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25) (44/152)

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25)

* * *

무슨 정신으로 제4궁에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잠이 덜 깨 칭얼거리는 알렌 4황자와 함께 성녀가 머무는 궁을 나서서 제4궁으로 돌아오자, 초조하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알렌 4황자의 유모가 보였다. 그리고.

생각에 잠긴 얼굴로 유모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던 유리 황녀가 멀리서부터 우리를 발견하고는 몇 걸음 다가오다 멈춰 섰다. 저도 모르게 뻗었던 손도 허공에 멈춘 채 머뭇머뭇 등 뒤로 감춘다.

나는 작게 하품을 하는 알렌 4황자를 유모의 손에 맡기고는 다시 유리 황녀를 돌아보았다.

“어, 어디 갔다 왔어요?”

어색한 얼굴로 그렇게 묻는 유리 황녀를 나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전히 내 눈을 피하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시야에 밟혔다.

이 아이는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나라는 존재로 인해 자신이 불행해질 수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지금은,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라면, 나 같은 건 당장에라도 저 멀리 쫓아내고 멀찍이 도망쳐버렸을 텐데.

이 아이는 어째서 아직도 나 같은 걸 곁에 두는 걸까.

“언니, 몸은 좀…… 괜찮아요?”

왜 아직도 나 같은 걸 걱정해주는 걸까.

‘그거야 이 아이가…….’

다정한 사람이니까.

그래서 처음부터 나 같은 걸 거두어들이고, 곁에 두고, 소중히 여겨준 거겠지.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이 아이의 다정함에 기대어 있었을 뿐이고.

‘말하기 힘든 게 아닐까.’

성녀로부터 이야기를 듣기 전부터, 이미 나는 나를 피하는 게 분명한 그녀의 태도에 내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기가 억지로 데려온 거니까, 이제 와서 나가라고 말하기 민망한 걸지도 모르지.’

애초에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유리 황녀가 어째서 나를 그렇게까지 감싸주는 건지, 어째서 여기에 데려와 준 건지, 어째서 나를 곁에 두려 하는 것인지.

그 이유도, 생각도, 감정도,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굳이 성녀의 예지가 발화점이 되지 않더라도 아직 어린아이의 충동적인 감정이라면, 갑자기 하루아침에 변하는 것이라 해도 그리 이상하진 않다.

실제로 나는 그런 사람들을 많이 봐왔으니까. 어찌 보면 지금 유리 황녀의 태도도 내겐 그리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유리 황녀가 내게 말을 걸었다는 잊은 채 나는 계속 내 눈을 피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시선 끝에 유리 황녀의 어깨와 머리카락 끝에 작은 나뭇잎이 붙어있는 게 보였다. 온실에라도 갔다 왔던 걸까. 조금 전까지 비가 왔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나도 모르게 무심코 그녀의 어깨에 붙은 나뭇잎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그 순간, 움찔하며 몸을 움츠린 유리 황녀가 나를 피해 한 걸음 물러났다.

동시에 무언가 눈앞으로 빠르게 추락했다.

쨍끄랑!

날카로운 파편이 튀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하고 아직 파악조차 하지 못한 사이,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지켜보던 시녀들이 경악하여 허둥지둥 달려왔다.

내가 한 걸음만 더 갔으면, 혹은 유리 황녀가 한 걸음을 물러나지 않았다면.

한순간 굳어진 눈동자와 창백해진 유리 황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 순간부터 나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황녀 전하, 괜찮으십니까!”

“황녀 전하!”

다급히 달려온 시녀들이 유리 황녀를 감싸듯 몰려들었고, 나 또한 무심코 그녀가 괜찮은지를 확인하려 다가가다 멈칫했다.

나는 삐걱거리는 시선을 내려 바닥을 확인했다. 분명 멀쩡히 벽에 걸려 있었을 빛의 구 하나가 우리 사이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그런 것처럼.

‘내가 가까이 다가갔기 때문이구나.’

내가 유리 황녀에게 다가가려고 했기 때문에 또다시 그녀가 다칠 뻔했다는 걸 알았다. 성녀 아리아가 말했던 대로. 내가 유리 황녀를 다치게 한 거였다. 내가 유리 황녀를. 나 때문에 유리 황녀가.

“나, 난 괜찮아. 나 말고 언니가 괘, 괜찮은지 봐줘.”

유리 황녀의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전혀 유리 황녀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새파랗게 질린 채 내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 채 이리저리 헤매는 시선도. 불안한 듯 떨고 있는 손끝도.

“다행히 괜찮으신 것 같습니다. 진정하세요, 황녀 전하.”

시녀 중 하나가 침착하게 내 상태를 확인하고는 유리 황녀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유리 황녀는 누가 보기에도 이상할 정도로 덜덜 떨고 있었다. 처음 보는 그녀의 모습에 시녀들도 당황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나는 그저 멍하니, 그런 유리 황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못하고서.

“아…… 그, 그럼 저기, 오늘도 저는 따로 할 일이 있어서 다른 방에서 잘게요. 언니랑 알렌이 무사히 돌아온 걸 봤으니 가볼게요.”

마치 고장 난 인형처럼 그대로 멈춰버린 내게, 유리 황녀가 쫓기는 사람처럼 말을 잇고는 돌아서서 가버렸다.

스치듯 보았던 그녀의 눈동자는 분명 겁에 질려 있었다. 무언가를 알고 있고, 그 무언가가 무척이나 두려운 듯이.

남겨진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선 채로 그녀가 사라진 방향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깨진 유리를 치우던 제4궁의 시녀들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며 소곤거리기 시작할 무렵에야 겨우 정신이 든 나는 텅 빈 유리 황녀의 방으로 힘없이 걸어 들어갔다.

쿵. 등 뒤로 문을 굳게 닫고, 멍하니 방안을 돌아보다 다시 터덜터덜 걸어 창가로 다가섰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지난 걸까. 창밖의 하늘은 이미 새까만 어둠이 내려있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손을 뻗어 창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피부에 와닿았다. 나는 창틀에 허리를 숙여 창틀에 팔을 얹은 채 그 위에 머리를 기댔다.

언젠가는, 하고 어느 정도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덕분일까. 아니면 너무 갑작스러워서 아직 마음이 따라가지 못하는 걸까. 다행히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 사람에게 버려졌을 때처럼 꼴사납게 울면서, 이 황성을 나가지 않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먼저, 나가겠다고, 말해야 해.’

나는 꾹꾹 눌러 담듯 내가 해야 할 말을 고르기 시작했다. 언제, 어떤 표정과 목소리로, 유리 황녀에게, 말을 전하면 좋을지 생각했다.

“아, 다행히 깨어있었네요.”

그래서였을까. 분명 창 아래를 응시하고 있었는데도, 누군가 다가오는 발소리도, 기척도, 그 모습도 아무것도 듣지도 느끼지도 보지도 못했다. 상대방이 먼저 말을 걸어오기 전까지는.

깜짝 놀라 벌떡 몸을 일으키며 눈을 깜빡이자, 창 바로 아래에 서 있는 레이몬드 2황자가 보였다.

“2황자 전하?”

“몸은 괜찮아요?”

벌써 세 번째였다. 일전에도 그렇고, 이 사람은 항상 이렇게 예고도 없이 불쑥 나타나는 걸까 생각했다. 그때도, 오늘도.

순간 내가 또 헛것을 보는 건가 싶어 멍하니 말을 걸자, 질문이 질문으로 되돌아왔다. 다행히 내가 헛것을 보는 것도, 유령이 사람인 척 서 있는 것도 아닌 듯했다.

나는 어떻게 거기 계시느냐, 같은 질문 대신 그의 질문에 먼저 답하기로 했다.

“네, 괜찮아요.”

그리고 그를 만나게 되면 꼭 전해야지 했던 말도 다급히 뒤에 덧붙였다.

“그때, 전하께서 절 도와주셨다고 들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네.”

문득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뒤늦게 창틀에 매달리다시피 하며 목을 길게 빼고 허둥지둥 감사 인사를 하고 있는 내 모습을 인지했다. 아마 저 웃음도 그런 내 우스꽝스러운 모습 탓이 아닌가 싶었다.

나는 민망함에 뺨이 화르륵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뒤로 슬금슬금 몸을 뺐다.

“혹시 아직 열이 남아 있어요?”

아마 레이몬드 2황자가 또 다른 질문을 건네지 않았다면, 그대로 창을 닫고 숨어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의아한 얼굴로 눈만 다시 빼꼼 내밀고는 “아니요.”하고 조그맣게 대답했다.

“움직일 때 다쳤던 곳이 아프거나 그래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럼 잠깐 내려와 줄래요?”

레이몬드 2황자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연회장에서 봤던 냉랭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유리 황녀가 제 오라버니인 그를 무뚝뚝한 사람이라고 표현한 게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

좋은 사람. 나 같은 사람에게도 늘 친절하게 대해 주는 다정한 사람. 내 안의 레이몬드 2황자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유리 황녀가 내 손을 놓아버리면, 그녀와 마찬가지로 더는 만날 일조차 없는 아주 먼 사람.

‘아아, 그런 건가.’

나는 쓸데없는 곳에서 눈치가 빠른 면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줄곧, 좁은 세계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 몸짓, 한숨 한 번에도 끊임없이 눈치를 보고 살아온 덕분에 터득한 것 중 하나였다.

겁에 질려있던 유리 황녀의 눈동자, 홀로 남겨진 방안, 지금 눈앞에 있는 레이몬드 2황자.

마탑으로 떠났다고 들었던 그가 갑자기 찾아온 타이밍이며, 굳이 이 밤중에 할 말이 있다면 불러내는 거며, 달리 무엇이 있겠나 싶었다.

아마 이제 이곳을 떠나줬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레이몬드 2황자를 통해서 말하려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 빨랐지만 언젠가 겪어야 할 일이었다.

나는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움직여 레이몬드 2황자를 향해 대답했다.

“지금…… 내려갈게요.”

* * *

“어디 가십니까?”

적당히 겉옷을 걸쳐 입고 방을 나서자, 텅 비어있을 거란 예상과 달리 복도에는 두 명의 기사가 시립하고 있었다. 낯익은 얼굴이라 자세히 보니 평소에 유리 황녀의 호위를 맡고 있던 기사들이 틀림없었다. 둘 다 키와 덩치가 무척 크고, 선한 인상을 지닌 사람이었다.

유일하게 평소와 다른 점이라면 유리 황녀가 없는 곳에 이들이 있다는 거였다.

혹시 유리 황녀가 돌아온 걸까 주위를 둘러봤지만 복도는 두 사람 외에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제4궁 밖으로 나가시려는 거면 저희가 호위하겠습니다.”

의아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으니, 둘 중 조금 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 쪽이 정중한 말투로 말했다.

호위라니, 나를?

유리 황녀가 없을 때는 굳이 기사들과 말을 섞을 일 자체가 없었기에, 나는 내심 당황하여 입안에서 말을 우물거렸다.

그러다 어쩌면 유리 황녀가 직접 명령을 내린 걸 수도 있겠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이미 버리려고 마음먹은 내게, 뭐하러 굳이 호위까지 붙인 건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어떻게 대답을 할까 고민하다 그냥 솔직하게 말을 꺼냈다.

“2황자 전하께서 할 말이 있다고 하셔서요. 아래층에 잠깐 내려갔다 오는 것뿐이에요.”

“한 시도 떨어지지 말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뒤따르게 해주십시오.”

왠지 점점 더 영문을 알 수 없게 되었다.

목적지와 만나는 상대까지 밝혔음에도, 기사들은 전혀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내가 레이몬드 2황자와 만나는 것까지도 직접 확인할 기세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