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27)
“제 쪽에서 그분께 접근하는 일도, 전하께서 신경 쓰실만한 일도 없도록 하겠습니다.”
“진짜네.”
레이몬드 2황자는 놀랍다는 반응이었다. 벌벌 떨고 있는 나와는 반대로 웃음기마저 섞인 음성에 나는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곤란한 무언가를 떠맡았다 떨쳐낸 사람처럼 살짝 후련한 얼굴이었다.
“헤더 영애가 먼저 그렇게 말해주면 나야 고맙죠.”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레이몬드 2황자의 옅은 미소에 가슴께가 욱신거렸다.
“사실 저도 어떻게 영애를 구슬려야 하나 고민중이었거든요.”
왜, 웃지.
“먼저 정리를 해줘서 다행이에요.”
왜, 그렇게 말하지.
굳이 그렇게 웃으며 말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성가시게 하는 벌레를 털어내듯 후련하다는 얼굴로 웃지 않아도 되잖아요.
이제 나는 당신이 그 정도 배려조차 해줄 가치가 없는 사람인가요.
상처받은 마음이 내뱉지 못한 외침을 삼키며 한없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어둡고 차가운 물 속 깊이 침잠하는 듯한 감각이 몸을 뒤덮었다.
진짜 물속에 있는 것처럼 귀가 먹먹하여 레이몬드 2황자의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변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는 있지만.”
저벅.
그가 한 걸음 내 쪽으로 더 다가오는 인기척에 겨우 정신이 들었다. 나는 멍하니 초점이 맞지 않던 눈을 깜빡여 레이몬드 2황자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입가에 희미하게 걸쳐져 있던 미소가 사라진 채 그는 서늘한 눈을 하고 있었다.
“나도 이제는 왠지 조금 화가 나서요.”
그 느낌이 꼭 연회장에서 인형처럼 웃고, 말하던 그의 모습과 흡사했다. 아니, 그보다 더 차갑고 어둡게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순간 바뀐 분위기를 살피느라 레이몬드 2황자가 한 말은 조금 늦게 머릿속에 인식됐다.
화가 나다니, 왜 레이몬드 2황자가 화가 난다는 거지.
멍청하게 내가 저지른 짓들을 잊고 있고서 어리둥절해하던 나는 순간 찬물을 뒤집어쓴 듯 머릿속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아아, 그랬지 참. 어떻게 그걸 다 잊고 있었던 걸까.
건국기념일의 연회에서 레이몬드 2황자에게 얼마나 민폐를 끼쳤었는지를 다시 상기해낸 나는 허리를 깊이 숙여 사죄했다. 잊고 있던 스스로의 어리석은 행동들이 떠올라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부끄럽고, 죄스러웠다.
“그동안 많은 폐를 끼쳐 정말 죄송했습니다.”
“이런, 고개 들어요. 갑자기 왜…….”
당황한 레이몬드 2황자가 팔을 뻗으며 한 걸음 다가오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뒤로 물러났다.
“하실 말씀은…… 그게 다인가요?”
평소의 나라면 절대 하지 못할 일들을 벌써 몇 번째 하고 있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아니, 잠깐-.”
나는 또다시 레이몬드 2황자의 말을 끊고 휙 돌아서 버렸다. 심지어는 나를 붙들려다 멈칫하는 그의 손을 외면한 채 그대로 도망치듯 내달렸다.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음에도 듣지 못한 척 제4궁 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지금은 내가 감히 황족의 말을 무시하고 도망치는 죄를 저질렀다는 자각조차 하지 못했다. 단숨에 유리 황녀의 방까지 달려와 등 뒤로 문을 닫고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유리 황녀도, 알렌 4황자도 없이 텅 빈 방 안을 멍하니 응시하던 나는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괜찮겠지. 자기들 멋대로 나를 끌어들이고, 필요가 없어지자마자 버리는 거니까. 이 정도는 용서해주겠지.
울지 마. 괜찮아. 익숙하니까 괜찮아.
주문이라도 걸 듯 괜찮다는 말을 되뇌며 막아도 막아도 새어 나오는 눈물을 감췄다.
괜찮아, 나는. 괜찮아질 거야.
욱신거리는 상처를 무시하고 내버려 두면 언젠가 그 통증에도 무뎌진다는 걸 아니까.
그러니 괜찮다, 고.
* * *
한숨도 자지 못하고, 해가 뜨기도 전에 몸을 일으켜 움직였다.
퉁퉁 부은 얼굴을 차가운 물로 세수하고 지저분한 머리를 단정히 빗어 내렸다. 처음 이 황성에 들어온 날 입고 있었던 옷을 꺼내 챙겨입은 후, 유리 황녀가 선물해준 옷은 그대로 옷장에 넣어두었다.
무의식중에 짐을 챙겨야지 했지만, 생각해보니 짐이라곤 내 몸뚱이 하나밖에 없었다. 덕분에 아주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그 짧은 새에 정이 들어버린 방안의 모습을 쭉 둘러보던 나는 잊고 있던 하나를 떠올렸다. 정확히는 「내 것」이라고 할 순 없지만, 어쨌든 내가 시작한 것이었다. 유리 황녀를 위해서라는 핑계를 댔지만 결국엔 내가 하고 싶었던 것.
온실 뒤의 벽화.
푸르스름한 빛에 의지해 겨우 앞이 식별 가능한 상황에서 나는 방문을 열었다. 아직 어두컴컴한 복도, 빛의 구 아래에 서서 지루한 얼굴을 하고 있던 기사들이 나를 보고 놀란 시선을 던져왔다. 이 시간에 벌써 어딜 가는 거냐는 눈빛 앞에서 나는 침묵으로 답을 하고는 두 사람을 지나쳐 가려 했다.
“지금 나가시는 겁니까? 따르겠습니다.”
당연하다는 듯 뒤에 따라붙는 두 사람의 모습에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황성을 나갈 거예요.”
“예?”
“헤더 자작저로 돌아가려고요.”
“예? 그건…….”
두 사람은 무척 당혹스러워하더니 서로를 돌아보며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시선을 던졌다.
“일단 제가 황녀 전하께 보고하고 오겠습니다.”
그러고는 기사 중 하나가 갑자기 유리 황녀에게 말을 전하겠다며 자리를 뜨려 했다. 나는 다급히 그를 멈춰 세우며 외쳤다.
“그럴 필요 없어요! 황녀 전하께서도 알고 계시니까요.”
내 외침에 두 사람은 또다시 서로를 돌아보았다.
설마 거짓말은 아니겠지, 거짓말을 뭐하러 해, 그럼 괜찮으려나, 딱히 이동을 막으라는 명령은 없었잖아.
자기들 딴엔 조용히 속삭인다고 나누는 대화가 내 귀에도 똑똑히 들렸다. 어제 레이몬드 황자에게 조용히 사라진다고 했으니 굳이 보고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굳이 이제 와서 나 같은 걸 더 신경 쓰고 싶지도 않을 테고. 이 정도만 말해두면 되겠지.
나는 두 사람을 내버려 둔 채 다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어, 이쪽이 아니라 반대편으로 가셔야 합니다.”
황성을 나가는 정문과는 정반대 쪽으로 걸어가는 나를 보며, 두 사람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그런 두 사람이 조금 성가셔졌다. 이 사람들도 이게 일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겠지만.
“그 전에 잠깐 들릴 곳이 있어서요.”
나는 담담하게 대답한 후, 두 사람을 피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점점 가까워지는 카롤리나 황후궁을 보며 나는 긴장된 숨을 삼켰다. 유리 황녀도 없는 상태에서 혹시 접근 자체를 저지당하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운 탓이었다.
하지만 내가 카롤리나 황후궁을 지나 온실 뒤의 궁으로 다가가도 황후궁 주변의 병사들이나 시녀들 중 누구도 내 움직임을 막지 않았다. 이미 시녀장으로부터 지시받은 게 있는 듯했다. 그것만은 다행이었다.
여전히 폐허나 다름없는 궁에 도착한 나는 미완성인 벽화부터 확인했다. 카롤리나 황후나 황제에게 들켜 깨끗이 지워진 건 아닐까, 혹은 오늘 낮에 비가 제법 와서 손상된 곳이 있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벽화는 며칠 전 내가 그리다 만 상태 그대로였다.
나는 꽃잎 하나 지워진 곳 없이 멀쩡한 그림을 바라보다 일전에 온실 안에 넣어두었던 도료들을 하나씩 꺼내어 가져왔다. 도와주겠다고 나선 기사 둘의 도움을 받아 붓과 물통까지 전부 벽화 앞으로 옮겨와 붓을 쥐었다.
그리고 미완성인 그림을 완성해나가기 시작했다. 아직 주위가 완전히 밝지 않았지만 그 정도는 방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 다 꺼져가는 촛불에 의지해 그린 적도 많으니까.
그 사이에 기사들이 어디선가 빛의 구를 가져와서 벽을 환하게 비춰주었다. 나는 두 사람에게 고맙다고 말하고는 청은색의 꽃잎들을 계속 채워나갔다.
그리고 해가 완전히 떠올라 주위가 밝아질 즈음, 나는 아르가디아의 꽃밭을 완성해냈다.
온몸이 땀과 도료로 범벅이 된 채로 나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턱밑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대충 훔쳐내며 눈 앞에 펼쳐진 꽃밭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황제의 죽은 여동생, 그녀를 향한 유리 황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하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한 그림이었다.
내가 그리고 싶어서,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 그린 그림이었다. 13살의 내가 어머니의 일기장 한쪽 귀퉁이에 그렸던 낙서들이 그랬듯이.
그동안 내가 그렸던 그 어떤 아르가디아보다 완벽한 형태의 아르가디아 수백 송이가 궁의 외벽에 피어올라 있었다.
이걸로 끝이구나.
가슴이 벅차오를 만큼 기쁘면서도 엉엉 소리 내어 울고 싶을 만큼 서러웠다. 이걸로 이 벽화도, 유리 황녀와의 인연도 전부 끝이라는 생각에 내내 참고 있던 눈물이 그제야 흘렀다.
새어 나오는 울음을 참으며 나는 벽화를 등지고 돌아서서 엉망이 된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넋을 놓고 서 있던 기사들이 다가와 나를 도와주었다.
다른 사용인들은 온실 뒤로 접근할 수 없는지 가까이 오진 않지만,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게 보였다. 소란 속에 카롤리나 황후나 유리 황녀의 귀에 들어가기 전에 떠나고 싶었다.
주변을 대충 정리한 후, 나는 유리 황녀의 기사들에게 고마웠다는 의미로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성큼성큼 걸어 온실과 황후궁을 벗어났다.
하지만 이제 그만 따라와도 된다는 의미의 내 인사를 전혀 알아듣지 못한 걸까, 두 사람은 태연하게 계속 내 뒤를 따라왔다. 거기다 직접 걸어서 황성 밖으로 나와 지나가는 마차를 잡아타려던 내 계획을 망치고, 어디선가 황실의 문양이 떡하니 박힌 마차를 끌어와 나를 억지로 안에 떠밀었다.
덕분에 몸은 편하게 황성 밖으로 나와 멀리 수도 외곽에 있는 헤더 자작가까지 갈 수 있었지만, 마음은 더없이 불편했다.
왠지 말발굽 소리가 너무 많은 듯해 혹시나 해서 마차 안에서 창을 열고 뒤를 돌아보니, 역시나. 두 사람도 말을 타고서 마차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기가 막혀 “이제 그만 따라오시고 황성으로 돌아가세요!”하고 외쳤으나, “안 됩니다, 언제 어떤 때라도 영애 곁에서 떨어지지 말라는 명이 있었습니다!”라는 이해 못할 대답이 돌아왔다.
어차피 버려진 장난감에게 호위 따위가 왜 필요하다는 건지. 저 사람들 어쩌면 바보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위험하니까 마차 안으로 들어가 주십시오!”라는 외침에는 결국 싸울 의지도 잃어버린 채 얌전히 마차 안에 앉아 목적지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