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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28) (47/152)

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28)

한참을 달려 헤더 자작가의 낡은 저택이 멀리서 보일 즈음, 나는 일부러 마차를 멈춰 세웠다.

“예?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요.”

어리둥절해하는 마부에게 여기서 내려서 걸어가겠다고 답한 뒤, 재빨리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혹시나 말을 타고 쫓아오던 기사들이 손을 잡아주겠답시고 다가올까 해서였다.

예상대로 한 박자 늦게 달려온 두 사람이 어설프게 손을 내밀다 후다닥 뒤로 감추는 게 보였다.

“여기까지면 돼요. 이제 진짜 그만 돌아가 보세요.”

“하지만 명령이.”

“허락도 없이 자작저 안까지 따라오시면 무단침입으로 신고할 겁니다.”

혹시라도 집안 사람들 눈에 황실의 문양이 박힌 마차나 황실의 기사들이 눈에 띄지 않도록, 나는 제법 엄한 목소리로 단호히 말했다.

내가 생각보다 세게 나오자 두 사람은 당황해 어버버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정말 이제 돌아가 보셔도 된다니까요. 이제 절 호위하거나 그럴 필요 없어요. 아마 뭔가 중간에서 착오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다시 가서 확인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어차피 나는 이제 황성 밖으로 나왔고, 더는 그쪽과 연관도 없다고 생각하니 말도 쉽게 나왔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는 두 사람을 내버려 둔 채 헤더 자작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말발굽 소리와 발소리 하나가 따라붙는 게 느껴졌지만, 나머지 하나가 말을 타고 돌아가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래서 남은 쪽도 금세 없어지겠지 싶어서 그냥 한숨과 함께 무시하기로 했다.

‘뭔가 굉장히 오랜만인 기분이네.’

고작 열흘 정도를 떠나있었을 뿐이건만 낡은 저택의 외견도, 냄새도, 공기도, 전부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저택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건물을 멀거니 응시하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스스로 정문의 허술한 문을 열고, 유령이라도 본 듯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하인들 사이를 느릿느릿 걸어 지나쳤다.

“아가씨!”

하인들이 알린 것인지, 집사 할아범이 허둥지둥 달려 나와 나를 반겨주었다. 이제 막 1층의 현관을 지나던 나는 그를 향해 「잘 지냈어요?」라는 인사 대신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어디에 아니, 어떻게…….”

집사 할아범은 갑자기 돌아온 내게 묻고 싶은 게 많아 보였지만, 나는 그에 전부 대답해줄 기력이 없었다. 나는 쉬고 싶다는 말로 질문을 차단하고는 점점 무거워지는 다리를 끌다시피 움직여 위층의 내 방으로 걸어갔다.

끼이익-.

이 집처럼 낡은 문이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오랜만에 돌아온 내 방은 여전했다. 낡고, 좁고, 천장은 낮고, 어두웠다.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마치 누군가 들어와 내 방을 뒤진 것처럼 옷장이며 서랍이 다 열려있다는 것, 청소를 전혀 하지 않아 방 곳곳에 먼지가 쌓여있다는 것 정도였다.

원래 이 방은 이 집의 사용인들 중 누구도 청소하지 못하도록 정해져 있으니까. 내가 아니면 아무도 이 방에 들어와 청소해주지 않는다.

콜록, 콜록.

문을 닫고 침대로 다가가 앉자 먼지가 풀풀 날렸다. 목이 따끔거리며 기침이 났다.

너무 지쳐서 이대로 쓰러져 자고 싶지만, 이런 먼지투성이 방에서 잤다간 자다가도 기침이 나서 깰 것 같았다.

일단 환기가 먼저였다. 그리고 청소.

삐걱거리는 창을 활짝 열고 먼지투성이인 이불과 시트를 들어 창밖으로 탈탈 털었다. 그리고 열려있던 옷장이며 서랍을 차례대로 닫았다. 그것만으로도 남은 체력을 전부 써서, 다시 침대에 털썩 드러눕고 말았다.

습하고 오래된 냄새가 났다. 딱히 기분 좋은 냄새는 아니지만, 왠지 안정감이 느껴졌다. 좋은 기억이라고는 없는 이런 곳이라도, 결국 여기가 내가 돌아올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제야 조금 숨통이 트이고, 숨이 제대로 쉬어지는 느낌이었다.

‘전부 원래대로 돌아왔어.’

황성에서의 시간들은, 언젠가 깰 꿈속을 걷고 있는 것만 같았다. 너무나 즐겁고 행복하지만, 언젠가 이 모든 게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잊고 있던 현실 속에 내던져질 걸 알기에. 마음 한편에서는 늘 불안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줄곧 불안해했던 대로 꿈은 깨어지고, 나는 다시 이 먼지 가득한 방에서 눈을 떴다.

이제는 현실로 돌아와 내가 살아갈 곳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마지막에 봤던 에젯트 헤더와 사촌인 에이든 헤더의 모습을 떠올린 나는 한숨부터 길게 내쉬었다.

‘화가 많이 나 있겠지.’

유리 황녀에 의한 것이라고는 해도,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던 두 사람이다. 에젯트 헤더야 그렇다 치고, 에이든 헤더의 평소 그 못돼먹은 성질머리를 봤을 때 곱게 넘어갈 것 같지가 않았다.

내가 유리 황녀에게 버려지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걸 알게 되면 곧장 달려와 내 머리채부터 잡을 게 분명했다. 그걸 전부 상대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쾅쾅!

문을 부서뜨릴 것처럼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이 확 들었다. 침대에 누워 반쯤 졸고 있던 나는 문가를 돌아보며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빨리도 알고 왔네.’

쾅쾅쾅!

인내심이라고는 없는 상대가 문을 연속으로 두드려왔다. 나는 마지못해 일어나 문가로 걸어갔다.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문을 열자, 의외로 에이든이 아닌 에젯트 헤더가 눈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또 누군가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외모나 차림새도 어딘가 이국적인 느낌이 강했다. 중년의 여인은 겉모습으로 보선 아마 어느 귀족가의 부인인 듯했는데, 우아한 외형과 달리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숨을 헐떡이는 모양새는 그리 우아해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돌아왔구나.”

에젯트 헤더가 한 걸음 더 내 앞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말만 들으면 꼭 나를 무척 애타게 기다린 것만 같은 말투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나 자체를 기다린 게 아니라, 내 그림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알기에 전혀 기쁘지 않았다.

겉으론 무심한 척하고 있지만 탐욕스럽게 번들거리는 그녀의 눈동자가 불쾌했다.

“황녀 전하는?”

이미 집사 할아범으로부터 내가 혼자 왔다는 사실을 다 전해 들었을 터인데도, 에젯트 헤더는 혹시나 지금도 유리 황녀가 내 곁에 있지 않을까 두려운 기색이었다. 불안한 눈으로 내 뒤를 힐끔거리던 그녀의 시선이 마지막엔 무겁게 가라앉은 내 눈동자로 향했다.

“이제 완전히 돌아온 거냐?”

아무리 나를 도구 취급하는 사람이라도 어릴 때부터 나를 쭉 지켜봐 왔던 탓일까. 눈치 빠른 에젯트 헤더는 무표정한 내 얼굴만 보고도 벌써 감을 잡은 듯했다.

“황녀 전하는? 이제 안 오는 거겠지?”

혹시라도 내가 유리 황녀의 마음에 들어 계속 돌아오지 않을까, 앞으로는 전처럼 나를 쓰기 쉬운 도구로 이용하지 못할까 불안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녹아내리며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그럼 그렇지. 그 대단한 황녀가 이따위 것을 뭐하러 그리 오래 곁에 두겠나. 오랫동안 귀하고 좋은 것만 접하다 보니 갑자기 변덕을 부려 저딴 것에 잠깐 관심을 두었을 뿐이지. 예상했던 대로의 결과였다는 눈빛이었다.

눈에 띄게 밝아진 얼굴로 대답을 독촉하는 그녀에게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

확실한 내 대답에 그녀가 이제 아예 노골적으로 기뻐하며 입을 뗐다.

“돌아왔으니 이제…….”

“그림은?”

그때 조용히 에젯트 헤더의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낯선 부인이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그림은 어디 있어?”

에젯트 헤더보다 더 탐욕스러운 눈동자였다. 묘하게 어색한 제국어. 이상할 정도로 초조해 보이는 기색이며, 이름도 밝히지 않은 채 내 그림부터 찾는 여자의 태도에 나는 상대가 밝히지 않은 그녀의 정체를 알아챘다.

트뷔에 백작부인이었던가. 타국인 레지나 왕국의 고위귀족이라 들었다.

이 사람이 아마도 에젯트 헤더가 지금껏 내 그림을 돈을 받고 몰래 팔아치웠을 사람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아마도 내가 그린 모든 그림을 자신의 작품이라 속여 세상에 내걸던 사람.

여자는 초췌해져 있었다. 얼핏 보기엔 아름답지만, 자세히 보면 어두운 눈 밑과 충혈된 눈동자가 보였다. 잠을 제대로 자긴 하는 걸까 싶을 정도로.

“진정하세요. 제가 잘 얘기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벌써 몇 달째 결과물이 하나도 없잖아!”

여자는 늘 에젯트 헤더를 통해 전달되던 그림이 뚝 끊기자, 본인이 직접 이 제국까지 행차한 모양이었다.

“대체 뭘 하는 겁니까? 다들 기다리고 있단 말입니다! 매번 기다려달라는 말을 듣는 것도, 내가 그 말을 하는 것도 지긋지긋하다고!”

흥분한 상태에서 드문드문 알아듣지 못할 그녀의 모국어들이 섞여 확실친 않지만, 대충 내가 그림을 그려주지 않으니 내어놓을 그림이 없다, 그래서 화가 많이 났다, 대충 그런 내용인 듯했다.

나는 그동안 내가 그려온 것들을 돈으로 사 자신의 것이라 세상에 발표해온 뻔뻔한 여자를 가만히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그럼 본인이 직접 그리지 그래요?”

카롤리나 황후궁에서 보았던 아르가디아를, 내가 그린 것이라 말하지 못했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가슴 속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하고 괴로웠던 그 날의 감정이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뭐?”

트뷔에 백작 부인의 눈동자가 지금 자신이 뭘 들었는지 모르겠다는 듯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하며 다시 한번 말해주었다.

“남이 그린 걸 자신의 작품이라 속이지 말고 당신이 직접 그리면 되잖아요.”

마주하고 있던 그녀의 검은색 눈동자에서 순간 새파란 불꽃이 튀었다.

단숨에 거리를 좁혀 다가온 그녀의 손이 내 뺨을 후려쳤다. 짜악!

얼마나 세게 얻어맞은 건지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고 귀에 이명이 깃들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물러나 옆에 있던 벽을 짚고 겨우 섰다.

“건방지게 지금 누구 앞에서 그딴 소릴 지껄여.”

트뷔에 백작 부인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저급한 욕설까지 내뱉었다. 정곡을 찔려 악을 쓰며 소리를 질러대는 그녀의 모습은 도저히 고위 귀족가의 귀족 부인이라고는 보기 힘들었다.

“지금까지 너희 집안이 누구 덕분에 먹고 살았다고 생각하는 거냐.”

다시 다가온 그녀의 손이 내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뺨의 통증에 이어 머리카락이 힘껏 당겨지는 고통에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내가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고 그나마 기분이 풀렸는지, 그녀가 픽 웃으며 손을 놓았다.

“당장 그려. 네 가문을 쫄딱 말아먹고 싶은 게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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