸지 못하고, 비루하고 비참한 인생을 살아가게 될 뿐이라고.

‘억울해서 죽을 것 같아.’

이를 악물자 입안의 피 맛이 더 진해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문득 고개를 들어 창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해가 기울어 바깥은 꽤 어두워져 있었다.

‘이건 아니야.’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이대로 집을 뛰쳐나간다고 해도,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힘도, 돈도, 명예도, 갈 곳도 하나 없다. 호위도 하나 없이 혼자 길거리를 돌아다니다 인신매매단에게 걸려 노예로 팔려가지나 않으면 다행일 터다.

당장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차라리 이대로 이 좁은 방 안에서 죽을 때까지 다른 이의 이름을 빛나게 해줄 그림이나 그리다 죽는 게 나을 것이다. 억울하고 분통해서, 죽는 것 이상으로 괴롭더라도.

‘유리님이, 알렌님이 보고 싶어.’

다시 눈물이 퐁퐁 솟아났다.

‘어떡해, 죽을 만큼 보고 싶어.’

마지막 인사라는 핑계로 한 번만 더 얼굴이라도 보고 올걸. 상처받은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 혼자 아무렇지 않은 척 유리 황녀의 방을 나왔다. 그게 서로에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죽을 만큼 후회가 되었다. 이제 앞으로 평생,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텐데. 이렇게 후회할 줄 알았더라면, 추하고 미련스럽더라도, 또다시 상대의 질렸다는 얼굴을 보게 되더라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두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빌었어야 했다.

똑똑.

이미 늦은 밤중이건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바깥쪽에서 문까지 잠근 걸로 봐선 뭐든 그려내지 않으면, 식사도 주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던 나는 깜짝 놀라 문가를 돌아보았다.

아니면 혹시 집사 할아범이 내가 걱정돼서 몰래 빵이라도 가져온 걸까. 나는 그쪽으로 생각을 굳히며 문가로 다가섰다.

조용히 다가가 문을 여는 순간, 커다란 손이 뻗어와 내 멱살을 잡아챘다. 숨이 헉하고 막혀왔다.

“이 빌어먹을 년이.”

처음엔 상대를 알아보지 못하고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으나, 목소리를 듣자마자 에이든 헤더인 걸 알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거지꼴로 다 죽어가던 걸 데려와서 인간답게 살게 해줬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아? 그 황녀한테 대체 뭔 소릴 지껄였기에 내가 그따위 취급을 받아!”

에이든 헤더는 미친놈처럼 소리를 질러대며 당장이라도 내 목을 조를 것처럼 굴었다. 그런 에이든 헤더가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었고, 나는 놈을 두려워하는 시선이 드러나지 않도록 애쓰는 게 고작이었다.

“내가 왜 그딴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땅에 가야 되는데! 게다가 다른 기사들과 달리 아예 그쪽에서 계속 경비를 맡으라니? 기사단 꼬리표라도 달고 싶으면 아예 수도로는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말란 소리와 뭐가 다르냐고!”

잔뜩 흥분해 시뻘게진 얼굴로 달려온 에이든 헤더의 모습을 불안하게 지켜보던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단순히 그때 내 앞에서 억지로 무릎을 꿇려진 걸 두고 보복을 하나 싶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기사들을 언급하는 걸 보니 최근에 간신히 연줄로 들어간 황실 기사단 내에서도 문제가 생긴 듯했다.

“네 년이 황녀에게 뭐라고 지껄인 거겠지.”

갑자기 몸이 내던져지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비명이 새어 나왔다. 방심한 사이에 몸이 바닥에 부딪히자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예 황녀한테 일러바치지도 못하게 만들어줄게.”

쓰러지면서 부딪힌 등이며 어깨가 아파 몸을 움츠리는데 커다란 손이 다가와 내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다시 반사적으로 비명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이번에는 복부로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시끄러워, 입 닥치고 있어. 낮은 협박에 몸이 덜덜 떨려왔다.

에이든 헤더는 내 머리채를 쥔 채로 방을 나가려 했다. 뭐야, 날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야. 데자뷔 같은 공포가 내려앉아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번엔 정말 아무도 도와줄 이가 없다는 절망적인 사실도 나를 짓누르는 공포심에 한몫했다. 혼자 힘으로 이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는 걸 아는데도 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해야 했다. 뭐든 해야 했다. 재빨리 주위를 살피며 떨리는 주먹을 움켜쥘 때였다.

갑자기 내 머리카락을 움켜쥔 에이든 헤더의 손에서 힘이 풀리는가 싶더니 털썩하고 묵직한 무언가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하고 고개를 들어 확인하려는 찰나.

“이런, 사촌끼리 사이좋게 지내야지. 싸우면 쓰나.”

낯선 남자의 비웃음 소리와 함께 누군가 내 입을 틀어막았다.

이번에도 비명을 지르거나 소리를 낼 틈조차 없었다. 검붉은 천이 내 코와 입을 막았고, 묘한 향기가 코와 입을 통해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몸에서 힘이 빠지며 눈앞이 흐릿해졌다.

“그래, 얌전히 자고 있어. 아가씨.”

쇠를 긁는 듯한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끝으로 나는 완전히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흐아아암.

날이 어두워져 주변이 잘 보이지도 않겠다, 보는 이도 딱히 없겠다, 체드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오랜만에 하릴없이 한 자리에 오랫동안 서서 보초를 섰더니, 몸이 굳어 여기저기서 두두둑 소리가 났다.

‘듀, 이 자식은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유리 황녀에게 직접 보고를 한 후에 곧바로 이쪽에 같이 합류하기로 했던 동료 녀석은 어디서 농땡이를 피우는 건지, 벌써 날이 다 저물었는데도 머리털 하나 내비치질 않는다.

그는 황실 소속의 기사로 원래는 유리 황녀의 전속 호위 중 하나였으나, 현재는 유리 황녀로부터 명령을 받아 클레어 헤더라는 이름의 귀족 영애의 호위를 맡고 있었다.

호위 대상은 유리 황녀의 호의로 황성 안에서 머물고 있다고 했으니 딱히 이동할 일도 없겠다, 대상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거저먹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구나 기뻐했던 것도 잠시였다. 그가 호위를 맡자마자 클레어 헤더는 갑자기 황성을 나가겠다는 의사를 보여왔다.

클레어 헤더가 워낙 강경하게 나오는 바람에 그녀의 행동을 막을 수도 없었다. 유리 황녀로부터 언제 어디서든 항상 그녀의 곁을 지키라는 명만을 받았던 체드와 동료인 듀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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