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24)
성녀가 리하르트 아델을 언급한 순간부터, 혹시나 하고 모호하게 여겼던 것들이 확실해진 뒤였다.
어쩌면 성녀는 나와 그 사람의 관계에 대해 전혀 모를 수도 있다. 그 사람의 입장에선 당연히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싶을 테니까. 그러니 그녀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로 그저 순수하게 나와 친하게 지내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했던 게 전부 내 착각이었던 거다.
이 사람은 나에 대해, 나와 리하르트 아델의 관계에 대해 전부 알고 있는 거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모른 척 웃으며 내 곁에 다가온 것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눈앞에 있는 성녀 아리아를 경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지 잘 모르겠어요.”
나는 더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불쾌함과 경계심이 뒤섞인 눈으로 성녀를 노려보았다. 순식간에 바뀐 내 태도에 놀란 듯 성녀 역시 입가에 매달고 있던 미소를 지웠다.
“만약에 당신이 약속된 운명을 거슬러 다른 선택을 함으로 인해 누군가를 다치게 한다면.”
그녀가 손등으로 제 앞에 놓인 찻잔을 옆으로 밀어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도 당신에게 있어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가혹한 운명이 존재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건가요?”
더는 웃음기도 없이, 진지한 청은색의 눈동자가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내가 무엇을 숨기려 하든 그걸 전부 들춰내겠다는 듯이 집요한 눈동자가, 나는 조금 두려워졌다.
이 사람은 대체 내게서 뭘 알고 싶은 걸까. 내가 아직도 리하르트 아델에게 마음이 남았는지를 묻고 싶은 걸까, 아니면…….
“예를 들면, 유리 황녀라든가.”
왜 여기서 그 이름이 나오는 거지?
유리 황녀의 이름을 함부로 언급하는 것에 순간 화가 치밀어 나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빙빙 둘러 말하지 말고 똑바로 알기 쉽게 말해주시죠.”
“무서워라, 그렇게 화를 낼 줄도 아는 사람이었네요.”
나답지 않게 언성까지 높이며 화를 냈지만 그녀는 일부러 과장되게 놀라워하며 장난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화내는 얼굴도 완전 내 취향.”
이게 대체 뭐 하자는 거지.
하, 그녀와 나의 신분마저 망각한 채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런 내 무례한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성녀가 테이블 위에 양팔을 얹고 턱을 괸 채 나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내가 왜 성녀라 불리는지 알아요?”
“…….”
“나는 신의 목소리를 듣기 때문이에요. 세상 사람들이 예지력이라고 말하는 힘에 가깝죠. 성국을 비롯해 수많은 크고 작은 나라들이 내 힘을 탐내고, 두려워하고 있어요. 내가 가지고 있는 건 누군가의 불행을 막을 수도 있고, 누군가의 기회를 빼앗을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게 죽음을 내릴 수도 있는 힘이니까.”
가벼운 시작과 달리 점점 가라앉는 그녀의 목소리가 말에 무게를 더하는 것만 같았다. 조금의 거짓도 느껴지지 않는 진지한 눈동자와 목소리가, 나는 무서워졌다.
“나는 우연히 두 사람의 미래를 봤고, 그 미래가 안타까워서 말해주는 것뿐이에요.”
똑바로 시선을 마주해오는 청은색의 눈동자가 마치 내 속을 꿰뚫어보듯 응시해왔다.
“최근에 헤더 영애의 주변이나 헤더 영애 본인이 다치는 일들이 많지 않았나요? 혹은 꼭 헤더 영애에게만 가혹한 상황이 생긴다거나. 어떤 시점들을 기준으로요.”
성녀의 말은 유독 알아듣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다고 할까.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단어를 쓰는 것도 아닌데도, 이상하게 그랬다.
그런 내 생각이 겉으로 드러났던 걸까. 성녀가 이해한다는 듯 잔잔한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그래. 지금 영애가 제일 가까이 지내고 있는 레이몬드 2황자와 유리 황녀, 그리고 저기 잠들어있는 귀여운 황자님 말이에요.”
지금은 곁에 없는 두 사람이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딘가를 가리키던 그녀의 손가락이 마지막엔 알렌 4황자에게 가 닿았다.
“혹시 그 세 사람이 다쳤다든가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든가. 그런 일들이 잦지 않았냐고 묻는 거예요. 전혀 그렇게 될 이유가 없었는데도요.”
그러고는 입가의 미소를 더 짙게 하며 내 눈을 똑바로 직시해왔다.
“물론 헤더 영애 본인에게도.”
리하르트 아델의 얘기를 꺼내는가 싶더니 갑자기 운명을 믿느냐는 둥 뜻 모를 소리를 하는 그녀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질문이 이어질수록 나는 그녀가 단순히 실없는 말을 늘어놓고 있다고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세 사람의 이름이 언급되자마자 곧바로 머릿속을 스치는 기억들이 있는 탓이었다.
유리 황녀가 헤더 자작저를 찾은 날을 기점으로 갑자기 지나치게, 그리고 필요 이상으로 내게 화풀이를 해댔던 에이든 헤더. 단순히 리하르트 아델 공작이 내게서 완전히 등을 돌렸기 때문이라고 보기엔 이상할 정도로 폭력적인 모습을 보였던 빌어먹을 사촌 동생.
처음 황성에 들어오던 날, 레이몬드 2황자가 함께 타고 있던 마차가 갑자기 전복되었던 일. 레이몬드 2황자가 아니었다면 부서진 마차처럼 땅에 처박혀 온몸의 뼈가 으스러진 채 죽을 수도 있었던 날의 기억도, 뒤이어 또렷이 떠올랐다.
그리고…… 멀쩡하게 내걸려 있던 내 그림이, 알렌 4황자의 자그마한 몸 위로 쏟아져 내렸던 더없이 끔찍한 기억도. 내 팔에서 흘러나온 피로 물든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내 모습도.
마치 기다렸다는 듯 차례대로 떠오르는 기억들에 소름이 끼쳤다.
“표정을 보니 짚이는 게 없진 않나 보네요.”
혼란스러워하는 내게 성녀가 무척이나 자애로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혹시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그리고 그 모든 게 누군가 일부러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만들고 있는 거라는 생각은요?”
뭔가를 더 생각할 시간도 없이 계속해서 날아드는 질문에 머릿속이 핑핑 도는 기분이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죠?”
얼핏 듣기엔 분명 나를 걱정하는 듯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런데 나는 그녀가 한마디 한마디를 꺼낼 때마다 나를 비웃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헤더 영애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었던가요?”
어떤 대답을 꺼내야 할지 몰라 가만히 그녀의 질문들을 듣기만 하고 있던 나는 움찔하며 놀란 얼굴을 했다.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혹시 내가 벽화를 그리던 걸 본 건가.
“왜 그렇게 놀라요. 말했잖아요. 난 정말 많은 것들을 볼 수 있고, 또 알 수 있다고.”
성녀가 또다시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나는 무심코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헤더 영애는 만약 누군가가 자신이 그려놓은 그림을 망치려 들면 어떻게 할 것 같아요? 그 사람이 그림을 망치도록 내버려 둘 건가요? 아니면 그 사람이 그림을 망치지 못하도록 저지할 건가요?”
“당연히…… 저지하겠죠.”
또다시 의중을 알 수 없는 질문이 날아들었다. 그나마 이번엔 애초부터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이라, 나는 테이블 위를 정처 없이 헤매던 시선을 간신히 들어 성녀를 바라보며 답했다. 성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게 정상적인 반응이겠죠. 그래서 지금 세계가 헤더 영애를 망가뜨리려는 거예요.”
얼굴만큼이나 예쁜 손가락을 들어 나를 가리키며 그녀가 처음으로 입가의 미소를 지워냈다.
“다른 사람들은 그에 휘말려 들었을 뿐이고요. 그저 헤더 영애의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요.”
그저 웃지 않고 무표정하게 있을 뿐인데, 성녀는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나를 똑바로 노려보는 서늘한 청은색의 눈동자가 무서웠다.
“왜냐하면 그 세 사람은 운명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운명이 허락하지 않은 당신을 제거하기 위해서 세계가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거죠.”
아르가디아를 연상시키는 그 아름다운 눈동자에 비치는 건 아주 단순한 감정이었다.
나를 향한 증오.
“당신도, 당신의 주위를 맴도는 세 사람도 함께 없애버리기로.”
이 사람, 아까부터 계속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그렇게…… 계속 모르는 척하고 싶었다. 성녀가 하는 말들을 전부 알아듣지 못한 척 이대로 다시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에게 돌아가고 싶었다.
내가 곁에 있었기 때문에 레이몬드 2황자도, 알렌 4황자가 죽을 뻔했다는 사실도. 그리고 어쩌면 유리 황녀도 앞의 두 사람처럼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는 사실도. 전부 모른 척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하고 싶었다.
전부 인정하는 순간부터 나는 두 번 다시 그 사랑스러운 사람들에게로 돌아갈 수 없게 될 테니까.
손끝이 떨렸다.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떨림이 점점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나는 입술을 벙긋거렸다. 몇 번이나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다시 입을 닫기를 반복하다 간신히 말문을 열었다.
“지금까지 한 말들의 의미는…….”
나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한 번 힘껏 깨문 후, 힘겹게 목소리를 냈다.
“제가 곁에…… 있으면, 세 사람 중 누군가 또다시 다치게 된다는 뜻인가요? 그리고 그 사람이…….”
레이몬드 2황자, 알렌 4황자, 그리고 다음은…….
차마 그 이름을 꺼내지도 못한 채 나는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성녀 역시 굳이 유리 황녀의 이름을 다시 꺼내어 대답하진 않았다.
긴 침묵 속에서 떠오르는 건, 성녀를 만나고 돌아온 후 나를 피하기 시작한 유리 황녀의 얼굴이었다. 유리 황녀가 만약 성녀로부터 나와 똑같이 이 사실을 전해들은 거라면. 불편하고 꺼림칙한 무언가를 대하는 듯하던 그 표정이 사실은 겁에 질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녀에게, 그런 존재가 되었으니까.
“뭐, 아무리 유리 황녀라도 자기가 억지로 붙들어놓은 사람에게 갑자기 떠나달란 말을 쉽게 하긴 힘들겠죠.”
안타까움이 짙게 밴 음성이 귓가에 닿았다.
방금 생겨난 상처를 칼로 후벼 파는 듯한 성녀의 말에도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 정도로 불쑥 눈앞에 내밀어진 내 미래가 너무도 참담하고 고통스러워서. 울며 현실을 부정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아직 어린아이니, 죽음이 두렵지 않을 리는 없고.”
죽음, 그런 끔찍한 단어까지 나와 유리 황녀의 사이에 생겨날 수 있는 건가.
토할 것처럼 심장이 뛰는데, 신기할 정도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차갑게 식어 내리는 느낌이었다. 시야를 가리던 희뿌연 안개가 걷히고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황녀 전하께서도 이 사실을 알고 계신 건가요?”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내 질문에 성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시선으로 나를 똑바로 응시해올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했다.
그래서였구나.
그래서…….
갑자기 나를 피하기 시작한 거였구나.
가만히 아래로 떨어뜨린 시선 끝에 안쓰러울 정도로 벌벌 떨고 있는 내 손이 보였다.
그 상태 그대로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하는 내 귓가로 성녀의 담담한 음성이 닿았다.
“비가 그쳤네요.”