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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26) (45/152)

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26)

거기서 계속 실랑이를 벌이느라 레이몬드 2황자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노릇. 하는 수 없이 두 사람을 뒤에 단 채로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섰다.

걸음을 옮기는 내내 등 뒤에서 들리는 기사들의 발소리가 그렇게 낯설고 어색하고 불편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아예 황성 밖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바로 앞에서 레이몬드 2황자만 잠깐 만나고 오겠다고 했는데도 굳이 근거리에서 호위하겠다고 나오니 조금 답답하기도 했고.

레이몬드 2황자와 마주하기 전에 조금 더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싶었는데,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이 신경 쓰여 그조차도 힘들었다.

후우, 가슴이 콱 틀어막힌 것처럼 답답해 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두운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며 생각했다. 이 계단을 전부 내려가면 전부 끝이 아닐까 하고. 유리 황녀도, 알렌 4황자도 더는 만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고.

유리 황녀와 조금 더 많은 얘기들을 나눴으면 좋았을걸. 두 사람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도 조금만 더 빨리했으면 좋았을걸. 언젠가 두 사람을 떠올렸을 때 되새길 수 있는 추억을 더 많이 만들었으면 좋았을걸.

내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았던 게 아쉽고 슬펐다.

―황녀 전하께서는 어째서 제게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건가요?

―황녀 전하께서는 어떻게 저를 알게 되셨나요?

하다못해 그 날의 질문에 대한 답이라도 들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왠지 더 이상 유리 황녀는 나를 만나주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더는 나 같은 건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어디 가요? 이쪽이에요.”

생각에 잠겨 멍하니 걷다 보니 잠깐 방향을 잘못 잡은 듯했다. 걸어가던 방향과 정반대 방향에서 레이몬드 2황자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의식중에 레이몬드 2황자와의 대화를 피하고 싶었던 걸까. 나는 민망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그가 서 있는 곳으로 재빨리 걸어갔다.

“헤더 영애와 둘이서만 대화를 나누고 싶군.”

레이몬드 2황자는 내가 다가오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더니, 내 뒤쪽을 향해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말할 때는 듣는 둥 마는 둥하던 기사들이 레이몬드 2황자의 말 한마디에 허리를 깊이 숙여 보이곤 빠른 동작으로 자리를 떴다. 완전히 주위에서 모습을 감춘 건 아니고, 우리가 나누는 대화가 들리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두고서 호위를 하려는 듯한 느낌이었다.

“유리 녀석이 갑자기 과보호네요.”

기사들이 멀찍이 떨어지자 레이몬드 2황자가 웃음기 어린 어조로 말했다.

“헤더 영애가 다쳤던 게 상당히 충격이었던 모양이에요.”

시선을 맞춰오며 휘어지는 눈동자가 꼭 금빛 달 같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이들이 탐을 내고 갖고 싶어 몸부림을 치지만, 아무리 손을 뻗어도 결코 제 손에 쥘 수 없는.

“헤더 영애는 의식이 없어서 몰랐겠지만 아주 울고불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거든요.”

그때 일을 떠올린 듯 그가 살짝 몸서리를 쳤다.

길게 휘어지는 예쁜 눈동자도, 낮고 다정한 목소리도, 처음 만났을 때와 전혀 변하지 않은 그대로였다. 연회장에서 봤던 차갑고 낯선 레이몬드 2황자는 완벽하게 사라진 채, 내가 알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이곳을, 유리 황녀를 떠나면 이제 이 사람을 만나는 일도 없겠구나.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 같은 사람에게도 무척이나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었던 사람. 어디서든 길가에 치이는 돌멩이보다 더 못한 취급을 받던 내게도 상냥하게 웃어주고 손을 내밀어줬던 사람. 에이든 헤더에게 맞은 뺨을 들켰을 때 유리 황녀보다 더 먼저 화를 내주었던 사람.

유리 황녀가 아니었다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말 한 번 섞어볼 기회조차 없었을 사람. 그리고 이제 정말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는 사람. 두 번 다시는.

헤더 영애, 하고 다정하게 불러주는 근사한 목소리도, 눈동자를 길게 휘며 웃는 눈동자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눈이 황홀해질 만큼 아름다운 얼굴도. 더는 마주할 일이 없는 것이다.

그래.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뿐만 아니라, 이 사람도.

그 사실을 자각한 순간 또 한 번 가슴이 지끈거렸다. 누군가 힘껏 심장을 쥐어 짜내는 것처럼 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싫다……고 생각했다.

왜? 라는 질문이 곧바로 떠올랐고, 나는 내가 찰나에 떠올린 감정에 움찔 놀라 재빨리 시선을 떨어뜨렸다.

‘지금 이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되는 게 싫다고 생각한 건가?’

왜? 또다시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나는 무심코 그 질문에 답하려다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 생각하지 마. 알고 싶지 않아.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어.

그냥 그런 거야. 나를 제대로 사람 취급해주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는 현실에서, 그저 아주 조금 다정하게 대해줬던 사람에게 인간적으로 호감을 느낀 것뿐이야. 그건 내가 레이몬드 2황자에게 특별한 마음을 품어서가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한테 친절하게 대해주는 사람에게 호감을 품을 수밖에 없는 거니까. 그런 사람과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게 되었을 때 아쉬움을 느끼는 것도 당연한 거니까.

나는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스스로에게 변명을 늘어놓으며 초조해했다. 혹시라도 찰나에 느낀 감정이 드러나 레이몬드 2황자에게 전해지진 않을까 불안했다.

나는 아닌데. 정말 아닌데. 감히 이 사람에게 주제넘은 감정을 품은 게 아닌데.

“실례.”

갑자기 레이몬드 2황자의 손등이 내 이마에 닿아왔다. 생각에 잠겨 있느라 그가 성큼 다가온 것도 몰랐다. 깜짝 놀랐지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놀랄 새도, 피할 새도 없었다. 그대로 굳은 채로 있으니, 그가 손을 치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열은 없네요. 안색이 너무 안 좋아서, 무리해서 나와준 게 아닌가 싶어서요.”

내가 놀란 눈을 깜빡이면서도 지금 뭘 한 건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가 아무렇지 않게 담담히 제 행동을 설명해주었다.

나는 굳은 얼굴로 그에게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을 던졌다. 지금 제 걱정을 해주실 필요가 있나요, 그보다는 지금 제게 하실 말씀이 따로 있지 않나요, 하고 내뱉으면 되는 말이 목구멍에서 걸려 나오질 않았다.

내가 먼저 말을 꺼내길 기다리고 있는 걸까, 뭐하러 내 걱정까지 해주는 척을 하는 걸까. 이미 다 끝난 판국에.

나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애꿎은 치마만 쥐어뜯었다.

차라리, 지금 내게도, 연회장에서의 그 모습으로 말해주면 좋을 텐데. 더는 미련조차 남지 않게, 냉정하게 잘라내 주는 게 훨씬 덜 아플 것 같은데. 이런 순간에조차 다정하기 그지없는 그가 조금, 아주 조금…… 미웠다.

“몸 상태가 나빠서 그런 게 아니라면……. 그냥 내가 불편하고 싫은 거겠지.”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레이몬드 2황자가 씁쓸한 미소를 띤 채 나를 향해 말했다.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불편하고 싫어해? 내가 그를? 지금 그 말이 왜 나오는 거지?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말에 어리둥절한 시선을 던지는데, 레이몬드 2황자가 손을 들어 제 목덜미를 매만지며 어색하게 내 시선을 피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날 일에 대해 사과해야지, 계속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날 일? 사과?

나는 점점 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만 지었다.

“아니, 그러니까.”

내가 짐작조차 못 하겠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기만 하니, 레이몬드 2황자가 민망한 듯 짧게 헛기침을 했다.

“그 날 연회장에서 제가 영애를 허락도 없이 끌어안거나 했던 제 무례에 대해…….”

“……아!”

나는 뒤늦게 멍청한 소리를 내다 당황해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그제야 레이몬드 2황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했다는 반응을 보이자, 그가 진지한 얼굴로 내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말했다.

“그날 일은 정말 죄송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 영애의 허락 없이 영애의 머리끝에도 손가락 하나 닿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아뇨, 저는 정말 괜찮아요. 이러지 마세요. 어서 고개를 들어주세요.”

“그럼 용서해주시는 겁니까?”

“제가 어떻게 감히 전하를 용서하고 말고 할 수가 있겠어요.”

보는 눈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레이몬드 2황자가 내게 머리를 숙여 보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충격에 빠진 나는 허둥대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게다가 그날도 저를 생각해서 그래 주신 것 알아요. 그리고 오히려, 그날 저를 막아주셔서 감사하다고 여기고 있어요.”

마음 같아서는 억지로라도 일으켜 세우고 싶은 걸 참고 쩔쩔매며 말을 잇자, 짧은 한숨 소리와 함께 레이몬드 2황자가 겨우 몸을 바로 세웠다.

나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로 유리 황녀의 기사들 외에도 다른 누군가가 이 모습을 보지는 않았을까 불안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분명 원망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레이몬드 2황자가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린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고개를 갸웃하는 내게 그가 평소처럼 잔잔한 미소를 띠며 답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거기다 대고 계속 무슨 말을 했냐고 물을 수는 없어 나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 버렸다.

“그리고 실은 하나 더 할 말이 있어요.”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레이몬드 2황자가 다시 진지한 얼굴을 했다.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밤늦게 찾아온 것도,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시간이 날지 모르겠어서 온 거라.”

아아, 이제 본론인가.

계단을 내려오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비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얼굴 하고 있으면 저도 말을 꺼내기가 힘들잖아요.”

떨리는 손으로 죄 없는 치마만 움켜쥐고 있는데, 레이몬드 2황자의 한숨 소리가 귓가를 후려쳤다. 앞서 다정하던 태도와 달리, 묘하게 나를 못마땅해하는 듯한 말투에도 나는 금세 움츠러들었다.

겨우 떨어뜨렸던 고개를 들자 그가 단정한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시선을 멀리 던지는 모습이 보였다. 그도 자신이 직접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지는 않은 듯, 불편한 표정이었다.

“혹시 내가 말 못 꺼내게 미리 선수 치는 건 아니죠?”

“말씀하시려는 게 뭔지 알고 있어요.”

더는 모른 척 듣고 있는 것도 괴로웠다. 바보가 아닌 이상 여기까지 말해줬는데 눈치를 채지 못하는 게 더 이상했다.

나는 무례한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감히 레이몬드 2황자의 말을 끊고 담담히 목소리를 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떨어뜨린 시선 끝에 치마를 움켜쥔 내 손이 떨리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가만히 손을 뒤로 감췄다.

“조용히 물러나겠습니다.”

목소리는 떨리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눈물이 나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추하게 미련이 뚝뚝 남은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이미 마음이 떠난 사람을 붙잡고, 울고,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만큼 비참한 기억도 없다는 걸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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